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화 이야기의 시작

달깍.



화장실 걸쇠를 조용히 걸었다.
혹시 또 몰라서 문을 살짝 밀어보았다.


됐다. 움직이지 않는다.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한 후, 주머니에서 성적표를 꺼낸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성적표를 확인한다.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조금씩.
한 문제가 불안했던 국어부터.


100점. 다시보고 또 다시봐도 틀림없는 100점이다. 조금 진정이 된다. 그 다음부터는 볼 것도 없다.


국어 100.
수학 100.
과학 100.
영어 100.
사회 97.




...97?...어...? 거짓말. 채점이 잘못 된 걸까.


아니. 채점은 틀리지 않았다....내가 틀렸다. 실수한 것 같다..실수도 내 실력인데. 집중을 제대로 못 한 내 탓이다.


천장을 바라본다. 머리가 핑 돈다.


밖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좀 더 집중을 해서 들어본다....내 얘기인가?



"너 아까, 윤신이 그 년 얼굴 봤냐?"


"어우, 말도 마. 재수없어."


"지가 일등이면 일등이지 표정이 왜 그 모양이냐?!"


"하여튼 공부 잘 하는 족속들은 다 죽어야돼."



내 얘기다.... 하지만 다시 웅얼거림으로 바뀐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97점, 틀린 문제만 맴돌고 있다....엄마한테 뭐라 얘기하지?...실수?


그러다가 아까 애들이 말한 것들을 속으로 반박해보고 반대로도 말해본다.



'..이걸 받으려고 내가 얼마나 죽을 힘을 다했는지 알기나해? 시험기간, 하루에 두 세시간 밖에 못 자면서, 코피를 쏟으며 공부했어. 죽는 것 만큼 힘들게 공부하는 것이 어떤것인지도 모르면서. 노력조차 제대로 안해본 너희들이 그런 말 할 자격도 없어.'



"하여간 노력도 안 해보고 욕만해대는 족속들은 다 죽어야돼."



똑같이도 말해본다. 하지만 점수 때문에 마음은 더 무겁게 내려앉는다.


가슴이 답답하다. 숨이 막힌다. 목 언저리가 근질거린다.



달깍.



애들이 가자마자 화장실을 나온다. 거울을 보니, 아무감정도 안 보이는 무표정의 내가 있다.


꼴이 꼭 죽은 시체 표정이다. 시체표정...억지로라도 웃는 표정을 지었다. 우는 표정도 지어보고, 화난 표정도 지어본다.



얼굴근육이 아프다.


어색하다. 뭔가 위화감이 든다. 마치..내 표정이 아닌 표정을 짓는 기분...뭐랄까...안.......그래, 안 어울려.



집으로 가면서 가만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자유라고는 없었다. 아니,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을 보고 들으면서. 내 쥐톨만한 자유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내 일과표는 모두 엄마가 짰고, 그 일과표대로 움직였다..대학. 엄마의 목표이자, 딱히 뚜렸한 목표가 없던 나의 목표이기도 했으니까. 하고싶은 것. 잘 하는건 따로 없었다. 그저 공부뿐.


공부를 잘해 놓으면 꿈이나 하고싶은 건 나중에 정해도 쉽게 이룰 수 있다는 엄마의 말 때문이었다.


엄마는 내 성적 때문에, 친구를 사귀는 건 나중에 대학가서 사귀라고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딱히.. 틀린 얘기도 아니었고, 듣다보면 맞기도 했다.



"...그런데 친구가 생겨버렸지."


엄마는 못마땅해했다. 엄마는 다른 사람들이 놀 때, 똑같이 놀면 다른사람들을 앞서갈 수 없다는 것이 엄마 생각이었다. 덕분에 토ㆍ일에도 몇시간씩 특별 과외를 받아야만 했다.


내 친구, 민지. 그 아인 정말 밝았다. 그 아이가 웃고 있으면 나와달리 정말 반짝여서 홀린 듯 쳐다본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민지는 나에게 유일한 친구이지만, 그 아이에게는 많은 친구가 있다. 때문에 가끔 소외감이들기도 하지만 아예 없었던 때보다 훨씬 위안이 되었다.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때에도 먼저 말을 걸어주고 웃어주었다.


