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월요일은 가족들을 배웅했다. 민채는 새로 산 와인색의 캐리어를 흔들며 얼굴 가득히 행복함을 드러냈다. 돌돌거리는 캐리어 끄는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하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빈 집에서 책을 읽고, TV를 보고, 이불 속에서 뒹구는 것은 평화로웠다. 하윤은 그날 저녁으로 요리를 도전해 볼까 하다가 포기하고 자장면을 시켰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텅 빈 집은 조금 추웠다.

화요일은 성환이 놀러왔다.

"또 나만한 친구 없지 않냐?"

성환의 자부심 가득한 표정에 의문을 품던 하윤에게 그는 비닐봉지 뭉치들을 흔들었다. 하나는 빌라와 가까운 치킨집 치킨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번에 상가 지점에서 새로 생겼다는 횟집의 초밥이었다.

"헐..... 네가 왠일이냐?"

치킨까지는 이해를 해도 성환이 아까운 알바비를 써가며 비싼 회를 사준 것은 노트에 적어두고 길이길이 세겨둘 정도의 일이었다.

하윤의 감격스러움에 성환은 초밥의 포장을 급히 뜯으며 입꼬리를 들어 싱긋 웃는다.

부글부글부글

회 특유의 비린내가 퍼지자, 하윤은 아랫배가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가슴도 답답하고 울렁거렸다. 회가 위로 넘어오길 기대하는 반응은 아닌 듯 했다.

"어? 너 괜찮아? 안색이...."

하윤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창백해진 것을 보며 성환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핏기 없는 입술은 바르르 떨리며 동시에 눈동자도 조금 흔들렸다.

"아 괜찮아. 괜찮아."

하윤이 젓가락을 들어 초밥을 입에 넣었지만 곧바로 다시 뱉었다. 부글거리며 끓던 속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역행하며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하윤?"

성환이 하윤의 안색을 다시 확인할 새도 없이 하윤은 입을 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침 점심을 걸러 아무것도 나오는 것은 없었지만 하윤은 변기통을 잡고 욱욱거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욱.... 우욱....읍...흐으..."

어느새 다가온 성환은 하윤의 등을 두드려주고 있었다. 운동할 때의 과격한 느낌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다정하고 깨질 듯이 조심하는 손길로. 하윤이 조금 진정된듯 하자, 성환은 조심스럽게 치킨과 초밥을 치웠다.

"너 속이 안 좋은 것 같으니까 죽 끓여줄게."

부엌으로 이동하는 진혁을 보며 하윤은 그래도 치킨은 먹고 싶다고 말할려다 참았다.

기다리는 동안 하윤은 TV를 틀었다. 요리만큼은 젬병인 자신과 달리 성환은 나름 소질이 있었다. 부엌에서는 간간히 채소를 다지는 소리가 들려올 뿐 조용했다. TV볼륨을 조금 높인 하윤이 시청한 것은 사고를 치는 개들을 유명한 훈련사가 훈련시키는 내용이었다.

조금뒤, 성환이 가져온 죽은 매우 따뜻했다. 손을 그릇에 대고 만지작거리던 하윤에게 성환이 숟가락을 쥐어준다. 몇 번 떠먹던 하윤이 아랫배가 따뜻해지는 느낌에 기분좋게 미소지었다. TV에서 들리는 강아지의 왕왕거리는 소리들이 점점 작아진다. 단단하고 넓은 성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잠이 쏟아졌다.

꿈 속에서 하윤은 강아지들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강아지들은 누워있는 하윤의 위로 폴짝 폴짝 뛰어다니다가 하윤이 상체를 세우니 물러난다. 강아지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자서 이런 꿈을 꾸는 구나 하고 하윤은 생각했다.

하윤이 완전히 일어난 후에도 강아지들은 서로 장난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가만히 쭈그려 않아 수십마리의 강아지들을 구경하던 하윤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아주 작고 하얀 새끼 강아지였다. 낑낑거리며 좀처럼 다른 강아지들 사이에 껴 놀지 못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하윤은 구석에서만 멤도는 흰 강아지에게 다가갔다. 털은 솜사탕보다 부드럽게 쓸렸다.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관리를 매우 잘했구나 하고 하윤은 생각했다.

"어?"

그때 하윤의 눈이 강아지의 눈과 마주쳤다. 애처롭게 쳐다보거나 손길에 기뻐하며 꼬리를 살랑거리는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자신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자신을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던 이모의 시선이 연상되었다.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던 그 작고 하얀 강아지는 분명 자신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윤은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강아지에게서 손길을 때었다.

하윤이 그렇게 꿈에서 깼다.

수요일에는 한동안 잊고 싶었던 사람이 방문했다.

"하윤아, 잠시 얘기 좀 하자."

진혁의 낮은 목소리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싫어. 그냥 가면 안돼? 다 끝난 일이잖아. 나 임신 안 했어. 안 했고, 했어도 바로 지웠을 거야."

"......."

진혁의 걱정어린 눈을 바라보기 싫어 하윤은 고개를 돌렸다. 진혁은 그런 하윤의 모습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임신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저렇게나 부정하고 내치는 모습이 걱정되었다. 마치 자신의 몸안에 새 생명이 들어앉는 것을 극적으로 두려워하며 거부하는 태도였다.

진혁은 원래 하윤에게 건네려고 했던 임신 테스트기를 조용히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하윤이 아기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려 드는 것도 마음에 안들었지만 하윤과 멀어지는 것은 그 이상으로 두려웠다. 매일 밤마다 아른거리는 하윤의 허상이 진혁의 무관심했던 마음을 한순간에 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대신 진혁이 하윤에게 건넨 건 작은 쪽지였다.

"언제든 와도 돼.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고."

진혁의 엄마같은 말을 한쪽 귀로 흘리며 하윤은 곱게 접힌 쪽지를 펼쳤다.

정갈히 쓰인 글씨체가 나타내는 것은 집주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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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3-03 22:48 | 조회 : 4,723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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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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