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할까요?”
“조심히 가세요.”


회의는 무슨 회의. 서로 눈치게임만 하다가 끝난구만. 나는 결국 조장이라는 이유로 과제의 절반 이상을 떠맡았다. 서로 눈치보면서 제일 쉬운거 하려고 하는 꼴이 보기가 싫어서 그냥 내가 하겠다고 한 말이 화근이었다.
좀만 어려워 보이거나 질문이 있으면 바로 나부터 찾았다. 결국 또 이렇게 되는구나.


“도재현!”
“어, 왔어.”


노트북에 머리를 박고 끙끙거리고 있으니 어느 새 승희가 도착해서 내 앞자리에 앉았다.
지끈거리는 머리가 한시름 풀리는 기분이다.


“이번에도 무임승차야?”


팀원들이 어지르고 간 테이블을 쓱 훑어보더니 내 표정을 살핀다. 역시 눈치가 꽤 빠르다.


“그 정돈 아니야.”
“아니긴, 너는 거절하는 법 좀 알아야 돼.”


또 배가 아파지려고 한다. 스트레스만 받으면 이렇게 장이 꼬이듯이 아파온다. 나는 잔소리 하지 말라고 손을 내저었다.
승희는 그래도 나름 걱정이 됐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난 노트북을 더 보고 있다가는 토라도 할 것 같아서 얼른 덮고 짐을 챙겼다.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곱창 먹을까?”


역시 날 잘 아는 자식.



*


한창 곱창을 먹고 있는데, 문득 내가 뭔가를 빼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카페에 뭘 두고 왔나?

빠뜨린 물건이 있나 싶어서 가방을 뒤적거려 봤지만 지갑, 핸드폰, 노트북, 책…
있을 건 다 있었다.


“뭐 놓고 왔어?”
“아니, 아니야.”
“그럼 왜 갑자기?”


갑자기 가방을 뒤적거리니까 어디가 이상한 애 같았나 보다.
그런데 나도 내가 왜 갑자기 쎄한 느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걸 승희가 알 리가.

그냥 괜한 느낌인 것 같아서 일단은 알겠다고 말했다.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내가 뭔가를 잊어버릴 정도로 특별한 일정이 있던 것도 아니니까 아마 과제 할 생각 때문에 잠깐 쎄 했다보다 하고 잊어버렸다.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 책방 주인은 내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첫인상이 좋은 사람, 자주 보고 싶은 사람 정도.
과제 지옥에 찌들게 되자마자 이렇게까지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물론 그 책방 자체를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단지 좀 여유로워지면 가야지, 하고 생각했을 뿐.


그때까지만 해도 그 책방이라던가, 그 주인의 웃음이라던가, 빨개졌던 귀 따위는 나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


“재현- 지금 들어와?”


곱창을 배 터지게 먹고 나서 아이스크림까지 3개나 먹고 왔더니 배가 불쾌할 정도로 불렀다.
헉헉 거리면서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자 룸메가 쳐다보기도 싫은 아이스크림을 빨면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욱, 이젠 아이스크림만 봐도 토할 것 같다.


“오늘도 오자마자 과제야?”
“오늘이라도 좀 해놔야 주말에 편해서.”


오자마자 씻고 바로 노트북부터 열었다. 할 게 너무 많은데 주말에 약속까지 잡혀있었다.
나중에 편하기 위해서는 미리미리 해놓는 게 편하다고 생각해서 늘 이렇게 어느 정도까지는 마무리를 지어야 마음이 놓였다.


“좀 쉬엄쉬엄 하지~”
“괜찮아. 너는 내일 공강인데 집 안가?”
“나 내일 여친 만나느라 내일 가려고.”


좋을 때다. 나는 괜히 부럽기도 하고, 뭔가 전에 없던 감정이 들었다.
룸메는 사귄지 얼마 안 된 여자친구가 있는데, 그래서 맨날 나한테 떠들어 대던 얘기들을 이젠 전화기 붙잡고 여자친구한테 한다.

나야 뭐 더 이상 시끄럽지 않아서 좋은데 괜히 외로워지는 느낌이었다.
원래 전혀 부럽다거나 질투 같은 건 없었는데, 룸메를 뺏겼다는 기분이라기 보다는 그냥
나도 누군가랑 연애라는 걸 좀 해보고 싶었다. 한동안 이리저리 치이느라 하도 연애를 안하긴 했구나.


“신 하림, 연애하니까 좋냐.”
“개좋지. 넌 연애 좀 안하냐.”
“뭐 상대가 있어야 하든 말든 하지.”


누굴 놀리나. 나는 괜히 그만 좀 처먹으라고 장난을 걸면서 주제를 넘겼다. 왜 하필 그 때 잊고 있었던 책방 주인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그냥 ‘아, 오늘 못갔네.’ 이 생각이 들어서 떠오른 줄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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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4 02:59 | 조회 : 2,197 목록
작가의 말
천재일우

잘부탁드립니다~ 저는 주로 새벽에 올리는데, 낮이 편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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