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내 할아버지의 장례식 2

난 집사가 대답하든지 말든지 집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까의 일행은 분향소로 들어갔는지 이미 안 보였다. 생전의 할아버지는 정말 다양한 사람을 사귀었나 보다.
새삼 손님들이 평범하지 않게 보였다.

한 인간이 일생을 살면서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까. 그리고 그들의 가치는 모두 동등한 것일까.

난 할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최근에 있었던 기묘한 사건이 하나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학교로 연락이 왔다.
솔직히 말한다. 기숙학교를 다니는 난 할아버지에 대한 걱정보다는 집에 간다는 기쁨이 더 컸다.

어쨌든 특별 결석허가서를 끊고 집에 오자마자 할아버지의 방에 갔다. 방에는 병원에서 파견 나온 의료진과 친척들이 모여 있었다. 대낮임에도 어둡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말했다.


“크란드가 왔어요.”


할아버지의 귀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소리를 들어서 큰소리가 아니면 잘 듣질 못했었다. 그런데도 몸이 약해져서인지 꽤 작은 소리로 한 말임에도 감았던 눈을 뜨고는 벌떡 일어나 나를 쳐다봤다.


“믿느냐?”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한 반문을 긍정의 뜻으로 받은 모양이었다. 손가락에서 꼼질 거리며 무언가를 빼더니 내 왼손 중지에 끼워주신 걸 보니.

?

할머니와는 사별 후에 결혼반지를 뽑아버리고, 어른들에게 사업을 물려주신 뒤로는 회장 반지를 뽑아버린 분이었다.
그래도 한 개의 빨간 루비 반지가 남아있었는데 붉은 알은 타오르는 심장이고, 투명한 링은 눈물로 커런덤이 만든 반지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헐렁하던 반지가 갑자기 내 손가락에 맞는 크기로 줄어든 것과 동시에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얘야, 오늘은 아니란다.”


“엑!”


반지가 줄어든 것보다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더 놀랐다. 소리가 난 곳인 할아버지의 머리맡을 보자 거기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와 창백한 피부에 검은 정장을 입고 한 손에는 검은 가죽 책을 들고 있었다. 다른 손에는 검은 지팡이를 쥔 차림새로 남자는 피곤한 듯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이틀 뒤야, 윙클리드. 더 이상은 안 돼.”


예쁜 달개비 꽃 색의 눈을 가진 그 남자는 할아버지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를 불러야 하나.”


희미하게 할아버지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방은 다시 화창한 여름 낮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 남자를 보지 못했고, 이틀 뒤 할아버지는 운명하셨다.

난 그 남자가 할아버지를 데려가는 걸 꿈으로 봤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난 우리 할아버지라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을 느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리도 이상한 조문객이 오는 걸까.

어째서 사신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친구처럼 친근한 어투로 불렀을까. 그리고 할아버지는 왜 루비 반지를 나에게 주셨을까.

언젠가 할아버지가 반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말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부적이란다. 나와 내 가족을 지켜주는. 그것은 신성한 ‘약속’이지.”


좋아. 결정했다.
나, 크란드 리 발세르는 할아버지의 비밀을 파헤치겠다. 더불어 ‘약속’이 무엇인지도.

갑자기 내 눈앞에 할아버지가 서 계신 것 같았다. 거의 본 적 없는 건강한 모습으로.

할아버지의 방은 정리가 거의 끝났다. 옷가지와 쓰지 않을 침구류는 재활용 센터에 보냈고, 가구들은 알코올로 한 번 닦고 천을 뒤집어 씌웠다.

하지만 이 층에는 아직 서재가 남아 있었다. 비교적 건강하셨을 때 주로 애용하셨던 할아버지 전용서재가. 나 혼자 멋대로 만든 책임감과 사명감에 서재로 가는 동안 머릿속에는 행진곡이 울리고 있었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서재의 문을 열 때였다. 예전엔 몰랐었는데 이제 와 보니 손잡이의 촉감이 낯설었다. 차갑고 매끈한 느낌.

문손잡이는 보통 나무나 금속을 많이 쓰는데 서재의 손잡이는 특이하게도 유리 비슷한 느낌의 투명한 돌이었다. 어쨌든 닫힌 문은 안 잠겨 있었다.
지식이란 모두의 것이라는 가훈에 맞게 절대로 잠그는 법이 없어서였다.

어둠을 지나 어른들 몰래(공식적으로 나는 늦은 저녁을 먹고 자러 간 거니까), 문소리도 내지 않고 모든 어려움과 장애물을 헤치고 서재 안에 들어서는 순간 작고도 새로운 내 모험의 2막이 시작됐다.




