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내 할아버지의 장례식

엉덩뼈가 찌릿찌릿 아프고, 다리도 저릿하다.

카펫이 더 두껍다면 내 엉덩이는 무사했을까? 방바닥에서는 아무리 자세를 고쳐 앉아도 엉덩이가 아팠다.


“가만히 좀 있어, 계속 꼼지락거리다니. 도대체 요즘 어린애들이란….”


“아야!”


별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내 옆구리를 엘자 고모님이 쿡 찌르면서 핀잔을 줬다. 옆에서 방금까지 울던 분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말짱한 목소리였다.

‘전 올해 10살이 됐어요! 어린애가 아니라 학생이라고요.’

어쩌고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순간 아버지가 보였다.

‘안돼!’

양 눈을 크게 뜨고 격렬히 고개를 젓는 아버지는 고모님의 뒤쪽에 앉아 있었다. 덕택에 내 항의는 소리 없이 공중으로 사라졌다.

어쩔 수 없었다.

엘자 고모님은 아버지의 형제 중 맏이였고 아버진 힘없는 막내였다. 또 고모님은 잘나가는 검사라 잘못 뱉은 말 한마디, 행위 하나하나가 ‘불법’, ‘범법’ 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거기에다 난 막 10살이 되었다. 어른이란 멀고 먼 미래, 아직은 학생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나이인.

이런 말만 하는 내가 당돌하다고? 아니, 나는 싸움 못 하고 눈치 빠른 모범생일 뿐이다.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은 뒤 난 한숨을 내쉬곤 오른쪽 옆을 바라봤다.

독특한 냄새가 나는 하얀 연기가 향 끝에서 올라왔다.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연기 끝은 희뿌옇게 사라졌고, 하늘거리는 연기 뒤에는 큼지막한 액자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액자 안에는 할아버지가 인자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양옆에 모양 낸 검은 리본을 달고, 주변에는 하얀 국화 다발로 멋진 장식도 하고선.

나의 할아버지 윙클리드 프란시아 발세르는 어제 새벽 숨을 거두었다.

돌아가실 때의 나이가 131살로 평균 수명을 약간 넘긴 상태였고 살아 계실 때도 그리 건강하지는 않았었다.

햇볕이 좋은 날에는 볕을 쬐고, 궂은 날에는 콜록 이며 벽난로를 쑤석거리셨으니.


“뭐라고? 안 들려.”


가장 자주 듣던 말 중 하나로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귀가 안 좋아 큰소리가 아니면 잘 알아듣질 못했고 고집도 세셨다.

심지어 본인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말을 나나 3살 어린 여동생이 잘못 말한 거라 우기기도 했다.

그래도 간혹 정신이 맑고 기분 좋은 날에는 간식도 주고, 젊은 시절의 이야기도 해주셨다.
물론 뻥을 잔뜩 섞은 말도 안 되고 믿을 수 없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투성이였지만. 거기다 지금은 안 쓰는 옛날 말들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사실 할아버지와 나는 120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니 그건 당연한 걸 수도 있었다.

흐린 눈동자도 옛날 일을 회상 중인 그때는 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이미 그 눈은 창밖이든 방구석이든 우리가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까마득한 과거의 기억이나 곧 다가올 안식의 영역이었다고 나는 확신했다.

양쪽 다리에서 쥐가 나면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한 무리의 문상객이 돌아가면 약속이나 한 듯 새로운 문상객이 나타났다.

어찌 잠시도 쉴 틈을 안주냐. 난 코끝에 침을 바르고선 그냥 앉아있는 수밖에 없었다.


“조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숱이 풍부한 검은 머리카락에 흰 피부, 검은 옷차림인 처음 보는 젊은 아줌마가 말했다.
그 여자는 흑장미 다발을 내려놓았고, 어른들이 마주 서서 인사를 했다.

꽃다발을 내려놓은 검은 여자는 인사 후 영정사진이 아닌 나를 쳐다봤다. 늦여름 식물의 잎을 연상시키는 진한 녹색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난 네 할아버지 친구란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머릿속을 통해 들려오는 말 같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친구라면 거의 노인이거나 돌아가셨을 텐데? 내가 마주 보고 인사를 하는 동안 그 여자는 어느새 뒷모습을 보이며 떠났고, 공기 중에는 장미향만 떠돌고 있었다. 꽃다발 탓인지 점점 장미 향이 진해졌다.

꽃다발을 보니 진한 녹색 잎사귀에 완벽하게 검은색의 꽃잎을 가진 장미들이 활짝 피어있었다.

‘완전 블랙홀 같잖아? 저렇게 검은 장미가 있었나?’

갑작스러운 의문에 내가 갸우뚱거리는 게 피곤해 보였던 모양이다. 사실 난 이 시간까지 깨어 있어 본 거의 적이 없었다.


“잠시 자렴.”


상주들이 마실 차를 들고 온 어머니가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기다리던 말이었다.

나는 아침까지 몇 시간 잘 수 있는지 계산하며 어른들께 인사를 하고 일어났다. 다리가 저렸지만, 실제보다 더 예의 바른 학생으로 보이려면 참을만했다.
복도와 분향소(일 층의 가장 큰방)의 경계에는 슬론더 형이 벽에 기대어 서서 비타민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형. 다른 애들은?”


