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1995년 06월 11일(25) 충격



“어째서…….”
“사지가 없는 동료는 필요 없잖아? 그러니까 그냥 리니에게 먹이로 준 거야. 그냥 가만히 두면 죽고, 죽으면 썩어서 냄새가 나거든. 그러니 빨리 처리할까 해서.”
“…….”
“이로서 공연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관객 여러분, 공연은 즐기셨는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커튼콜이나 앙코르에는 응하지 못할 것 같네요. 왜냐하면…… 하나밖에 없는 배우가 죽어버렸거든요! 하하하하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소년은 가상의 관객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였다.


“봤지? 인간은 결국 이런 생물이야.”


가소롭다는 듯이 레테를 내려다보며 소년이 말했다.


“자신이 위험하다 싶으면 낳아준 부모건 연을 맺은 동료건 죄다 내던져버린다고, 인간이라는 족속은. 정말 추악하기 그지없지.”


리아가 눈앞에서 죽었다. 레테에게 애원하면서 죽어갔다. 엑시스를 부정하는 식의 리아의 말을 레테는 이해할 수 있었다. 고통이란 것은 생명체에게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보다 더욱 레테를 화나게 하는 것은 소년의 생각이었다. 그는 인간의 생명을 장난감처럼 여기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 말려들어간 리아는 게임의 제물이 되어 사지가 모두 잘리고, 끝내는 몸까지 먹혀 죽었다.


레테의 손에는 리아의 얼굴이 들려있었다. 감긴 리아의 눈 밑에는 가늘게 한 줄기 뺨을 타고 내려가는 눈물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리아는 살아있었다. 살아 있었기에 극심한 고통에 눈물을 흘린 것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분노에 몸을 주체할 수 없었던 레테는 리아의 머리를 유리 세공물을 다루듯이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고개를 든 레테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레테는 그곳으로 다가가 검을 들어 보았다. 자세히 살펴볼 필요도 없이 손의 감촉만으로도 누구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리아의 검이다.


“크읏, 으으아아아아!”


레테는 그 검을 빼들고 소년에게로 달려갔다. 분노에 몸을 맡긴 레테의 눈에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소년을 향해 검을 세웠다. 리아의 원수는 리아의 검으로 처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못하면 리아가 온전히 잠들지 못할 것이다.


이성을 잃고 달려오는 레테의 모습을 보고 리니로나가 말했다.


“아빠, 저것도 먹을까?”
“아니, 됐어. 아빠가 처리할게.”


달리면서 레테는 왼팔의 구속을 풀었다. 도료를 끼얹은 듯 왼팔은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불붙은 듯 전신이 뜨거웠다. 몸이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미친 듯 질주하던 발을 접어 한껏 움츠렸다. 그리고는 도약. 한계까지 짓눌린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이 레테는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급상승하고 있는 탓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의 돌풍이 휘몰아쳤다. 상승이 멈추고 나서야 가까스로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도약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레테의 바로 머리 위에 동굴의 천장이 있었다. 상공에서 내려다본 소년은 가늘게 웃고 있었다.


“지금 당장 죽여 버리겠어!”


레테는 중력이 끌어당기기 시작한 지점에서 들고 있던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소년을 향해 곧바로 내리찍었다. 굉음과 함께 모래먼지가 그 주위를 둘러쌌다. 발부터 시작해서 머리털 끝까지 전류가 흐르는 듯한 진동이 일었지만 고통은 없었다. 적귀상태의 육체강화와 호르몬의 분비로 외적 감각을 느낄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그 충격이 그대로 전해졌을 것이다.


레테는 자신의 첫 살인에 눈을 꾹 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년은 동료들을 죽였다. 그 원수를 갚았건만 어째 가슴속에 꺼림칙한 무언가가 남아있었다. 이것이 복수를 한 뒤의 허무함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레테는 살며시 감았던 눈을 떴다.


“그, 그럴 수가…… 어떻게…….”
“어떻게 라니. 설마 내가 이 정도의 공격으로 죽는다 생각한 건 아니겠지?”


