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하윤아, 갑자기 왜 늦었니?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이모의 걱정 가득한 표정에 하윤은 고개를 저었다.

"잠깐 친구네 집에 들린 것 뿐이에요."

"그럼 다행이고.... 씻고 나오렴."

하윤은 욕실에서 내내 자신의 배를 만지작거렸다. 납작하고 군살없이 얄쌍한 제 배에 작은 생명이 들어 앉아있다는 말이 몸으로는 믿겨지지 않는다.

귀에서는 진혁의 책임지겠다는 동굴같은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 같았다. 하윤은 작은 배꼽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아기가 배꼽을 통한 탯줄로 나와 이어져 있을까?'

그다음에는 툭 튀어나온 돌기를 제외하고는 납작한 제 가슴을 보았다.

'가슴도 모유로 커지는 걸까?'

인터넷에서 본 임신한 오메가의 가슴은 여성의 것 만 하지는 못했지만, 소량의 모유를 가지고 있어 조금 볼록해 있었다. 그런 상상을 하자, 하윤은 자신의 아랫배가 조금 뜨끈해 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아기가 '나 여기에 있어요!' 라는 것 같아서 감격어린 마음에 코 끝이 찡해진다.

젖은 머리를 털던 하윤의 방에 민채가 들어왔다.

"오빠, 나 궁금한게 있는데......"

민채의 말에 하윤의 머릿속에서 아까 있었던 상황이 재현되었다. 성환과 하는 말을 민채가 들은 것일까? 하윤은 어느새 꽉 쥔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성환이 오빠는 여자친구 있어?"

"어?..... 갑자기 왜?"

예상했던 질문과는 반대였다. 하윤은 놓치기 직전이었던 정신줄을 붙잡았다.

"근데 너 남친 있지 않아?"

"걍 성환이 오빠 여친있냐고 물어본거지, 내가 여친이 되고싶다는 소리는 안 했잖아. 꼭 그렇게 말해야 겠어?"

이제는 엉겹결에 하윤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없을걸?"

"그래? 그 오빠한테 달라붙는 오메가도 없는 거지?"

"어? 으, 응."

하윤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민채는 쓱 웃는다. 순간 하윤은 자신이 성환이에 대해 함부로 발설하여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었다. 다행히 민채의 표정으로 봐선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아까 오메가 친구에 대해서 말하길래.... 성환이 오빠한테 귀찮은 오메가가 하나 달라붙었나 싶었지...."

민채의 말은 무척이나 이상했다. 자신의 알파 남친에 대해 자랑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성환의 연애관계에 대해 간섭했다. 기분이 이상해진 하윤은 재빨리 민채를 방에서 내보낼 수 있을 만한 것을 찾았다.

하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몇달 전에 샀던 여돌 '블루데일리'의 앨범이었다.

"아, 민채야. 너 저거 가질래?"

"블루데일리? 나 걔네 이제 안 좋아하는데, 나 남친 있잖아."

남친생기면 좋아하던 아이돌을 그만 좋아한다는 사실이 하윤에게 아이러니하게 들려온다.

"아니..... 근데 오빠, 블루데일리 엄청 좋아하지 않았어? 왜 갑자기?"

"아 그냥.... 좀...."

"줘 봐, 그 앨범."

"어?"

안 가져 간다면서 달라는 민채의 말에 하윤은 미간을 좁혔다. 앨범을 내밀자, 민채가 조용히 채간다. 앨범에 상처가 난 데는 없는지 살펴보더니 대답한다.

"이번에 블루데일리 입덕한 얘가 있어서, 걔 주려고."

하윤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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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이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성환이 자신이 가는 장소를 모두 알려고 할 때면 조금 귀찮기도 했지만, 학교가 끝난 후, 하교하는 길 중간의 한적한 골목길에서 진혁의 얼굴이 보일때면 무척이나 반가웠다.

진혁은 늘 그래왔듯 하윤을 만나면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하고는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강아지 대하듯 자신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고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꼭 안아주기도 했다. 그렇게 10 여 분간을 꼼지락 되며 퍼붓는 애정을 받노라면, 기분은 날아갈 듯이 좋았다.

이 두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똑같았다. 하윤은 가끔씩 제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모두 꿈과 착각은 아니었나 의심할 정도였다. 준은 여전히 제 여동생 별이의 험담을 했으며, 하윤에게 메론빵을, 성환에게는 초코우유를 사주었다. 성환은 늘 그랬 듯 수업 중 졸았던 하윤에게 필기노트를 보여주었고, 선생님들은 조곤조곤한 목소리의 인간 수면제가 되어 아이들을 재웠다.

원하던 평화로운 일상과 두근거리는 감정을 동시에 가진 하윤은 자신의 앞길이 모두 이렇게 아름다울 것이라 믿었다.

일이 터진 것은 2주 후였다.

하윤은 평소와 다름없이 하교했다. 성환은 몇번이고 다른 길로 새지 말고 곧장 집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강조하고는 검도 연습을 하기 위해 학교에 남았다. 하윤은 대답만 열심히 하고는 늘 진혁을 만났던 골목길을 두리번 거렸다.

이진혁 {하윤아 미안해.)

이진혁 {일이 있어서 오늘은 못가ㅠ) 오후 5:39

하지만 기다렸던 진혁의 문자는 실망스러웠다. 서운해진 하윤이 발걸음을 돌리던 즉시 큰 손이 하윤의 가늘한 팔뚝을 잡았다.

"어.....엇?"

하윤이 힘에 이끌려 비틀거리다 골목길 벽에 부딪혔다. 욱신 거리는 어깨를 부여쥐며 하윤은 상대방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으..... 누구?"

앞에 선 남자의 얼굴이 역광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 사람이 들고 있는 것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연기가 풀풀 나는 담배였다.

"어......."

남자는 담배로 가는 하윤의 시선을 느꼈는지 불 붙은 필터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신발 바닥으로 문질러 껐다.

"누구를 찾고 있던 모양인가 봐요?"

노을빛이 조금 들어오는 골목길 사이로 비릿하게 웃는 남자의 입가만 눈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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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3-06 17:06 | 조회 : 5,30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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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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