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리엔이란 이름

내가 바다에 있는 것도. 알몸으로 물속에 있는 것도. 왜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빌어먹을, 그 샴푸만 넉넉히 있었어도!



"... 샴푸 사야겠네. 내가 쓰던게 리엔이었던가?"



아니지. 지금 해변가 바다에서 몸을 담근채로 샴푸 사야겠다는 것도 웃기다. 그나저나 진짜 어쩌지. 계속 바다에 있어야하나?


슬슬 몸이 떨려온다. 물에 젖은 채로 몸에 붙어 살짝 마른 머리칼에선 바다의 특유 비릿한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응? 너 거기서 뭐하냐. 설마 바닷가에서 알몸으로 목욕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왠 우람한 근육질 덩치의 할아버지가 해변가에 쭈그리고 앉아 코를 파며 무심히 묻는다.


거기다 왠 개 모자를 쓰고있다.


어, 저러니까 꼭 거프...루피 할아버지 닮았다. 이게 민지한테 말로만 듣던 코스프레인가? 전혀 안닮아서 너무 기대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완전 판박이다.



"저, 저기요. 제가 옷이 없는데...혹시 가릴 천이나 여분 옷...같은 거..없어요?"



코를 파던 거프(?)가 무심히 말한다.



"하? 그냥 나와. 어차피 꼬맹이라 볼-"



다음 순간 이어질 말에 빽 소리를 질렀다.



"시, 싫어요---!"




* * *




결국 모포를 가져온 할아버지. 나는 바다에서 모포를 둘둘둘둘 만채 바다에서 나왔다.



"..겨우 가져온 모포가 바닷물에 다 젖었잖냐. 마른 모포로 젖은 몸을 감싸란 거였는데, 젖은 몸에 젖은 모포를 감는건 대체 뭔 짓이냐."



살짝 걱정이 담긴 목소리.



"... 모포는 감사해요."



난 반쯤 삐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할아버지. 여기 서울, 맞죠? 근데 코스프레가 이렇게 똑같은 줄은 몰랐는데. 개모자 좀 벗어봐요, 진짜 거프같아서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네."



내 말에 할아버지는 무슨 말이냐는 눈빛으로 답한다. 꼭 내가 진짜 이상한 애라는 눈빛으로.



"여기가 어디냐니... 여긴 이스트 블루의 코보로 산이다. 그리고 '거프같네.'가 아니라 진짜 몽키 .D. 거프다."


"...... 네.. 예?!"



상황극인 것 같은데 되게 진지하게 본인이 거프라고 하시네. 물론 완벽하게 거프같긴 한데...



"할아버지..."


"뭐냐, 그 불쌍한 강아지 보는 듯한 표정은? 지금 네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정신이라도 나간 건 아니겠지. 아무튼 너 집은 어디냐. 이래봬도 해군이니까 집까지 데려다주마. 이 근방은 무서운 산적들이 우글거린다고?"


"할아버지, 저 그런 거짓말에 속을 정도로 어리진 않거든요? 어차피 조금만 걸으면 금방 버스 정류장 같은 거라도..."


불신어린 눈으로 그를 보며 주위를 크게 둘러봤다. 여기가 아무리 바다라 한들, 땅이 있는 쪽으로 조금만 걷다보면...


아, 맙소사...여기 진짜 어디야.....진짜... 서울 맞는거지? 거짓말. 진짜로? 그러고 보니 주위 배경도 원피스랑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잠만 왜 하필이면 샤워하다 오는건데... 좀, 밥도 먹고 샤워도 끝내고, 만화도 좀 다시보다가 옷도 쫙 빼입고. 그러고 차원이동 하면 안됐냐고...응?


그래도 다행인 건..대화가 가능하다. 영어나 일본어 일줄 알았는데..



"한국어가 가능하네요..?"


"응? 한국어? 그건 무슨 언어냐."



