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같았던 윤여사가 떠나고 다시 둘만 남겨진 넓은 공간에는 침묵이 흘렀다.
"너무 신경쓰지마. 그냥 맛있는 밥 한끼 공짜로 먹는다고 생각해도 되고. 혹시라도 내가 남자라서 그런거라면 걱정할 필요없어. 내가 널 그런 상대로 볼 일은 없을테니까."
시우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거실 쇼파에 기대듯 앉아 딱딱하게 말했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은근히 열받네! 내가 어디가 모자라서 네 눈에 들 일이 없을거라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거야!
말은 안했지만 속으로 여장한 자신을 조금은.. 길거리를 가다 보는 평범한 여자보다는 예쁘다고 생각한 지호였기에 시우의 말에 알수없는 자존심이 구겨졌다.
"그래? 그거 참 고맙네. 덕분에 밥값도 굳고 맛있고 비싼 밥을 먹겠어."
"그래. 굳이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
"뭐? 굳이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웃기고 있네! 누가 너한테 고맙댔냐고!"
탁
캔을 따자 거품이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캬~ 은근 싸가지야!"
그 망할 여장을 하고 일을 했던 선우시우의 집에서 퇴근 후 지하철을 한 참을 타고서야 살고있는 동네에 도착할수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또 한 참을 걷고 걸어 어느 작은 동네 꼭대기 즈음되는 곳에 지호의 월세집이 있었다. 평상에 혼자 앉아 손에는 사이다캔을 쥐고 바닥에는 감자칩 봉지가 뜯어진채였다.
"아~ 맛있다. 역시 사이다야. 이럴땐 사이다가 최고지!"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감자칩 중 가장 커보이는 것으로 하나 집어들었다.
"그래 너 잘났다! 그리고 뭐? 네가 날 그런 상대로 볼 일이 없을거라고? 누군있댔냐? 어? 있대? 네가 좋다해도 내가 싫다 이 말이야."
왼손 엄지와 검지로 집어든 감자칩이 이리저리로 공중에서 흔들거렸다.
"무엇보다! 나도! 남자란말이다! 네 취향인 귀엽고 예쁜 여자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너한테 그런 말 들을 이유도 없단말이야! 이씨!"
허공을 가로지르던 감자칩이 드디어 바스락거리며 입안에서 사라졌다. 뒤이어 오른손에 들려있던 사이다를 마셨다.
"... 내일도 가야된다니. 미치겠네."
*
삐비비빅 삐비비빅
"싫어도 아침은 밝아오고."
알람소리에 간신히 눈을 뜨고 밖으로 나가자 어젯밤 먹고 그냥 둔 사이다캔과 감자칩봉지가 평상 위에 있었다.
"있다 치우자."
평소와 다름 없이 출근 준비를 하는 손이 바쁘다. 회사까지 거리가 멀기때문에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바쁘게 준비해야 아침으로 빵을 먹을 수 있을까 말까다.
"아.."
그렇게 쉴틈없이 움직이던 손이 우뚝 멈춰섰다. 그 아래에는 가발과 브라가 있었다.
"젠장!"
결국 어제 가져갔던 가방에 그것들을 다시 쑤셔넣었다.
"계약 끝나기만 해봐. 사장부터 죽여버릴거야."
*
"지호야, 같이 점심 먹으러 갈래?"
오전 내내 1시부터 얼굴 볼 싸가지에 정신이 팔려 뭘 했는지 기억도 없었다. 멍하니 있는데 민호 선배가 말을 걸어왔다.
"선배 미안해요. 저 당분간은 오후에 다른데 파견나가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아요."
"아.. 그래? 아쉽다. 같이 일해서 얼굴 자주보고 이야기도 많이 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민호 선배는 무척이나 실망한듯 기운없는 강아지같이 시무룩해졌다.
으아, 어떡해! 저런 똘망똘망한 눈으로 날 보다니.. 선배가 저런 얼굴을 하면 내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 같잖아!
"일 끝나면 같이 한잔해도 되고 곧 복학할건데 그럼 학교에서도 볼거잖아요.."
"그치만 학교에는 사람도 많고 바쁘잖아.."
"오전에는 여기로 출근하니까 그때 얘기도하고 그래요. 네?"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럼 우리 지호 힘내고! 너 특히 오늘 기운 없어보였으니까.. 이거 먹고! 그럼 내일 보자."
민호선배는 자신의 슈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막대 사탕을 찾아 내 손에 쥐여주고는 뛰어갔다.
독특한 선배야.. 막 불쌍해보였다가 갑자기 힘이 솟아난것 같아보이고.. 아.. 나 때문이었나? 하여간에 잔정도 많기는.
부스럭
비닐 포장이 된 막대 사탕을 까 입에 넣었다. 달달한 과일향이 입안 가득히 퍼지며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것 같았다.
"츕, 나름 괜찮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