민지는 내가 너무 우울해보인다며 빌려준 책은 만화책이었다. 원피스 전 권을 통째로 빌려주면서 꼭 읽으라고 당부했다. 꿈과 희망을 가져보라고.


덕분에 끙끙거리면서 들고가야만 했다. 그리고 통째로 벽장에 넣어두었고, 한 권씩 한 권씩 쉴때마다 몰래몰래 읽었다.


처음엔 그저 민지가 날 특별히 신경써준다는 것이 기뻤다. 그래서 사실 어린애들이나 읽는 만화책 따윈 그냥 처박아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읽게 된 한 권.


지금은 읽을 때마다 너무 재미있어서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외우다시피했고 바꾸고 싶은 부분들을 종이에 써가면서 분석했다. 내 인생에 제대로 끝까지 읽은 첫 만화책이었다.





...그리고 지금. 시험을 치르고 집에 온 나는 큰 위기를 겪고있다. 들켰다.


집안의 공기는 탁했다.


늦게, 몰래 들어갔지만. 불쑥 눈 앞에 생긴 엄마 덕에 숨이 멎을 뻔 했다.


짝-


"...허억...!"



다음순간. 눈앞이 번쩍함과 동시에 볼이 후끈거렸다.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일어나."



차가운 목소리.


비척비척 일어나, 겨우겨우 한마디 내뱉는다.



"...잘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엄마는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 한다.



"변명 따윈 듣지 않겠어. 친구 얘기도 그냥 넘어가. 내가 분명히 나중에 사귀라고 했는데, 멋대로 사귀고, 멋대로 물들고선...만화책은 뭐야. 이런건 또 어디서 굴러들어온거야. 너 이거 다 읽은거야, 설마?!"


"...안 읽었어요."



거짓말이다. 남김 없이 다 읽었다.



"거짓말하지마. 눈에 다 보여. 점수는 또 왜 이 따위인데. 명문 학교도 아니고, 이런 꼴통학교에서. 어떻게 이 점수를 맞을 수가 있어! 내가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데!"


"......"



아무말도 할 게 없었다. 거짓말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왜이렇게 답답할까.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안되겠어. 여기 더 있다가는 공부는 커녕, 날라리가 되는 건 시간문제겠어. 너 다음달에 여기 다 정리하고 미국 유학 가. 다 널 위해서 보내는 거니까 공부만 생각하고 가."



답답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국 안 간다고 했잖아요."



엄마도 물러서지 않는다. 난 엄마를 이길 수가 없다. 한 번도 없었고 너무나도 절대적이었다. 아빠도 이길만큼. 언제나 틀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너한테 선택권은 없어. 그 따위로 하고 다니는데,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하는데?!"



엄마는 만화책 한권을 찢어 집어던졌다.


친구가 빌려준 만화책....난 멍하니 바라만보았다.



손 끝부터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떨림은 팔에서부터 심장으로,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으로 엄마에게 대들었다.



"여기서 살거예요, 안 갈거예요. 여기서 살거라고요, 여기서!"



엄마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 우리나라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학벌이 안 좋으면, 일류대를 나오지 못 하면 대접받을 수 없어. 행복할 수 없다고."


"그럼 엄마는 서울대 나왔으니까, 행복해요?"



엄마의 눈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엄마가 행복하게 웃던 얼굴은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언제쯤부터일까. 매일 일에서 늦게 들어왔고 피곤 한 빛이 역력했고 쉬는 날에도 매일 잠만잤다. 아빠와는 말 할것도 없이 거의 매일 싸우다시피 했다.



"아, 아무튼 너 다음달에 비행기표 예약해둘테니 그리 알고 다 정리해놔."



다시 부들부들 떨린다. 이젠 무서운건지 흥분인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엄마 소유물이야? 물건이야? 엄마가 뭔데, 내 인생을 맘대로 해?! 도대체 뭔데?!"


"뭐?! 이게 정말!"



엄마는 또 내려칠 듯이 손을 올렸다. 나는 엄마에게 얼굴을 들이 밀며 마구 악을 써댔다.



"때려봐. 아니, 차라리 죽이지그래!? 차라리 죽는게 편하겠어. 비행기? 미국? 그래, 어디 한 번 보내봐. 그 대신 날 죽여서 비행기에 실어보내. 내 발로는 절대 안 걸어갈테니까. 그 정도 쯤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할 거 아냐?!"



