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내내 질질 끌고다니던 캐리어가 옮겨지는 것을 확인하며 하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행에 마지막 남은 하루를 아직 다 낫지 않은 몸으로 즐기느라 남은 힘이 없었다. 피로를 풀기 위한 수단이었던 온천은 열 두 명의 아이들 덕에 뜨끈한 워터파크가 됐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행히도 수건과 온천용 옷으로 꽁꽁 싸맨 덕에 진혁이 남긴 흔적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앉아."

성환이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윤은 비행기가 이륙하는 내내 성환의 어깨에 기대어 잤다. 기내식이 나오기 전까지 쪽잠을 청했던 하윤이 식사를 하기 전에 잠에서 깨기 위해 이어폰을 꼽았다.

요새 유명한 팝송을 속으로 흥얼거리는 하윤에게 성환은 자신의 한쪽 귀를 가리킨다. 하윤이 피식 웃으며 한쪽 이어폰을 건넸지만, 성환은 받지 않았다. 대신 이어폰이 빠진 하윤의 한 쪽 귀에 대고 속삭인다.

"걔가 어제 왜 그거 사준거야?"

"그거?"

하윤이 성환을 따라 목소리를 낮추자, 성환은 다시 중얼거렸다.

"일식 사줬잖아. 어제, 이진혁 그새끼가."

하윤은 그제서야 어제 맛나게 먹었던 초밥과 돈부리를 생각해냈다. 그날 밤 잔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려던 참이었다.

"이거 봐."

하윤이 폰을 내밀어 진혁과의 톡을 보여주자, 성환은 바로 인상을 찌푸린다. 자신의 실수를 보며 성환이 조소할 줄 알았던 하윤은 적잖게 당황했다.

"하트? 이진혁 하트?"

"아....."

하윤이 제빨리 휴대폰을 빼앗아 '진혁♡'를 '이진혁'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성환의 미간은 힘을 도통 풀지 않았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답답함을 참고 진정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10년동안 친구였지만 저런 표정은 쉽게 볼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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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집 앞 대문에 마중 나온 사람은 이모였다. 이모는 성환을 통해 하윤이 앓아누웠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걱정 가득한 기색으로 서 계셨다. 하윤이 콩콩 뛰고 요리조리 몸을 돌리자, 하윤이 다 나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이모가 웃음을 지었다.

ㅅㅎ {겜ㄱㄱ)

ㅅㅎ {1번지 pc방으로 오셈) 오전 10:17

종일 놀다 비행기 안에서 코를 곤 사실이 기억은 안나는지, 다른 얘들은 PC방에 이미 모인 듯 했다.

오전 10:17 (ㅇㅇ}

물론 하윤도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여! 하윤찡, 이제오냐?"

몇몇 아는 얼굴들의 오그라드는 말투에 하윤은 몸서리를 치며 성환의 옆자리에 앉았다. 성환 앞에는 빈 컵라면 컵이 놓여져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PC방으로 온 것이 분명하다.

"언제왔어?"

하윤이 묻자, 성환은 하던 게임도 중지시키고는 대답한다.

"아~까...."

앞에 놓인 컴퓨터가 일정한 소리를 내며 켜지는 것을 듣다가 하윤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푸르다고 느낄 정도로 짙은 색의 눈동자에 굵은 목선은 지난 밤 하윤이 팔 가득 껴안았던 것과 같았다. 그는 하윤과 대각선 되는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자신을 보고 웃은 것 같기도 했다.

"다른 학교 애들도 같이 모이기로 했어?"

하윤이 다시 질문했지만, 성환은 오래 집중하는지 답하지 않았다. 못 본척 컴퓨터 화면에만 집중하려 했지만, 컴퓨터는 렉이 걸린 듯 리부팅 하라는 창만 올려댔다. 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기 옆으로 갔다. 커피와 코코아를 따르는 기계에서 커피 한 컵을 얻어낸 하윤의 앞을 어떤 그림자가 막아선다.

"뭐야? 할말있어?"

자꾸만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하윤은 붉어지려는 귀를 가렸다. 말투도 퉁명스럽게 나간다.

"그냥...... 물 마시려고."

하윤은 알아서 하라는 듯 자리를 비켜주었지만, 진혁은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고 정수기 쪽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어색한 기운에 하윤은 커피를 홀짝이며, 주춤거렸다.

"뭐 마셔? 코코아?"

진혁의 질문은 뜬금없지만 조금은 웃겼다. 마치 자신도 같은 것을 마시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진혁의 시선이 코코아 기계로 옮겨가는 것을 보며 하윤은 고개를 저었다.

"커피인데."

상황이 돌변한 것은 그때였다. 하윤은 벙찐 눈으로 자신의 젖은 상의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진혁이 하윤이 들고있던 종이컵을 가로챈 것이었다. 종이컵이 흔들리며 반이 넘게 남은 다갈색 액체가 옷에 쏟아졌다. 뜨겁진 않고 조금 미지근했다. 하윤은 자신의 상의가 흰티가 아닌 것에 감사하며 돌변했던 진혁을 노려보았다.

"아니, 너 왜...... 갑자기."

"아, 미안."

저 멀리서 우당탕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선 성환은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진혁이 한 행동을 모두 본 것이다.

"미친새끼야! 왜 갑자기 그걸 뺏어!"

갑자기 높아진 언성에 주의가 이쪽으로 끌렸다. 자신과 하윤을 쳐다보는 수많은 눈동자에 진혁은 곤란하다는 듯이 하하 웃으며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 PC방을 뜨는 진혁을 노려보기보다, 성환은 하윤의 상태를 살폈다. 데인 것은 아니냐고 얇은 셔츠를 자꾸만 들추려하는 성환을 겨우 밀어내고 하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문을 나서기 전, 진혁이 보였던 행동이 하윤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진혁은 자신의 휴대폰을 가리키며 뭐라고 입모양을 우물거렸었다.

'전화하라는 건가?'

하윤은 다시 한번 자신의 젖은 셔츠를 내려다 보았다. 아까처럼 불쾌하지 않았다. 여전히 끈적거렸고, 증발하는지 따뜻함은 차가움으로 바뀌었지만, 이상하게도 심장만은 타오르는 듯 했다. 그와 잔 날 이후로는 그가 보이는 사소한 행동에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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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3-01 15:35 | 조회 : 5,440 목록
작가의 말
새벽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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