한밤중이라 매우 어두우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방안에는 불빛이 있었다. 그것도 살아서 일렁거리는!

황당함에 사방을 둘러보니 커튼을 친 커다란 창을 배경으로 원목 책상 위의 수정 구슬에서 불빛이 나오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갈수록 불은 밝아졌고, 동시에 서재 안의 풍경도 밝게 보였다.

물론 전등을 켠 것과는 달리 사방으로 퍼지는 불빛이 그림자를 변형시키기는 했다. 몇 겹의 그림자가 진 벽에는 벽을 둘러싼 책장들과 함께 여기저기 자연스레 늘어서 있는 보석 원석들이 보였다.

기억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보석 욕심이 많으셨다. 특히 루비와 사파이어에 대해서.

오죽하면 자신의 관 뚜껑에다 미리 사파이어로 만든 무늬를 주문하셨을까. 어른들은 할아버지 사후에 그 사실을 알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치스럽긴 했지만, 할아버진 남에게 빚지지 않고도 그만큼의 보석을 모을 능력이 되셨으니까.


“에취! 인간의 아이다!”


예상 못 한 장소에서 낯선 목소리가 났다. 온몸의 털이 모조리 천장을 향했다. 여긴 나밖에 없을 텐데! 도둑인가!


“어이, 꼬마. 날 꺼내. 배가 고프다구.”


천장부터 방바닥까지 훑어보는 데는 시간이 얼마 안 걸렸다.

그리고 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의심했다. 책상 위 스탠드같이 빛을 내는 수정구 반대쪽에 투명한 수정 구슬이 있었다. 그 속에는 이상하게 생긴 주황색 도마뱀이 빙글빙글 돌면서(액체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마뱀 처음 보냐? 얼른 꺼내! 그럼 나한테 좋은 일이 있을 테니.”


심지어 자기중심적인 그 녀석은 이제 머리로 구슬 벽을 툭툭 치고 있었다.

아니, 그 전에 도마뱀이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던가? 앵무새나 구관조도 아닌데? 혹시 내가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누르며 난 그놈에게 말을 걸었다.


“너…넌 뭐니? 왜 그 안에 있어?”


“난 크립소스로 이건 사파이어 결계야. 못된 윙클리드가 나를 가두었지. 이 구슬을 들어서 힘껏 땅에다 내리치면 난 자유가 돼. 빨리 날 풀어.”


보자보자 하니 웃긴 놈이었다. 기특하게도 파충류 주제에 말은 유창했지만, 버릇이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정중히 부탁하지 못할망정 저런 명령조의 말을 하다니.


“싫어. 부드럽게 말할 수는 없어?”


“망할! 130년도 넘게 굶었어. 너에게서도 윙클리드의 냄새가 나! 꼬마는 어른의 말을 듣는 법이야! 빨리 구슬을 던지란 말이 닷!”


냄새라니! 난 매일 샤워를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한다.
거기다 할아버지에 대한 욕설과 흥분으로 커진 목소리로 순식간에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놈을 쳐다봤다. 네놈은 겸손을 배워야겠구나. 그 말을 막 입 밖에 내기 직전 도마뱀이 비명을 질렀다.


“윙클리드! 반지의 후계자를 만들다니!”


그 놈은 이상한 소리를 끝으로 조용해졌다. 자세히 보니 조용해진 것이 아니라 온 몸을 떨면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무서운지 가능한 나에게서 먼 쪽으로 온 힘을 다해 벽에다 몸을 비벼대고 있었다. 그래 봤자 수정 아니 사파이어 구슬은 꿈쩍 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반지의 후계자라니?”


난 조금 전보다 여유를 가지고 양손을 내린 후 한 걸음 다가가 물었다.


“가까이 오지 마. 그 반지! 윙클리드의 ‘커런덤의 반지’!”


도마뱀이 눈을 돌리며 말한 반지는 내 왼손 중지에서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좋아, 좋아. 널 해치지 않을 게. 넌 어쩌다가 거기에 갇혔니? 뭐 하는 도마뱀인데?”


도마뱀이 여전히 몸을 떨며 대답했다. 목소리까지 떨려 나왔지만, 아까의 건방진 모습 때문에 별로 불쌍하진 않았다.


