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1995년 06월 11일(23) 공연의 시작



“당신은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지?”


레테의 말에서 상대를 높이는 어조는 이미 찾을 수 없었다. 상대가 비록 동료 중 한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 본인이 아닌 것을 깨닫고는 그 어휘를 바꾼 것이다. 소중한 동료들의 목숨을 앗아간 상대에게까지 높임말을 쓸 정도로 레테는 어리석지 않았다.


“동료들이 불침번을 하고 있어서 나가지 못했을 텐데?”
“물론 텔레포트로 이동했지.”
“텔레포트? 그건 마력을 많이 소모하는 마법 아닌가?”
“하핫! 설마 키챤의 실력이 내 실력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너무나도 큰 착각이야. 키챤에게는 제한된 마력만 주도록 내 육체에 미리 설정해 두었어. 키챤에게 그렇게 큰 힘을 줬다가 무슨 일 벌어지면 어쩌려고. 물론 그는 내 명령대로 움직이긴 하지만 일일이 명령을 내리는 것도 귀찮거든.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귀찮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 싹을 잘라두는 거라고. 이것도 그 일환일 뿐이야.”
“…….”
“자, 이제 궁금증도 풀었겠다, 미뤘던 공연을 시작해 볼까? 아, 그전에 귀찮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제거해야겠지?”


소년이 뭐라 중얼거리자 레테는 온몸에 보이지 않는 사슬이 묶인 듯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속박주술을 걸어 레테의 움직임을 봉쇄한 것이었다.


“그럼…… 고대하던 공연의 막을 열도록 하자.”


소년이 손가락을 튕겨 소리 내었다. 직후, 리아의 눈이 떠졌다.


“리아! 정신이 들어요?”
“……레테? 거기서 뭐하니?”


리아가 어리둥절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긴 어디고?”
“여긴 앨딤 산 정상 부근에 있는 동굴 안이에요!”
“앨딤 산이라면 시그리모 옆에 있는 그 산 말하는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에필란드 지부에 있었는데, 어느 새 그 먼 곳까지 왔데? 네가 데려와 준 거니?”
“그게 아니에요. 리아가 잠든 사이 저 소년이 이 산으로 데려 온 거예요. 리아는 납치당한 거라고요!”
“나, 납치? 그러고 보니…….”


리아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버둥대지만 십자로 벌어진 두 팔과 다리가 고정되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꿈쩍도 안 해…! 레테, 이리로 와서 이것 좀 풀어봐.”
“죄송하지만 저도 마법으로 몸이 안 움직여요.”
“뭐?!”


리아는 그녀의 옆에서 태연히 앉아있는 소년을 보았다.


“야, 이 자식아! 이거 어서 풀지 못 해?!”
“아빠, 나 배고파. 리니, 이거 먹으면 안 돼?”
“이, 이건 또 뭐야!?”


리아는 얼굴을 들이대며 콧김을 내뿜는 몬스터를 보고 질겁하였다.


“응, 잠깐만 기다려. 곧 먹게 해 줄 테니까.”


소년은 리니의 콧등을 긁어준 뒤 레테를 보았다.


“여기서 작은 게임을 제안하도록 하지. 방법은 간단해. 레테, 네가 리아에게 단 한마디만 하면 돼. 성공하면 리아와 너를 풀어서 상처 하나 없이 에필란드로 돌려보내 줄게. 하지만 제한시간 내에 성공하지 못했을 시에는…… 무시무시한 벌칙이 있을 거야.”
“내가 그 한 마디를 하기만 하면 정말 리아를 풀어주는 거겠지?”
“물론 믿어도 돼.”


레테는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게임이라고 해서 터무니없는 것을 제안하는가 싶더니 겨우 말 한마디 하는 것뿐이라니. 저 드래곤 같은 몬스터를 쓰러트리는 것보다야 몇 백 배는 쉬웠다.


“그 한마디라는 게 뭐지?”
“네가 할 한마디는 이거야.”


소년의 눈이 암흑 속에서 불길한 빛으로 번쩍였다.


“나, 레테는 엑시스와 함께 생활하면서 단 한 순간도 그들을 동료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뭐, 뭐?”
“제한시간은 5초야. 그럼 시~작!”
“나, 나…….”
“레테! 저 자식의 말 들을 거 없어! 꼬마야, 네가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허튼 수작은 그만 두는 게 좋을 거야! 어떻게라도 우리 사이를 이간질 내려는 모양인데, 우리가 네가 하는 말에 순순히 따를 것 같아?”
“리아…….”


레테는 구원받은 느낌이 들었다. 딱히 소년의 말을 따르는 것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동료를 풀어 주겠다는데 무엇인들 못하랴. 하지만 그가 하라는 말을 레테 자신의 입으로 내는 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생리적인 거부감마저 느꼈다. 그렇기에 리아의 말에 안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같잖은 위협은 안 통하니 이 밧줄이나 풀지 그래?”
“4…… 3…….”


리아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의연한 표정으로 소년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제한시간을 세고 있었다.


“야! 안 들려? 귀먹었냐?”
“2…… 1…….”


완벽한 무시였다. 소년의 모습을 볼 때면 리아의 존재가 처음부터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년은 오로지 레테만을 보고 있었다. 레테의 입에서 자신이 원하는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제한시간은 지금 막 끝이 났다.


“땡! 안타깝네. 너무 안타까워. 제한시간을 넘겼으니 벌칙을 줘야겠지?”


그런 말을 한 반면 소년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 있었다. 소년의 고개가 리아의 옆에 있는 몬스터에게로 향했다.


“리니, 간식 시간이다.”
“응!”
“기다리느라 지쳤지? 거기 묶여있는 인간의 오른팔 있지? 그거 먹어도 돼.”


몬스터는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리아가 있는 쪽으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리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동안, 입을 쩍 벌린 몬스터는 그 뾰족뾰족 튀어나온 이빨로 리아의 오른팔을 물어 뜯어버렸다. 리아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꽤나 시장했는지 몬스터는 입에 넣은 팔을 몇 번 씹지도 않고 그대로 목구멍으로 넘겼다.


“이게 벌칙이야. 어떠니? 동료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심정이.”
“……아…….”
“여기서 좋은 소식을 알려줄게. 리아의 목숨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출혈은 마법으로 미리 막아두었거든. 그러니까 적어도 피가 부족해서 죽는 일은 없을 거야.”


충격으로 심장이 멎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하고 소년은 그곳에 있는 누구나에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실패 했으니까 이걸로 끝. 이러면 너무 매정하잖아? 그러니까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까 해. 방법은 같으니 설명은 필요 없겠지? 그럼 바로 시작할까?”


소년은 태연하게 접었던 손가락을 펼쳤다. 방금 전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던 레테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리, 리아. 괜찮아요?”
“크으으으으으윽…!”


리아는 대답할 여유도 없어 보였다. 소년의 말대로 어깨의 절단면에는 한 방울의 피도 새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피가 나오지 않는다고 고통이 없는 건 아니다.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 고통은 레테가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리아의 육체보다 정신이 먼저 무너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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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15 20:30 | 조회 : 1,24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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