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위험할텐데, 오메가가 이런 밤에 혼자서 돌아다니는 건...."

우습게도 남자의 목소리는 전혀 하윤을 걱정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몸을 틀려고 하자, 하윤의 다리 사이로 제 다리를 끼워 하윤이 도망가는 것을 막았다. 은근슬쩍 치부를 건드리는 남자를 밀어내려 애쓰며 하윤은 거칠어지는 숨을 참았다.

"그...그만..."

"왜 이런 한적한 골목에 들어왔을까요?"

"좀 비키...."

"오메가라면 자기가 위험할 수 있다는 정도는 알텐데."

"오메가 아니야!"

남자의 지속되는 비꼬는 말투에 하윤은 열불을 내며 소리쳤다. 남자가 멈칫하는 것을 알고 하윤은 오히려 당당하게 행동하려 했다. 어깨를 조금이라도 피고 눈을 마주치려 노력한다. 그 애쓰는 모습이 돌아오는 것은 남자의 비웃음 뿐이다.

"그 얼굴로 오메가가 아니라니.... 풉흐흡..."

대체 제 얼굴이 어쨌다는 것인지 남자는 입을 가리고 웃더니 하윤의 귓가에 대고 후- 힌숨을 내쉬었다. 하윤은 간지러움에 몸서리를 쳤다.

"윽.... 무슨?"

하윤의 어깨에 따뜻한 입술을 묻은 남자의 숨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진한 향기가 하윤의 코끝을 툭툭 건드린다. 매우 위험하고도 비릿한 향기였다. 온몸을 알싸하게 건드리는 페로몬은 하윤을 거세게 휘감았다. 다행스럽게도 진혁의 것만큼 위력이 높은 페로몬은 아니었다.

남자는 하윤의 교복 윗 단추를 하나 하나 풀어내더니 드러난 흰 쇄골에 입을 맞춘다. 허나, 하윤의 반응을 살피는 그때,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는 하윤의 눈동자와 마주친다. 조금 동공은 흔들리고 있었지만, 제게 홀린 듯이 멍하고도 색스러운 눈은 아니었다.

"어? 너 베타였어?"

"아까 오메가 아니라고 분명히....."

"으음..."

남자는 뻘쭘한지, 하윤을 지탱하던 제 다리를 내렸다. 하윤이 기분이 나쁜지 남자의 살결이 닿았던 옷을 털어내자, 옆에서는 허탈한 웃음이 돌아온다.

"그 얼굴로 베타라니.... 신기하네."

"신경 꺼...."

남자가 자연스럽게 말을 놓자, 하윤도 제가 화가났음을 표현했다. 남자는 입이 삐죽 나온 채로 내동댕이 쳐졌던 가방을 집어드는 하윤을 보고 웃는다.

"솔직히 베타라도 나쁠 건 없는데, 페로몬 없어도 사람 홀리고 질질 흘리는 베타라면 말이지, 좀 우습다고."

"뭔 말을 그렇게...."

"너가 다른 알파 페로몬에 둘러 쌓여 있다는 건 알고 있어? 존나 웃기네. 알파가 이정도의 페로몬으로 감싸고 돌 정도의 베타라니 말이지."

"알....파?"

진혁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어제 저녁이었으니 진혁의 페로몬은 아닐 터였다. 설사 진혁의 페로몬이라고 해도 그것을 맡은 성환이가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었다. 곰곰히 생각에 잠긴 듯한 하윤의 허리를 남자가 잡아 끌었다.

남자의 손에 이끌리며 하윤은 멍하니 정신을 붙잡지 못했다. 진혁이 아니라면 제 주변의 알파는.... 성환이 뿐이었다.

'성환이가 대체 왜?....'

하윤의 깊은 생각은 입술에 부드러운 무엇인가 닿는 순간 깨졌다.

"으.... 으읍, 읍..."

순식간에 파고든 입술은 혀를 내밀어 하윤의 잇몸을 감싼다. 치열을 부드럽게 훑다가도 하윤의 혀를 찾으러 입안 곳곳을 요리조리 헤집어 놓는다. 하윤은 혼란스러운 머리에 이 남자로 인해 더 정신이 아찔해 지는 것 같았다. 진혁의 키스와는 달리 남자의 키스는 짙고 끈적하며 어두웠다. 달콤함이라곤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하윤은 정신을 겨우 붙잡고 몸을 밀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진혁이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을 구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끊임없이 생각했다. 성환이 나와서 자신을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리라 기도했다. 차라리 머릿속에 생각이라곤 없는 준이라도 괜찮았다.

하윤을 구해준 목소리는 의외의 것이었다.

"은규오빠?"

민채의 당황한 목소리가 한적한 골목길에 울렸다.

"은규오빠? 최은규 맞지?"

부들부들 떨리는 민채의 목소리에 하윤은 단번에 그가 누군지 알았다. 민채가 한동안 자랑하고 돌아다니던 알파 남친이다. 남자의 입술이 긴 타액을 이으며 하윤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대체 왜....."

민채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려 입술을 깨물다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다가왔다.