“난 옛날에 윙클리드에게 잡혔어. 크립소스들은 아이의 영혼을 먹이로 삼지. 만약 네가 나를 풀어줬다면 너 역시 죽었을 거야. 도마뱀 상태인 우리가 샤먼에게 잡혀서 어떤 형태로든 150년간 갇혀 있으면 결구라고 하는 개가 돼. 결구가 되지 않는 크립소스는 파이롭이라는 이름의 식물로 진화하지. 그 식물은 300년 동안 자라다 꽃을 피우고 죽는데 그 열매가 다시 크립소스가 돼.”


이거 놀라운데? 이 녀석의 말을 들으면 할아버지가 샤먼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샤먼. 영능력자, 심령학자… 아님, 박수(남자무당)인가?

어쨌든 할아버지는 생전에 그런 얘기를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 난 비밀의 문이 조금 열린 것을 느꼈다. 너무 기대를 가지고 도마뱀을 본 모양이었다. 말을 하면서 점차 가까이 다가온 도마뱀이 이런 말을 한 것을 보면.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난 결계의 주인에게는 거짓말을 못 해. 반지에는 많은 힘이 있어. 지금은 네가 반지의 주인이니까…. 윙클리드가 죽었구나! 그렇지?”


“할아버지에 대해 자세히 말해봐.”


“난 잘 몰라. 일기장이나 찾든지. 빨리 대답해봐. 윙클리드는 죽었지? 그렇지?”


보기보다 더 말이 많고 시끄러웠다. 목소리와 행동에 다시 생기가 도는 것이 이제는 내가 무섭지 않아 보였다.


“시끄럽구나. 조용히 해.”


그러자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자기 몸길이만 한 꼬리가 배 앞으로 당겨지고 네 개의 다리도 중앙으로 모이며 눈빛이 흐려지더니 구슬의 중앙에 정지해버린 것이다.

오호라. 반지의 힘 중 하나는 쓸 수 있게 됐군. 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기장을 찾기 시작했다.

책꽂이 사이에도 일기장은 없었다. 벽난로 위 장식 선반 위에도, 보석들이 가득한 진열장 위에도. 마지막 희망인 책상 위와 서랍 속에도 일기장은 없었다.

할아버지도 일기 따윈 귀찮았던 거야.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니느라 몸에는 고운 먼짓가루들이 붙어 있었다. 잠시 쉬어야지.
가죽으로 만든 책상 의자는 크기도 크고 폭신한 것이 편안했다.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쭉 뻗다가 다시 빛나는 수정 구슬을 봤다.

일렁일렁. 불빛은 아까보다 더 밝아져 있었다. 그림자놀이를 하면서 살펴보니 불빛은 내 손이 다가갈수록 밝아졌다. 혹시?

불빛도 반지에 반응했다. 커런덤의 반지라. 아무리 좋은 것도 사용법을 모르면 소용이 없다. 구슬을 만지던 손가락을 그대로 아래로 내리자 받침대가 만져졌다. 단단한 나무로 된 구슬 받침대에는 한 개의 서랍이 있었다.

!

손잡이는 작은 보석이었다. 붉은빛이 나는 게 루비 같았다. 서랍은 부드럽게 열렸고 그 안에는 한 권의 책이 있었다.

검은색인지 다른 색인지 진한 색의 가죽 장정 책. 표지에는 루비로 보이는 붉은 보석이 우리 가문의 문양을 만들고 있었다. 그걸 보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난 할아버지에 대해 잘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집착. 특정 보석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보석의 색 탓인지 표지에서는 알 수 없는 열기가 있는 것 같았다.
결코 내가 남의 비밀을 엿보게 돼서 느끼는 흥분과 긴장만은 아니었다.

난 두껍고 단단한 겉장을 넘겼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하얀 속표지가 나오고 또 한 장을 넘기자 서문처럼 쓰인 한 줄의 문구가 나왔다.


-엘자와 함께 한 시간은 많지 않으나 그녀와의 만남은 내 인생을 바꾸었다-


엘자라니? 엘자 고모님? 동명이인인가? 잉크는 잘 스며들어 오래전에 글이 쓰였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다시 한 장을 넘겼다. 연맹력(=우주공통력이라고도 한다) 320년 칸다르디야력 1895년 네 번째 달 하루.

우와. 연맹력 320년이면 백수십 년도 전의 옛날이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사진 출처
달개비꽃 http://blog.naver.com/n460330/70026924601
납테일게코 도마뱀 http://cafe.naver.com/koreabeetle/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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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7-16 01:07 | 조회 : 1,792 목록
작가의 말
마정

프롤로그가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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