걷히는 모래연기 사이로 미소를 짓는 소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검신의 중간쯤에 칼날을 붙들고 있는 작은 손이 보였다. 그렇다. 소년은 단지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가공할 만한 속도로 내려찍는 날붙이를 막은 것이다.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중력의 힘을 빌려, 더구나 적귀상태가 되었는데도 소년을 쓰러트릴 수 없었다. 분노를 뛰어넘어 무사로서의 순순한, 강자에 대한 경외심마저 들었다.


“그렇게 대단한 짓은 안 했어. 스트렝스를 썼을 뿐이지.”


소년은 손가락을 움직여 검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았다. 레테가 있는 힘을 다해 쥐고 있는 검은 어이없이 소년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레테는 그것에 그저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건 리아의 검이었지, 아마. 이게 부서지면 너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 안 돼!”


검의 떨림으로 소년이 힘을 준 것을 깨달았다. 레테가 다급히 빼내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소년의 손가락은 단숨에 도신을 이분하는 번개모양의 균열을 냈다. 검의 자잘한 조각이 튀기고, 떨리는 시야 속에서 소년의 입 꼬리가 천천히 비틀어 올라갔다. 다음 순간, 폭발과 같은 소리와 함께 리아의 검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졌다. 공중에 흩날리는 파편들 사이로 레테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기치 가 침투 작전에서 레테가 무기를 잃었을 때, 그 대신 리아가 건네준 것이 바로 이 검이었다. 검을 건네면서 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아끼는 녀석이니까 소중히 쓰라고!’


그 검이 지금 막 부서져버렸다. 파손되기 전의 형태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깨어져 없어져버렸다.


“아아…….”
“어떡하나. 부서져버렸네?”
“으아아아!”


레테는 허리춤의 검을 빼들고 소년을 향해 치켜들었다. 하지만 검은 끝내 소년에게 닿지 않았다. 소년이 주먹으로 레테의 복부를 가격한 것이다. 숨도 제대로 못 쉴 충격에 레테는 배를 부여잡고 꼬꾸라져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크흐, 크흐흐흣.”
“응? 너무 아파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당신, 스트렝스를 썼다고 했지?”
“그렇다만?”
“난 알고 있어. 스트렝스는 시전자에게 힘을 가져다주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반동이 돌아온다는 걸. 크흑, 반동이 돌아온 당신은 힘을 제대로 못 쓰겠지. 그때를 노려 내가 당신을 쓰러트릴 거야. 반드시 쓰러트릴 거라고!”
“크큭. 푸하하하하하!”


소년은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뭐, 뭐가 웃기지?”
“멍청한 꼬맹아, 중요한 사실 하나 알려줄까?”
“으, 으왓!”


소년은 한 손으로 쓰러진 레테의 멱살을 움켜쥐고 높이 치켜들었다.


“전에 키챤에게 이런 걸 물어 본 적이 있었지? 스트렝스를 쓴 뒤 반동이 돌아 왔느냐고. 스트렝스는 마력은 조금 밖에 들지 않지만 체력에 관련되는 마법이야. 시그리모 주민들의 마력을 흡수한 이후로 나는 초월자에 한 없이 가까운 육체를 얻게 되었어. 키챤의 몸은 변형한 내 몸일 뿐이니 인격이 바뀌어도 같은 육체를 공유하는 거야. 그러니까…….”


소년은 들고 있던 레테를 위로 던졌다. 가볍게 던졌을 뿐인데도 레테의 몸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


“이렇게 해도.”


공중에서 두 팔을 허우적대는 레테의 앞의 허공에서 뜬금없이 푸른빛이 터져 나오며 소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것이 텔레포트라는 걸 레테는 단박에 알아챘다. 키챤이 그렇게 힘들어 하던 마법을 소년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사용한 것이다.


“이렇게…….”


소년은 몸을 돌려 빠르게 회전했다. 그 힘을 실어 뒤꿈치를 레테의 복부에 내리 꽂았다.


“……해도!”


레테는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과 함께 무지막지한 속도로 저 끝까지 튕겨나갔다. 동굴 벽에 부딪친 레테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바닥에 떨어져서는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힘이 다했는지 왼팔의 괴물은 모습을 감추었다. 시야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지면 위로 소년의 발이 나타났다.


“나한테 반동이 돌아올 일은 없다, 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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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16 21:06 | 조회 : 1,298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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