짜- 악

남자의 얼굴이 조금 돌아갔다. 민채의 손이 매운 것을 고려했을 때 내일 아침이면 그의 뺨은 퉁퉁 부어있을게 뻔했다.

"우리 오빠랑 그러면 좋아? 어? 이런 개새끼가.."

남자는 말이 없었다. 워낙에 어두워서 하윤은 남자의 얼굴 표정조차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오빠, 가자."

하윤은 이 순간 민채에게 눈물나게 고마웠다.

서둘러 하윤이 가방을 챙기는 도중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울린다.

"김민채, 너 존나 웃기네."

"뭐?"

"너가 어장관리하고 다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중딩 베타년이 질질 짜길래 고백 좀 받아줬더니 김주성, 차태균, 윤성환...."

하윤은 민채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 하윤은 성환이의 이름이 나왔을 때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참 많이도 있었어. 넌 진짜 멍청하게 내가 모를 줄만 알았어? 근데 너가 왜 그랬는지 이제야 알겠네. 베타 주제에 남자 홀리는, 지 오빠한테 열등감이라도 느꼈나 봐."

은규의 낮은 목소리에 하윤은 상황이 심각해지는 것을 느끼며 민채 앞을 막아섰다. 은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피우며 고개를 까딱 거리는 것을 보니 더 화를 내기 전에 가라는 말 같았다. 민채가 발걸음을 세게 하며 골목길에서 벗어났다. 하윤은 그 뒤를 따랐다.

집 앞에 도착할때 까지 민채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저, 민채야, 괜찮아?"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한 질문이었지만, 하윤은 민채의 눈빛을 보는 순간 제 질문을 후회했다. 하윤을 노려보는 민채의 눈은 매서웠으며 분노와 혐오감을 담고 있었다.

"아......"

"오빠는 진짜....."

"민채야....."

"재밌어? 이 상황이 아주 재미있지? 오빠는 왜 자꾸 민폐만 끼쳐? 우리 가족이 그렇게 우스워보여?"

하윤은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입을 꾹 닫았다. 얹혀사는 입장에서 하윤은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사실은 누구보다도 억울했는데도 입을 열지 못했다.

"내가 차이는 거 보니까 웃겨?"

"......."

"오빠는 아주 남자한테 안달났나 봐? 동생 남친도 뺏고 개너무하네."

"........"

"똑같아. 그년이랑."

"뭐?"

하윤의 말문이 터진 것은 그때였다.

"우리 가족한테 폐만 끼치고 고생시키는 건 그 지독한 여자랑 똑같잖아!"

하윤은 아찔한 기분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민채가 소리를 크게 냈는지 문이 덜컹 열리며 앞치마 바람의 이모가 달려온다.

"김민채! 너 그게 오빠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당장 사과 못해?"

이모는 크게 야단을 치고 하윤에게 일어나라며 손을 내밀었다. 하윤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모의 손을 내쳤다. 다리는 부들부들 떨려왔지만 가만히 있지는 못했다.

"하윤아?"

이모의 당황스런 말투가 뒤에서 들린다.

하윤은 냅다 달렸다. 횡단보도가 없는 길을 찾아 계단을 타고 보도블럭이든 비포장 길이든 내려밟으며 달렸다. 얼굴에는 눈물 콧물이 가득했다. 영문도 모른 채 민채의 한마디에 마음속에 눌러두었던 감정이 울컥하고 핏물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손등과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하윤은 주저앉았다.

곧이어 하윤의 마음을 대변하는지 옅은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하윤은 자신이 걷고 있는 장소가 어딘지도 모르고 발을 움직였다. 멀리 버스 정류장이 보이자, 하윤은 비를 피하기 위해 다시 달렸다.

하윤은 정류장 안에서, 들고있던 가방의 안을 살폈다. 얇은 지갑이 눈에 들어온다. 성환의 집에 가려면 자신의 집을 지나야 하므로 갈 수 없었다. 하윤은 성환의 집에 가는 대신 버스를 이용해 자신의 집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를 선택했다.

지갑을 열어보니 꼬깃한 만원짜리 두 장이 보였다. 그 사이로 무슨 종이가 툭 튀어나온다.

'힐마운틴 오피스텔'

진혁의 주소가 담긴 종이였다.

******************************************

우여곡절 끝에 진혁의 룸 앞까지 온 하윤은 빗물에 젖은 손을 젖은 옷에 닦았다. 의미없는 몸동작이었지만 하윤은 조심스럽게 벨을 눌렀다.

딩동

반응이 없다.

딩동

"진혁아?"

문을 열고 산뜻하게 자신을 마주해 줄 것만 같은 진혁이 없었다. 하윤은 몇번 문을 두드리다 지쳐 문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자, 잊고 있었던 진혁의 문자가 생각났다.

'일이 있어서 오늘은 못가'

진혁이 집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하윤은 눈물을 터뜨렸다. 그것 조차도 진혁의 이웃집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까봐 두려워하며 입을 막고 끅끅거린다.

입을 막은 손등 위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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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3-07 18:59 | 조회 : 4,066 목록
작가의 말
새벽네시

분량조절 실패....../ 다음편은 아마 과거편일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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