04.



“끝났다…”


일주일을 정말 새하얗게 불태웠다.
조별 과제만 3개라니, 차라리 죽여주세요. 게다가 주말에는 한껏 달렸더니 속도 말이 아니다.
마지막 발표 조원의 발표가 끝나는 걸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책상과 몸을 한껏 밀착시켰다. 이제 당분간은 좀 숨통이 트이겠다. 내 공부도 할 수 있겠지.


“이런 날엔 맛있는 것 좀 먹어 줘야지.”
“아, 미안… 나 선약 있어.”
“니가 나 말고도 친구가 있어?”
“있거든.”


나를 무시하는 (그러나 맞는 말만 하는) 승희를 무시하고 기숙사에 짐만 내려둔 채로 책방으로 달려갔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내일도 온다고 큰소리를 쳐놓고 장장 일주일만에 등장했다.
물론 책방 주인은 그냥 흘러가는 말로 들었을 수도 있지만.


“안녕하세요!”


너무 크게 말했나. 나도 모르게 도착하자마자 문을 활짝 열어 제꼈다. 어차피 사람도 없는데 그냥 조용히 말할걸. 갑자기 창피함이 몰려왔다.


여전히 책방 주인은 맑은 표정을 하고 나를 쳐다본다. 카운터에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가 내가 오니까 살며시 일어났다.


“오셨어요?”


다행이 날 기억하는 눈치다. 나는 오는 내내 혹시나 날 까먹었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일주일이나 지난 일이고, 나는 단골도 아니고 고작 한 번 본 손님이니까, 나를 까먹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특별하게 찾는 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괜히 한 번 시집이 있는 쪽을 슥 훑어보았다. 그런데 보통 책방이라고 하면 소설들보다는 만화책이 많지 않나? 특이한 곳이네.


“윤동주 시인 좋아하세요?”


어디서 많이 본 제목을 아무거나 꺼내들었더니 그 유명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였다.
언제 옆으로 왔는지 생긋생긋 웃으면서 말을 건다.
아무래도 계속 혼자 이런 책방에 있으려니 조금 심심했나보다.


“원래 소설만 읽었는데, 시도 좀 읽고 싶어서요.”
“왜요? 오늘 신간 나왔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주인은 내가 성인 만화를 골랐던 코너를 가리킨다.
확실히 종류가 더 많아진 게 보였다. 신상이 나오면 간간히 업데이트도 하나보다.


“아 장난이었어요 정말!”
“하하하-”


왠지 그가 더 격하게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아서 적응이 안됐다.
약간 낯을 가리던 사람인 것 같은데, 이렇게 쾌활한 사람이었나? 나는 오히려 내가 좌불안석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나는 일주일동안 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자꾸 밀려들었다.


“이거 빌려 갈게요.”
“네, 열흘 뒤에 주시면 돼요.”


사실 뭔가 더 말하고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 주인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 조차 힘들었다. 일주일만에 무슨 바람이 분걸까.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일주일만에 이 책방까지 뛰어오면서 오로지 그 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본 그의 모습에 갑자기 불타오르듯이 얼굴에 열이 올랐다는 것을.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라서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
당최 나는 저 사람에게 무얼 바라고 가까워지려고 노력한 걸까. 처음에는 그냥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이런 책방 하나 알아두면 좋을 것 같은 마음도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살며시 책을 놓는 가느다란 손가락, 아무도 없는 그 안에서 혼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모습, 에어컨 바람에 살랑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내가 문을 열자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눈빛까지도,

나는 그를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의 첫인상이 결정 되는 시간은 고작 3초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는 시간은, 고작 5초라고 한다.
나는 그 눈을 마주하던 5초의 찰나에 그에게 주문이 걸렸나보다.



*


기숙사에 도착했는데 웬일로 룸메가 없었다. 집돌이라서 맨날 기숙사에만 붙어있던 앤데 어딜갔지. 여자친구라도 만나러 갔나.

욱신,
또다시 여자친구라고 말을 하니까 한켠이 아려온다. 답지않게 여름을 타나?

에어컨 바람을 맞고 있으니 온몸이 시원해지면서 그나마 진정이 됐다.
순간 내가 되게 무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손님이지만 그렇게까지 넉살 좋게 대해줬는데 마치 도망친 거처럼 볼 수도 있겠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니 되게 미안해지더라. 내가 그 사람 입장이었으면 민망했을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통성명도 안한 손님과 가게 주인 사이인데 아무리 친해져봤자 단골 정도 아닌가?


혼자 찔려서 오바하다가 온 것 같아서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자책했다.
멍청이, 멍청이! 그냥 대충 말 하다가 오지, 저번에는 잘만 말했으면서 오늘은 왜그랬대?


“하...... 어차피 다시 가야 되네.”


사람의 경계선이 무너지는 것에 큰 기쁨을 느낀다. 차가워 보이기만 했던 그 사람이 내 농담에 웃고, 내 방문에 들뜨고.
나는 그것이 퍽 와닿았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린다는 게 그렇게 설레는 일이었나.

얼음으로 치장한 줄 알았는데 사실 뚫기가 쉬웠다.
그건 왜였을까.
그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나에게만 그래줬던 걸까?


나는 또다시 그 사람 때문에 잠을 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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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4 15:42 | 조회 : 2,001 목록
작가의 말
천재일우

안녕하세요 !! 조금 루즈해진 것 같으니 다음 화부터는 조금 진도를 빼야겠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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