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1995년 06월 11일(26) 저주/ 1부 에필로그



“어째서…….”


레테의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레테의 뺨에는 어느새 뜨거운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동료라고 믿고 있었는데…….”
“동료?”
“당신은 키챤은 아니지만 키챤의 뒤에서 우리들과 같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하물며 엑시스와는 나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같이 했는데 그런 동료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다니…… 그건 정말 너무 하다고요!”
“웃기지 마. 나는 단 한순간도 너희들을 동료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 그도 그런 게, 너희들은 내 진정한 이름을 모르잖아?”


레테는 키챤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소년의 이름은 혹시 다른 지도 모른다.


“내가 가지고 놀 장난감으로서 너에게 내 가짜 이름을 알려주지.”
“가짜 이름?”
“진정한 이름은 다른 곳에 두고 왔다. 시엔. 내 이름은 시엔이다. 이후 잘 기억해 두도록.”
“초월자…….”
“크큭, 그래.”


시엔은 쓰러져 있는 레테 앞에 쭈그려 앉았다.


“레테, 내가 어째서 인간을 미워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니?”


레테는 말없이 시엔의 눈을 노려보았다. 시엔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이걸 선물로 줄게.”


시엔은 살며시 레테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야티스, 이스룩 - 레오드그놀류.”


시엔이 주문을 외자 그 손에서 창백한 보랏빛이 일더니 그 빛이 레테의 몸에 옮겨갔다. 잠시 동안 레테의 곁에 머물던 빛은 그의 몸에 스며들 듯이 사라졌다. 이윽고 레테의 왼쪽 가슴, 조금 윗부분에 검은 문자가 나타났다.


“레테. 너는 지금 이 시간부터 너 자신 이외의, 악인이라고 판단한 인간은 반드시 네 손으로 죽여야 한다. 그렇게 못하면 네가 죽게 돼. 네 가슴에 새겨진 문자, ‘레오드그놀류’는 고대어로 ‘악인’이라는 뜻이지. 그 문자는 내 마법이 발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내가 해제하거나 내 몸이 죽어 없어지지 않는 한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야. 한마디로 불멸인 셈이지.”


시엔이 말한 그것은 선물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웠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시엔은 가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자기가 죽인 인간의 수는 평생 잊지 못하겠지? 나중에 세어보면 알게 될 거야.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 동물인지를. 한 번의 기회는 주겠어. 처음 악인과 대면했을 때 방심하다가 놓쳐서 네가 그냥 죽어버리면 재미없거든. 아, 안심해도 돼. 이 선물의 조건에서 나는 제외되니까. 나까지 포함하게 되면…… 너무 잔혹하잖아. 그렇지?”


시엔은 레테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고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델리카리온, 오늘의 날짜가 어떻게 되죠?”
“95년 06월 11일이다.”
“오늘로부터 정확히 2년 뒤 이 시간. 몬스터들을 총동원하여 인간 세계를 덮칠 것이다. 나는 인간들이 혼란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제일 좋은 자리에서 구경할 거야. 그리고 다 즐긴 뒤에는 제국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을 제물로 삼을 거야.”
“……제물?”
“그래. 내가 초월자가 되기 위한 마지막 제물이지.”
“그렇다면…!”
“의식이 끝났을 때 내 복수는 완료하고, 나는 유일한 초월자로서 이 세상의 절대군주로 군림하는 거다.”


시엔이 입 꼬리를 비틀며 레테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네가 나를 막을 수 있을까 한번 보자고. 그럼 그때 보자.”


일어나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소년은 “아참!” 하고 무언가를 잊었다는 듯 박수를 치며 조금 전 자신이 앉아있던 거대한 의자 쪽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작은 마법진은 빨리 파괴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계속해서 몬스터들이 나오도록 설정해 두었거든. 아까 에필란드, 바렌투드, 레님, 엘시아 숲을 둘러싸는 마법진을 쳐두었다고 말했지? 저게 그 마법진을 형성하는 소형 마법진이야. 너희들이 동굴에 들어와서 맞닥뜨린 님블도 모두 마법진 안에 있는 녀석들을 모은 거야. 내가 수집해두고 있던 몬스터도 나오니까 조심하라고. 너희들이 만난 크리커터가 바로 리니로나를 합성하고 남은 녀석들이거든. 참고로 내가 모은 몬스터들. 그들은 내가 실험을 하는데 썼어. 아까 말했지? 몬스터들을 총동원하여 인간 세계를 덮칠 거라고. 그때 쓰기 위해서는 녀석들이 조금은 더 똑똑해지고 흉포해질 필요가 있거든. 그래서 뇌를 조금 만져주었지. 그리고 말이야. 어쩌면 인간들이 나올지도 몰라. 한때 이니티 주민의 시체를 잠깐 가지고 논 적이 있거든.”


