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다르디야 - 생일파티

연맹력 320년 칸다르디야력 1895년 네 번째 달 하루.


나는 오늘 운명을 느꼈다. 앞으로 내 생애 전부를 바칠 종교적, 정치적, 학문적인 주제를 발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선 내 목숨을 걸만한 가치는 있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런 것인가 보다. 앞으로 이 일기장은 내 비밀스러운 친구이자 조력자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는 그 날까지.


오늘은 내가 16살이 되는 날이다. 칸다르디야에서 16살은 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한 최소한의 나이이다. 그래서 성대한 파티를 열어 어른의 세계로 들어온 것을 축하해 준다.

물론 그렇다 해도 진짜로 성인취급을 해주지는 않는다. 투표권이 생기고 경제적 활동을 시작하는 20살은 되어야 독립된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그래도 어쨌든 16살은 특별한 날인 것이다.

무도장 용 응접실이 있는 우리 집은 결코 작은 편이 아니다. 홀에서 공차기하다 깨 먹은 유리와 테니스를 하다 부서진 샹들리에도 얼마나 많은지!

어머니의 잔소리와 깨버린 쓰레기양만 해도 내 한 달 식량은 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내 생일을 축하한다는 핑계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홀과 복도와 응접실과 1층의 여러 방은 창문을 모두 열었음에도 사람들이 만든 텁텁한 공기가 가득했다.



“윙클리드, 생일 축하한다.”


“이제 어른이구나.”


친척 분들과 이웃들이 나를 붙잡고 축하해줬다. 선물과 함께 덕담을 건네줬던 친구들도 군데군데 모여 아직은 금지 품목인 술을 어른들 몰래 마시고 있었다.

특별한 날이라 그런지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 지나가 줬다. 아니면 누구 집 애들인지 몰라서 그런 걸까?


“축하한다.”


“예, 감사합니다.”


이웃들과 부모님 친구분들과 기타 여러 어른에게 인사를 했음에도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당연하다.

이곳 사라센은 칸다르디야의 그 어느 곳보다 사교 문화가 발달한 도시였다. 어느 집 아이의 16번째 생일 같은 건 사실 어른들이 축하파티를 가장한 사교회를 벌이는 거라 봐도 됐다.

우리 집 홀은 그럭저럭 사교장이 될 만한 크기는 됐다. 나 같은 애들은 앉아서 음식만 먹는다는 전제로 말이었다.

맛있는 음식과 선물, 한두 잔 몰래 마신 술로 기분이 좋아진 난 가장 친한 친구인 리큐르드와 함께 구경에 나서기로 했다.
우리 집 구조야 훤히 알고 있으니 구경이라 봤자 별건 아니었다.

어느 집 아가씨가 멋진 드레스를 입고 왔는가, 얼굴은 예쁜가, 연인은 있어 보이는가 따위였으니.

우린 춤 같은 것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저 멀리 약혼자와 춤을 추는 누님이 보였다. 자형이 될 드루발 경은 백작가의 장남이었다.

매너 좋고 사교성 있고 사려 깊은 사람인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M자형의 앞머리와 부친인 드루발 백작의 대머리 정도였다.

두 분과 눈이 마주쳐 살짝 눈인사 후 탄산수 잔을 집고 이동할 때였다. 무도장의 한쪽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서 있는 자세라든지 감탄하는 소리로 봐선 대단한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파티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놀라는 것에는 몇 가지 없다.

입담이 좋거나 비싼 보석이나 특이한 옷차림, 혹은 매우 뛰어난 외모를 가진 사람.

그리고 정말로 드물지만, 그 모든 것을 갖춘 사람. 둘이서 어떻게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는 데 순간적으로 뜨겁고 강렬한 열기가 느껴졌다. 사람들이 내뿜는 단순한 기운은 아니었다.

열기가 사라짐과 동시에 갑자기 시야가 트였다. 그곳에는 음악에 맞춰 우아하고 세련되게, 거기다가 정열적으로 춤을 추는 한 쌍이 있었다.

화산의 용암같이 붉은 남자의 머리카락도 눈에 들어왔지만 내 눈을 지배한 건 여자 쪽이었다.

나보다 몇 살 정도 많아 보이는 그녀의 일부분이 올려간 하얀 머리카락은 밑으로 내려가면서 점점 짙은 보라색으로 변했다.

색도 특이했지만, 머리끝이 살짝 웨이브 져 있음에도 길이가 거의 무릎(!)까지 오는 머리카락의 길이도 눈에 띄었다. 틀어 올려 모양을 낸 머리는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 문양의 루비 같아 보이는 큰 보석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피부는 티 없이 밝은 흰색이었고, 스텝을 밟기 위해 위치를 바꾸는 찰나 그녀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순간이지만 영겁의 시간이었다.

나와 그녀 사이의 공간은 황금빛 공기로 채워지고 주변의 모든 것은 멈춰 있었다. 부연 구름 속에서 몇 개인가 빛나는 푸른 별들이 탄생하고 순식간에 나이 들어 붉어지고 거대한 폭발로 사그라졌다.

불멸의 존재성과 미지의 힘이 담겨있는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는 강한 운명으로 다가왔다.


“윙클리드?”


리큐르드가 나를 불렀다. 그제야 친구가 어깨를 흔드는 게 느껴졌다. 음악도 바뀌었고, 사람들도 흩어져 있었다.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저 일행 때문이지?”


리큐르드가 말했다. 두 명의 남녀는 리큐르드의 부친인 아렌 아저씨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나처럼 멀찍이 서서 그들이 있던 장소, 혹은 그들의 뒷모습만 바라보는 사람들만 남겨두고서.


“커런덤 남매야. 외국에서 왔는데 아버지와 거래하는 사람들이지.”


그래? 분명히 친구는 내 옆에서 말하고 있었지만, 귀로 들어온 말은 반대편으로 흘러내렸고 내 눈은 그들의 뒤만 좇고 있었다.


“나도 집에 가야겠다. 다음에 봐.”


시계를 본 그는 미소 지으며 나에게 인사를 한 뒤 부친을 뒤따라갔다. 몇몇 손님들이 돌아갔지만 밤은 길었다. 홀에선 여전히 음악과 웃음소리가 들렸고 그 탓에 꿈을 꾼 기분이 든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찌감치 방으로 돌아왔다.

샤워하고 잠옷을 입을 때였다. 뭔가가 투두둑거리며 발 옆으로 떨어졌다.

?
주워들고 보니 어디서 본 듯한 파란색의 작은 알맹이였다. 왼쪽 손바닥을 굴러다니던 파란 조각은 약지에서 멎었다.

그 손가락에는 반지가 하나 있었다. 사파이어가 박힌 호펠학교 졸업 기념반지가.
천천히 손을 뒤집자 보석이 빠져 생긴 공간이 보였다.

사파이어 알은 그 공간보다 작았다. 깨졌나 보구나. 그런데 사파이어도 깨지나? 약간의 의문을 가진 채 난 아까의 남매를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제임스 티소의 그림
http://blog.naver.com/blue630417?Redirect=Log&logNo=150014055452

별의 탄생
http://www.cs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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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30 12:04 | 조회 : 1,332 목록
작가의 말
마정

시간이 멈추는 순간이 있다더라. 난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일요일 저녁같은 순간은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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