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하윤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켰다가 무언가를 확인했다가 다시 끈다. 리모컨을 사수하기 위해 싸우는 이모부와 사촌동생 민채가 신경쓰이지 않았다.

"하윤아, 과일 좀 먹을래?"

이모의 부드러운 말투에는 애정과 연민이 담겨있는 듯 했다. 하윤은 과일이 가득 담긴 유리그릇에 딸기 하나를 가져가며 생긋 웃었다.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이모의 표정은 어딘가 어두워보였다.

"줘 봐요."

이모가 이모부에게 손을 내밀자, 이모부는 마치 줄이 달린 인형마냥 이모의 손 위에 리모컨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이모는 리모컨을 하윤의 손에 쥐어주었다.

"둘만 진창 TV를 차지하려고 하니까 그렇지. 하윤아, 네가 보고싶은 체널로 틀어보렴."

이모가 걱정하는 것이 하윤은 못지 않아 기뻤지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하윤이 걱정하는 것은 현재, 하나였다. PC방을 돌아오며 건 전화를 받은 진혁이 다짜고짜 집 주소를 알려달라 말한 것이다. 하윤이 자신 혼자만의 집이 아니라 알려줄 수 없다고 답했지만 수화기 너머의 진혁은 묵묵부동이었다. 그 고집에 못 이겨 하윤은 자신이 사는 빌라의 주소를 적어 보냈다.

이진혁 {바로 집앞이야)

{할말이 있는데) 오후 7:22

진혁의 톡을 보자마자 하윤은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모, 저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응? 그래."

빠르게 갈아 신느라 실내 슬리퍼가 흩트려졌지만 하윤은 신경쓰지 않았다. 빌라 옆 골목에 장신의 체구가 보였다. 그 뒤에는 반들거리는 검은 자동차가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비싸보이는 차량이었다.

"이진혁?"

뒷머리를 긁는 모습이 무언가를 잘못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 하윤아, 할 말이 있어."

"그래. 해."

"일단, 세탁비는 챙겨줄게."

진혁이 지갑을 꺼내려는 것을 말리며 하윤은 고개를 저었다.

"할말은 그것 뿐이야?"

진혁은 하라는 말은 말고 골목 깊숙히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분명 심각한 일이 있을 거라고 하윤은 생각했다.

"내가 사실 그날 기억이 확실하게 나지는 않거든...."

"그날?"

"섹스한 날."

진혁의 돌직구에 하윤은 다시는 되묻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나 아마도 마지막에 했을때, 콘돔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아."

"뭐?"

"........"

"아니, 뭐?"

진혁의 눈이 약간은 흔들렸다. 하윤의 눈에 그건 장난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자신이 몸을 직접 씻긴 주제에 콘돔의 사용 유무를 확신이 없다는 듯 내뱉는 말투도 심히 당혹스러웠다.

"나도 그때 제정신이 아니였나봐..... 아닌가? 술을 마셔서, 그래서 그랬나? 원래는 늘 신경 썼는데."

진혁의 말은 갈피를 못잡은 채 우왕자왕한다. 하윤의 귀에는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데 혹시나 임신했을까봐....."

그제서야 하윤은 커피를 빼앗던 진혁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는지.

"됐어. 한 번 한다고 임신하는 건 아니야. 너도 알잖아. 알파랑 오메가는 베타 남녀보다 임신할 확률이 낮다고."

"............"

"난 그때 힛싸도 아니었으니까. 됐어."

하윤은 애써 기분이 나아진 표정을 지었다. 엄청나게 마주하기 두려운 사건이라고 생각했던 일은 사실 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 극우성 알파야. 충분히 가능해."

허. 하윤이 어이없게 실소했다.

"극우성알파가 흔한 줄 알아? 전세계에 있는 극우성 알파수는 열 명도 되지 않는다고. TV 안 봐? 몇달 전에 한국에 있는 유일한 극우성 알파가 늙어 죽었는데. 갔다 붙일거면 좀 제대로 된 변명을 만들던가 해."

하윤이 폭포처럼 말을 쏟아내며 짜증을 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에게 임신의 가능성이 주어졌다는 말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윤은 열불이 나는지 운동화 뒷꿈치로 바닥을 긁다가 잘가란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렸다.

"노팅했었어."

하윤의 돌아서는 발목을 잡은 것은 진혁의 손이 아닌 목소리였다.

"노.....팅?"

"응...... 넌 기억 안나겠지만. 미안해."

확실히 노팅을 했다면 임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윤은 복잡하게 뒤섞인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너...... 진짜 허락도 없이......"

하윤은 진혁이 극우성인 것은 아무래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노팅은 조금 무서웠다. 눈물방울을 보이는 하윤을 향해 뻗은 손은 거세게 밀쳐졌다. 나름 온 힘을 다해 내쳤지만, 진혁의 건장한 몸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하윤은 돌아섰고 진혁이 다시 붙잡기 전에 도망치 듯 대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진혁은 하윤이 들어간 대문을 보며 아랫입술을 지긋이 물었다. 입안이 쓰다.

※ 사실 임신중에도 하루에 커피 한두 잔 정도는 괜찮다고 합니다. 커피를 못 마시므로써 임산부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더 좋지 않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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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3-01 23:38 | 조회 : 5,615 목록
작가의 말
새벽네시

낼 개학이라 자주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ㅠㅠㅠ 일단 비축분은 있으니까 그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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