자기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 시엔은 발꿈치를 돌렸다. 떠나는 시엔의 등에 대고 레테가 남아있는 모든 힘을 끄집어내어 소리쳤다.


“어째서 나만 살리는 거지?”


시엔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레테를 돌아보았다.


“원래는 모두 죽이려고 했거든? 그런데 며칠 전 식사를 나누는 중에 네가 한 말, 그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지. 동료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아이가 절망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니 죽이는 것보다 오히려 살리는 게 재밌을 것 같다 생각하게 된 거지.”


‘저는 이제야 모두의 진정한 동료가 된 것 같아요. 솔직히 처음에는 가까이 다가가는데 어딘가 거리낌이 있었거든요.’


“겨우 그 이유 때문에 날 살리는 거야? 그냥 차라리 날 죽여줘! 난 충분히 절망에 빠졌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레테, 네가 느낄 절망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절망의 밑바닥까지 빠져 더 이상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절망한 네 모습을 보고 싶어.”


레테는 그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리고 너만 살린 거 아니야. 카린도 살렸지.”
“카, 카린이 살아 있다고!? 카린은 지금 어디 있지?”
“그야 모르지. 나도 모르는 곳에 보내버렸거든.”
“죽여 버리겠어!”


레테는 검을 들고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의 충격으로 몸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다. 일어서기는커녕 호흡조차 고역이었다.


“하하, 좋은 표정 보여줘서 고맙다. 꼬맹이.”
“나는 꼬맹이가 아니야! 레테다!”
“친근감을 담아 키챤의 말투를 따라해 보았는데 오히려 화나게 했나보군.”


그러고 보니, 하고 시엔은 말했다.


"전에 키챤의 성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지? 프리모의 뜻을 지금 알려줄게."


미소를 한입 베어문 표정으로 레테를 내려다보던 시엔이 입에 올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일말의 희망도 베어버리는, 칼날과 같은 한마디였다.


“그대에게 건네줄 게 있네.”


레테에게 다가가는 델리카리온이 품에서 꺼낸 것은 흰색 빛을 띈 잎자루 끝에 2개의 작은 잎이 붙어 있는 풀이었다. 그 풀을 꼼짝도 못하는 레테의 품에 넣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면 그걸 먹는 게 좋을 걸세.”


레테는 그 풀의 생김새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먹었을 때 자신이 어떻게 되는지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테는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델리카리온에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런데 델리카리온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실실 웃으며 “언젠가 필요할 때가 올 거야.” 하고는 등을 돌렸다. 시엔은 “그럼 2년 뒤를 기대할게.” 라는 말을 끝으로 리니로나, 델리카리온과 함께 어둠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마지막으로 사라지면서 시엔은 책을 흔들어 보였다. 그 책은 키챤이 전에 보여주었던 책이었다.


레테는 동굴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눈물을 흘렸다.



에필로그.



“자네도 고약함이 어지간하지 않구먼. 죽이려는 자들 중 가장 어린 아이들만 남겨놓다니. 그들에게는 남은 인생이 생지옥이나 다름없을 걸세.”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물론 되고말고. 절망에 빠진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크큭, 벌써부터 웃음이 흘러나오는군.”


당신도 만만치 않습니다, 라고 말하려던 것을 시엔은 간신히 집어삼켰다.


“그러고 보니… 지금 생각났는데 그때 무엇으로 변장하셨나요?”
“그때라 하면?”
“전에 길거리에서 저를 보셨다고 하셨죠. 그때 말입니다.”
“아, 그때? 그때는….”


나이에 걸맞지 않는, 장난꾸러기의 미소를 지은 델리카리온은 자신만이 해답을 알고 있는 상황에 유열을 즐기듯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이내 장난기어린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어린 소년으로 변장했지.”
“소년이라? 어떤 모습의 소년이었습니까?”
“글쎄, 난 그대의 모습을 본떴을 심산이었는데 과연 그게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네.”
“제 모습을요? 하하하! 그거 참 볼만 했겠군요.”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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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16 21:10 | 조회 : 1,354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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