정정해야겠다. 한국어는 아닌가보다. 한국어가 가능하다기보단 그냥 대화가 가능한가 보다. 그럼 한글을 쓰면 읽혀지려나? 뭐... 그건 나중에 실험해보고...


그래도 어쩐지 약간의 위화감은 있지만 크진 않아서 금방 익숙해 질 것 같다.



지금 나는 거프를 따라가고 있다. 맨 발인데..신발도 좀 주지...



"근데..지금 어디가는 거예요?"



딱히 호칭을 정하지 못해서 그냥 호칭을 빼고 묻는다. 거프는 씨익 웃으며 대답한다.



"다단에게로 간다. 뭐, 애 한 명 느는 것 쯤이야. 크게 달라질 건 없으니까 말이다."



아니, 그건 아닌 좀 아닌 것 같은데요...사람 한 명 사는게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에요.


...근데 다단이 누구였드라? 이렇게 된 이상 다시 원피스 내용을 정리 해 둘 필요가 있겠어...



* * *



옷이 없어서 마을에서 대충 윗 옷과 바지를 사 입었다. 문제는 좀 꼬질꼬질한게 절대 새옷 같지는 않다는 거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코보로 산, 다단의 오두막집.



"거프...아니, 거프씨 좀 봐달라고요! 아까 갓난아기를 데려오더니, 이번엔 채 몇 시간도 안 되어서 이런 계집애를 데려오다니요!"



그 말에 변명하는 거프.



"아아, 이 녀석은 다 큰 녀석이라서 그다지 손은 안 갈거야. 먹을 것. 잘 것. 이 두가지면 충분하다고?"



아니, 그렇게 안 간단하다니까. 씻을 곳은? 입을 것은! 나 지금 당장 씻고싶은데... 아직도 몸에서 짠내가 나는 것 같아.



"거프, 아니, 거프씨!"


"아님 그냥 감옥 가든가."


"예에에?!"



코를 파면서 무심히 말하는 거프에, 어이없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다단일가.



그렇게 거프의 억지로 다단 일가의 오두막집에서 살게 되었다. 못마땅한 다단의 눈초리는 덤이다.


그런데 시간 흐름이 참... 아무래도, 너무 일찍 이곳에 오게 되버렸다. 에이스가 아직 아기라니. 그것도, 마침 오늘 거프가 에이스를 맡기는 날이었다. 어쩌면 하루만 일찍오거나 하루만 늦게왔더라도 거프를 만나지 못했을거다.


에이스가 아기... 좋아하던 캐릭터가, 멋있다고 생각하던 캐릭터가 아기... 이 세계에 엄청 따지고 싶지만, 지금 내 상황이 엄청나서 따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샤워하고 있는데 바닷속인 것도 모자라 세계가 바뀌고, 지금 내 앞에선 만화 속 두 인물이 투닥거리고 있다. 그리고 저 다단이 날 받아주지 않으면 당장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이게 뭐야. 이게 다 뭐냐고.


뭔가 세상 허무해져 나는 투닥거리는 둘을 뒤로하고 오두막집으로 들어갔다.



"...요람."



산적들은 없다. 산적질 하러 나갔나? 아무튼 요람 안에는 에이스가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사실 말도 안되는 이 상황이 와닿지는 않는다. 책 속이라니 너무 현실감이 없는걸. 하지만,


아직도 머리에 남는다.


살아도, 태어나도 되었었냐는 책 속의 에이스의 말. 에이스가 받은 온갖 욕과 멸시.


물론 그 대상은 로저였지만... 적어도 이곳 세계에선 아버지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최악의 범죄자라는 말은 유전자를 받고 테어난 아들인 에이스에게도 적용되는 말일테니까.


게다가 분노, 슬픔. 잠깐의 행복과 다시 찾아오는 죽음. 슬프다. 골드.D.로저. 해적왕의 아들이라는 이름아래 살아온 삶.