“뭐 먹으러 갔겠지. 찾아봐.”


우리 사촌 중 유일한 어른인 형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와 형을 제외하면 모두 어린 여자애뿐이라 형의 관심이 없을 만했다. 난 동생 알리샤와 다른 사촌들을 찾으러 홀을 지나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에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은 문상객들이 음식을 먹고 있었다.

야외용 테이블뿐 아니라 언제나 집안에만 있던 테이블과 의자 역시 모두 밖에 나와 있었고, 그도 모자라 다락에서 꺼낸 듯 백 수 십 년도 더 된 구식 가구들도 보였다.

이래 봬도 우리 집은 지은 지 300년도 넘은 저택이라 커다란 다락 속에 갖가지 보물이 숨어 있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식욕을 자극했다. 밤에 먹으면 얼굴이 붓고 살도 찐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거기다 지금처럼 뱃속에서 창자들이 꼬르륵거리는 순간에는 그런 것 따윈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뷔페식으로 차린 테이블에서 대충 음식을 주워들고 집사인 사라를 눈치껏 쫄래쫄래 따라가 빈자리에 앉았다.
내일은 휴일이었고 손님의 대다수는 밤을 세고(물론 잘 방은 제공된다) 내일 낮의 하관식에 참석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아이들은 전혀 없었다. 이럴 땐 시중을 들러 이동하려는 집사의 소매를 잡아 물어보는 게 최고였다.


“애들은?”


“알리샤 아가씨께서 침실로 데려가셨어요.”


대답을 마친 사라는 빈 접시를 치우러 갔다. 하루에 한 가지 사고를 치는 말썽꾸러기 알리샤가 순순히 침실로 갔다고?

설마! 사라는 안드로메다이고 거짓말은 프로그램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알리샤는 어제부터 다락탐사를 할 거라고 떠들었었다. 성격상 한다면 하지.

사실 오래된 저택에는 비밀이 많은 법이다. 이 집에서 나고 자란 우리도 아직 못 들어간 방이 있으니.
혹시 아는가? 복도에는 비밀 통로가, 평소 출입금지 영역인 다락에는 마법의 도구가 있을런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음식을 빠르게 먹어치우고 일어났다. 잠은 다 잤다. 나도 집안 탐험이나 해야지.


“우 후후후후.”


기분이 좋아 이상하게 웃었나 보다. 현관으로 가는 중에 막 도착한 듯한 문상객 남녀 일행 중 남자가 나에게 다가온 걸 보면.


“상주 중 한 명인가? 분향소는 어디지?”


내 팔에 있는 하얀 띠를 본 것이 분명했다.


“현관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향냄새가 나는 방이 있어요.”


“그래? 착한 어린이로구나. 용돈으로 쓰렴. 난 네 할아버지와 관계있는 존재란다.”


어린이라 불렸지만, 어른이 주는 용돈에 항의는 참기로 했다. 그 아저씨는 용돈을 받고 헤벌쭉 거리는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더니 집으로 향했다.

‘머리 쓰다듬는 데 시간 한 번 오래 걸리는 데?’

그 남자의 손을 무심코 본 나는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양손 다 10cm는 넘어 보이는 노란 손톱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생김새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포니테일로 묶었음에도 허리까지 내려오는 하얗고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역시 흰 피부, 광채 있는 노란 눈에 날렵한 턱, 호리호리하고 꽤 큰 키, 연예인도 아니면서 화려한 외모의 남자였다.

그 남자와 함께 있던 어머니 또래의 여자도 평범한 외모는 아니었다. 흑갈색의 머리를 묶어 올린 끈에는 큼지막한 보석구슬들이 달려 있었고, 역시 구슬이 달린 작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또 검정 옷임에도 여러 색의 보석 장식이 달린 레이스 무늬도 아주 화려했다. 수정으로 보이는 목걸이를 한 여자는 금빛 도는 회색의 눈을 들어 나에게 한마디의 말을 하고 살짝 웃어 보였다.


“너도 재미있는 인생을 살겠구나. 하나를 얻으면 다른 것은 내려놓아야 한단다.”
무슨 말이지?


역시 양손에 4∼5cm가량의 기다란 손톱을 지닌 여자까지 집안에 들어가서야 손바닥이 묵직한 게 느껴졌다.

어버버거리면서 손바닥을 보자 작은 달걀만 한 흰 돌멩이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용돈이 금화가 아니라 돌이었어?

누구지? 할아버지의 친구? 아니다. ‘존재’라는 말은 아무나, 아무에게나 하는 말이 아니다.


“굴절률과 반사율을 보니 다이아몬드 원석이로군요. 어디서 났습니까?”


새로운 접시들을 들고 집사가 지나가다 나를 보고 물었다.


“손…님이 줘… 다이아몬드 원석이라고?”


-부자다!-

사진 출처
흑장미 http://cafe.naver.com/jejudo2/1533
다이아몬드 귀금속 경제 신문, http://blog.naver.com/jewelii74/1201237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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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7-16 01:01 | 조회 : 1,913 목록
작가의 말
마정

처음 뵙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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