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1995년 06월 11일(24) 기회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 레테였지만 정작 그가 리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것에 저항할 힘이 레테에게는 없었다. 레테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동안 소년의 손은 벌써 두 개가 접혔다. 다만 소년의 말을 따를 밖에는 리아를 구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 하면 동료를 구해주겠다던 소년의 조건을 아무런 감흥 없이 해내기에는 레테의 심성이 너무 여렸다. 소년이 레테에게 시키려는 말은 장문도 아닐뿐더러 다 하는 데에는 5초도 길었다. 뜻을 음미하며 시처럼 읊으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정된 문장을 읽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보다 쉬운 조건은 따로 없어보였다.


그렇게 생각한 반면 레테의 입술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나, 레테는 엑시스와 함께 생활하면서 단 한 순간도 그들을 동료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머릿속으로는 필요하다면 몇 번이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직접 입 밖에 내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말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그 말을 자신의 입으로 말한다는 것은 레테 자신이 스스로 지금까지 동료들과 보낸 소중한 시간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들과 보냈던 시간을 전부 없었던 일로 하는 짓은, 작은 말 한마디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소년의 남은 세 손가락이 다 접혔다.


“이런, 이런. 또 제한시간을 넘겨 버렸네.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으니 다시 벌칙을 주겠어. 리니, 간식시간이다. 이번엔 그 인간의 오른쪽 다리야. 맛있게 먹으렴.”


그 말을 듣고 반응한 몬스터가 리아의 오른 다리를 입에 넣고는 그대로 턱을 다물었다. 거대한 이빨이 박힌 튼실한 허벅다리는 그 주변이 잔뜩 여문 과실과 같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몬스터는 고개를 뒤로 젖혔고, 귀를 틀어막지 않고는 차마 들을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다리는 몸통에서 떨어져 나갔다.


“크아아아악!”


레테는 비명을 내지르고만 싶었다. 하지만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의 섬뜩함이 목메게 했다. 리아가 신음하는 모습이 마치 레테 자신의 다리가 잘린 것 마냥 고통스러웠고, 동료가 저렇게 되는 동안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리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몬스터는 맛을 음미하듯 리아의 다리를 혀 위에서 또르르 굴렸다. 그리고는 이내 살과 뼈와 가죽을 소화가 잘 되도록 잘게 씹어 삼켰다.


레테는 너무 혼란해 있었다. 머리를 식히고 냉정하게 사고할 필요가 있었다. 소년은 지금까지 두 번의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레테가 실패하자 처음에는 오른팔을, 나중에는 오른 다리를 리아에게서 앗아갔다. 즉 소년이 제안한 이 게임에서 기회는 리아의 사지인 것이다. 성공하면 풀어주지만 실패하면 기회가 사라진다. 소년은 그런 식으로, 리아의 팔다리를 모두 저 몬스터의 먹이로 내줄 생각인 것이다. 레테는 소년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과연 보통 인간이라면 도저히 생각하지 못할 일이지만, 그렇지만 이건 너무 잔혹하지 않은가.


“다시 기회를 주겠어.”


소년이 다시 손을 펼쳤다. 그 손가락이 하나 접혔을 때였다.


“……레테, 그냥 말해.”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소년이었다. 소년은 어둠 속에서 누구도 모르게 힐쭉 웃었다. 다음으로 레테가 반응했다.


“네?”
“그냥 말해버리라고! 어차피 말 한마디잖아? 그거 한마디 하면 풀어준다는데, 거리낄 게 뭐가 있어!”
“하, 하지만…….”


분명히 소년의 말을 따르지 말라 한 것은 리아 본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리아의 입에서 소년의 말을 따르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도저히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시간 지났어. 그 여자의 왼쪽 다리를 먹어치워, 리니.”


뿌드득 뿌드득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다리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고서 리아는 고개를 풀썩 떨궜다.


“하아, 하아, 끄윽, 이런 제길!!”


그리고 리아는 고개를 들어 레테를 노려보았다.


“내가 빨리 말하라고 했지, 이 개자식아!”
“네, 네?”
“꼬마야, 저런 머리 모자란 녀석 말고 내가 말하면 안 될까? 나, 리아는 엑시스와 함께 생활하면서 단 한 순간도 그들을 동료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됐지? 이걸로 풀어주라, 응?”
“리, 리아……, 지금 뭐하는…….”
“난 레테, 너 같은 놈이 제일 싫어! 나는 너를 단 한 번도 동료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


리아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레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인데 다만 뇌에서 그 의미의 해석을 완강히 거부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 돼. 게임을 하는 사람은 레테지 네가 아니야. 그러니까 네가 아무리 그 말을 해봤자 소용없어. 오로지 레테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와야 되지. 리아, 네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야. 레테에게 그 말을 할 수 있도록 응원하는 것.”


소년은 말을 마치고는 손가락을 펼쳤다. 그 손가락이 하나 접히기도 전의 시간, 리아의 표정은 성난 늑대에서 순한 양으로 변해 있었다.


“레테, 제발 부탁이야. 말해줘.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지금 너무 아파. 그러니까 사람 하나 구한다 셈 치고 말하면 돼. 그걸 말한다고 우리 엑시스의 결속력이 깨지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말로 할 뿐이야. 단지 그것뿐이라고. 나는 믿어. 레테, 네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너는 우리를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단 한 순간도 그것을 배반한 적이 없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단 한 순간도 동료를 배반한 적이 없어. 아까는 조금 동요해서 그런 거야.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만 말이 헛 나와 버리고만 거라고. 그러니까 제발 날 좀 살려줘. 날 좀 구해 달라고!”


조금 전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런 리아의 말을 들으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레테가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 소년의 손이 모두 접히고 말았다.


“리니, 왼쪽 팔을 먹어.”


뿌드드득 뿌득


“끄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리아는 단말마와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극심한 고통에 실신한 모양이었다.


“리, 리아…….”


안 된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리아가 망가질 것이다. 적어도 리아의 목숨만은, 목숨만은 살려야 한다.


크윽…! 하고 레테는 분한 듯이 이를 깨물었다.


“……나 레테는…….”


레테는 자신의 연약함을 질책했다. 어차피 할 거라면 어째서 리아의 몸이 성할 때 하지 않았나.


“엑시스와 함께 생활하면서…… 단 한 순간도…….”
“리니, 나머지 전부 먹어도 돼.”
“정말? 고마워, 아빠! 잘 먹을게!”


몬스터는 사양도 않고 몸통에 얼굴만 달린 리아를 입속에 넣었다. 생선의 가시를 고르듯이 우물거리다가 이내 검은 물체를 퉤 뱉어내었다. 바닥을 굴러 레테의 발치에 부딪친 그것은 리아의 머리였다. 식사를 끝낸 몬스터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트림을 내뱉으며 입맛을 쩍쩍 다셨다.


“아, 잘 먹었다~”
“리니, 아까 말했지. 편식하면 못 쓴다고.”
“하지만…… 인간의 머리는 너무 맛이 없는 걸.”


에휴 한숨을 내쉰 소년은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내었다. 레테의 다리가 무너져 그대로 쓰러졌다. 레테를 속박한 마법을 푼 것이었다. 그렇지만 레테는 움직일 수 없었다. 레테는 머리 밖에 안 남은 리아를 눈앞에 둔 채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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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16 21:03 | 조회 : 1,211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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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49117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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