이게 아닌데...하지만 그동안 참은 것이 한 번에 터지듯 걷잡을 수 없이 말들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물건을 부쉈고, 처음으로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에 묘한 희열과 쾌감을 느꼈다.



한바탕 난동을 부리고, 만화책들을 통째로 들어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엄마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가 들어가기 전까지 넋이 나가있었다.



절대 안 나가 이 방에서. 나는 방에서 만화책을 살폈다. 찢어진 만화책...


아,어쩌지...민지한테 뭐라 말하면 좋을까...이걸 어떻게 보여줘. 어떻게 돌려줘...어떡하냐고...


나는 내 침대에 누워 내 방을 둘러봤다. 텅 빈방. 학교의 책상만한 조그마한 책상과 미니 스탠드. 문제집. 침대. 벽장. 그 외에는 공부에 방해된다며 깨끗이 치워놓았다.


내 방이지만 빈 공간의 적막함이 날 짓누르는 것 같았다.



* * *



"윤신이! 빨리 문 열어! 아님 열쇠...열쇠공 불러서 문 딸거니까..!"



열쇠는 엄마가 잠들었을 때 방으로 미리 가져왔다. 짤랑. 열쇠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난다.



"셋..! 둘..!.....하나."



벌컥.



직접 열었다. 그리고 다시 어제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대들고 당황하고. 그러자 엄마는 점점 대화를 하자는 식으로 바뀌어갔다.


난 바뀌지 않았다. 학교도 빠졌다. 이제 될 대로 되라지. 민지를 볼 면목도 없다.


새로 사 놓은 문제집은 엄마가 일을 나갔을때, 한 장 한 장 찢어서 엄마 방문 앞에 흐뜨려 놓았다. 덕분에 또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지만..


밥 조차도 역시 엄마가 일을 나갔을 때 몰래몰래 꺼내먹었다.


샤워 역시. 엄마가 없는 아침에 비척비척 일어나 욕실로간다.


씻는 것도 귀찮다. 물을 먼저 뿌리고, 샴푸... 는 생략하고 그대로 선 채 위에서 내리뿌리는 샤워기의 물을 얼굴과 온 몸으로 받아낸다.


물이 감은 눈과 입, 코로 들어온다. 숨이 막히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쯔음, 샴푸를 눌렀다.


샴푸가 없다. 아무리 펌프질을 해도 거품 밖에 나오질 않는다. 점점 짜증이 치민다.


온 몸이 젖은 상태로 이게 뭔 짓인가 싶다.



"샴푸가 없어. 샤,샴푸 어딨어?!"



얼굴로 떨어지는 물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잠깐 어질한다.


그리고 다리가 물에 잠긴다.


내가 물을 안 껐나 보다.



"어? 어라? 물이 넘쳤나?"



나는 수도 꼭지를 잠그기 위해 더듬 거려보지만 잡히는게 없다.



'잠깐만. 애초에 물 같은 거 받은 적도 없어. 그럼 욕조 배수관이 막힌 건가?'



가만 보니, 발 밑도 까칠까칠하다.



"뭐야, 누가 욕실에 모래를 집어 넣어놨어!"



눈을 살짝뜬다. 바람이 불어오고, 끼룩거리는 갈매기 소리. 그리고 바닷물 특유의 짠내....바다다.



"바다...바다?! .... 말도 안 돼.. 거짓말. 잠깐만 나... 헉....?!"



알몸이다. 당황스러워서 어떻게든 가려보려고 손을 휘적휘적 해보지만, 가릴 수 없다. 머리를 살짝 넘긴다.


물이 자꾸 눈에들어와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여기 어디야? 뭐야? 왜 바다가 보여? 내가 시험공부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긴 했는데. 보통... 위험하단 느낌이 오긴 할 때도 있긴했지... 근데..이거 너무 선명하잖아."



알몸인 탓에 바닷물에 몸을 완전히 담그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꿈으로 치부하려 했지만.



'꿈을 자각하는거 자체가 나한텐 무리인데...?'



"여긴 어디야!"



맨 몸으로 바다에서 외쳐봤자 돌아오는 건 갈매기 소리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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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1-29 15:51 | 조회 : 1,765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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