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티치, 이거 얼마나 남은거야?"

책상 위에 쌓여진 서류를 툭 건드리며 물었다. 하얀 페인트가 아직 냄새를 풍기며 얼마전에 새롭게 칠을 했음을 알렸다. 방에는 간단한 사무집기뿐이였다. 에어컨을 일찍부터 작동시킨 덕에 방은 시원했다.

"물어보지마. 하하하 그냥 하는게 좋을거야."

"하..절망적이군."

일반 평사원일때와 지금은 해야할 일의 양과 수준이 달랐다. 나는 무리를 해서라도 빠르게 일을 배우고 싶었다. 덕분에 오랫동안 일을 한 티치가 옆에서 도움을 주느라 함께 고생이었다.

"벌써 1시가 넘었네. 티치 넌 가서 밥 먹고 와."

"에이스 넌 오늘도 굶는거야?"

"하, 지금 한가하게 식당가서 밥 먹을 시간이 없어. 난 괜찮으니까 가서 밥 먹고 와. 올때 먹을 거라도 사오면 좋고."

"하하하 알았어. 금방 밥만 먹고 올테니까 혹시 먹고 싶은거라도 생기면 연락해."

티치가 나가고 에어컨 소리만 요란하게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느릿하게 지나갔다.

"정신차리고 일하자!"

그때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들어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마르코!"

열린 문 틈으로 마르코가 비닐봉지를 들고 서있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기뻤다.

"들어간다?"

"이미 들어와놓고."

"그렇네. 밥은 먹고 하는거야?"

"아니. 아직이야."

"이거 먹고 해. 너 좋아하는 갈비찜 포장해왔어. 근데 둘데가 없네? 나보다 더 바쁜것 같아."

서둘러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널려있던 종이를 정리해 한쪽으로 몰아놓고 마르코가 가져온 봉지를 펼쳤다.

"어서 배워야 제대로 일하지. 마르코는 먹고 왔어? 안 먹었으면 같이 먹어."

"그래. 어서 먹자."

'이렇게 얼굴 마주보며 밥을 먹는게 얼마만이더라.'

한동안 바빠서 집에 가면 바로 잠들기 일쑤였기에 대화도 제대로 못 한지 오래였다. 마르코도 같은 생각인지 밥은 먹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있었다.

"그렇게 보지마.. 밥도 못 먹겠어."

"오랜만이니까 잔뜩 봐둬야되는데 밥을 못 먹음 안되고 어쩌지."

말투는 걱정하는듯한데 눈은 웃고있었다.

"신경쓰지말고 먹어. 오늘은 퇴근 언제해?"

"아마 밤에..?"

"내가 도와줄까?"

"마르코가?"

"응. 어차피 회사 내부 사정이랑 사업현황같은 자료도 보고있을거아니야. 그런건 내가 가장 잘 알고있으니까 도움이 될거야."

"그렇긴해. 마르코가 도와주면 빨리 할 수 있을거야. 피곤할텐데 괜찮아?"

"상관없어. 그럼 난 퇴근하고 다시 올테니까 밥 남기지말고 다 먹고 일해."

마르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번 웃고는 방을 나섰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짧은 순간 아쉬움이 들었다.

'뭐에 대한 아쉬움이지..? 나, 뭘 기대했던 거야..'

얼굴로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이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읽는 것에 시간은 잘 흘렀다. 마르코가 나가고 얼마지나지않아 티치가 도넛을 들고 돌아왔고 다시 시간이 흘러 퇴근시간인 6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티치, 작년 4분기 실적이랑 재무제표 자료 좀 찾아줘. 아, 그리고 오늘은 그것만 주고 퇴근 해."

"나 없이 혼자 이걸 본다고? 힘들걸?"

"하하하 괜찮아. 너도 쉬는 날은 있어야 할거아니야. 걱정 안 해도 돼."

"흠음~ 알았어. 오늘은 덕분에 빨래 좀 할 수 있겠네. 며칠째 같은 옷만 입고 있어서 얼마나 찝찝한지."

"뭐? 하하하 어서들어가서 너도 좀 씻고 빨래도 해."

"그래. 혹시라도 필요한거 생기면 바로 부르고."

"알았어. 걱정말고 들어가."

티치가 방을 나선게 6시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마르코는 바로 온다더니 언제 오려나.'

손에는 서류가 들려있고 눈은 그것을 보고있었지만 생각은 전혀 다른 것을 하고있었다.

'먹을거 사오려나? 먼저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다보니 마르코 정장입은 모습도 간만이었지. 여전히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오랜만에 둘이 있는건데 또 이상한짓하는건 아니겠지?... 그래도 손 정도는..'

마르코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을때 그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 에이스? 뭘 그렇게 집중해서 보는거야?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답이 없길래 없나했잖아."

"아, 아! 왔어? 퇴근하고 바로 오는줄 알았는데 늦었네?"

"응. 너 또 밥 안 먹고 할까봐 밥 사왔지."

"이번에는 뭔데?"

마르코가 등뒤에서 부스럭거리며 내놓은 것은 초밥이었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거.. 배달도 안 되는거잖아. 비오는데 가서 사왔어?"

"막 내리기 시작할때여서 괜찮아. 자, 일단 먹고 하자."

자리에 앉은 그의 노란 머리와 어깨가 살짝 젖어있는게 보였다.

'비오는줄 알면 가지말지. 아니면 우산이라도 챙겨가든가. 왜 비는 맞고 다녀.'

"... 고마워."

"설마 이걸로 감동한거야?"

"아니. 뭐. 이것 저것.. 감기 들겠다. 있어봐 수건 줄게."

"감기 걸리는것도 꽤 괜찮던데. 한번 더 걸려볼까?"

사무실 한구석에 놓여진 서랍 안에서 흰 수건 한장을 꺼내 마르코에게 건냈다. 그러나 그는 멀뚱히 수건을 들고있는 나의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왜?"

"닦아줘."

"뭐?"

"닦아줘."

마르코가 수건이 들린 손에 젖은 머리를 가져다댔다.

"정말.. 가끔 애같다니까."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닦을 동안 그는 사람의 손길을 즐기는 고양이마냥 나른하고 기분좋아보였다.

"자, 다 됐어."

머리카락을 닦던 수건을 치우자 감겨있던 눈이 떠지며 나를 바라봤다. 느리게 깜빡거리는 눈꺼풀이, 가까워진 거리가, 그 사이를 채우는 더운 공기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일하자."

"어? 어.."

"뭘 기대한거야?"

"아니, 기대하긴 뭘. 일, 일하자."

이런 분위기면 언제나 먼저 손을 뻗었던 마르코였기에 무심코 무언가 기대했던것 같았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듯했다. 마르코가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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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6-12 00:35 | 조회 : 1,249 목록
작가의 말
하루, 날

초밥이 먹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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