기억에 남고, 가슴 속에 묻어둔 말. 그도, 나도 무겁다. 짊어진 삶이란 것이.


해적왕. 그의 아들. 세상에 태어나 세상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자란 에이스...그럼에도 에이스는 세상 모르고 잔다.


차라리 세상을 몰랐더라면. 철이 들기 전까지 만이라도. 지켜주거나 보호해주지 못하더라도, 당당하게 편이 되어준다면.



"에이스. 네가 태어나 정말 다행이야. 세상이 널 원하지 않더라도 난 네 편이 되어, 너의 옆에서...지켜줄게."



* * *



다시 밖으로 나온다. 다행히도 거프는 아직 가지 않았다. 부탁할게 있으니까.



"거프. 나 부탁할게 있어요."



꽝.



"아야-!"



거프는 내 머리보다 큰 주먹으로 내 머리를 때렸다. 잠깐만. 내 머린 에이스나 루피와 달리 평범한 머리라고?



"왜..?"


"아저씨라고 불러라. 어린녀석이 쯧!"



아, 만화책을 보면서 거프,거프 하던게 익숙해져서 거프라고 생각하고 나니 무심코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 보니 거프의 머리의 반은 아직 새까맣다. 하지만 곧 손자가 생길 나이 아니던가?



"거프 할아버지. 나..저. 부탁이 있는데요."


"왜 아저씨에서 할아버지로 건너뛴거냐!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뭐, 됐다. 그 부탁이 뭔지 일단은 들어나 보자."



으음... 보통은 이런 경우, 제자나 무리에 들어가 공손한 자세로 부탁하지? 하지만... 그를 따라 해군에 들어가기에는 또 곤란하다. 너무 날로 먹으려는 심보 같지만, 그래도...



"패기 배우고 싶어요. 너무 뻔뻔해보이지만, 어떻게 해야되는지만 좀 알려줘요. 깨우치는 방법. 터득하는 방법. 갈고 닦는 방법. 당장 할아버지 밑에서 수련하는건 내가 해군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무리니까, 방법만 알려주세요. 적어도 이론만이라도.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해 볼께요."



거프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풀린다. 그 살인꿀밤과 함께.



꽝!



"아야--!"


"도대체 패기라는 말은 또 어디서 주워들은거냐. 꼬맹이 입에서 나올만한 단어가 아닌데."



거프는 잠시 수상하다 느꼈지만 꼬맹이라 만만해 보였는지 금방 긴장을 풀었다.



"꼬맹이 아니거든요. 엄연히 이름이 있는데."



나름 소리치듯 얘기했지만 목소리 자체가 조용한 분위기다 보니 별로 소리친 것 같지도 않다.



"이름? 안알려줬잖냐. 그럼 말해보든가. 이름."



거프가 놀리듯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거프의 물음에 잠시 멈칫했다. 여기선 별로 그 이름 쓰고싶지 않은데. 윤신이. 뭔가 안 어울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이름을 들으면, 계속 집을 떠올릴 것 같다.



"있긴 있는데..별로 쓰고싶지는 않네요...지어주실래요?"



아무생각없이 물었다.



"이름말이냐? 이름이라......어, 음.....그래. 리엔은 어떠냐?"



뭐야, 이름을 3초만에 지었어? 그리고 왠지 친숙한 느낌인데?



"그거!"


"어떠냐 새 이름이?"


"자,잠만. 그거...!"


"그래, 아까 네가 바다에서 중얼거리던 한마디. 마음에 드냐?"



아니, 마음에 드시고 자시고 그거,



'우리집 샴푸 이름인데...!'



도대체 그 조그맣게 중얼거린 걸 어떻게 들은거지?



"아하하하하핫, 어떠냐! 내 작명 센스가!"


"좋네요."



구려.

3
이번 화 신고 2018-01-30 23:55 | 조회 : 1,533 목록
작가의 말
나른한 고양이

오타지적 환영ㅇㅅ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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