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1995년 06월 11일(22) 이유



1992년 03월 12일


소년의 의식은 일견 성공한 듯 보였으나 완벽하진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했는데도 의식이 성공하지 못할까. 그 의문의 해답을 강구하던 도중, 에니프녹 감옥에 흑 마법사 델리카리온이 잡혔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과거,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들 중의 하나라는 칭호를 가진 자였다. 그런데 초월자의 힘을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열망 때문에 흑마법사라는 오명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라면 소년에게 해답을 찾아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그와 접촉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감옥 전체에 펼쳐져 있는 항마진도 강력한 마력을 얻은 소년에게 있어서는 손톱에 낀 때와 같은 것이었다.


소년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엑시스였다. 델리카리온과 접촉하게 돼서 의식의 요령을 듣는다고 해도 하루는 걸릴 것이다. 만일 일이 잘 풀려서 그에게 새로운 마법을 전수받는다고 치면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짧아도 한 달은 족히 걸릴 것이다. 장시간 자리를 비우게 되면 동료들이 걱정하여 수색망을 펼칠 것은 뻔하고 위치를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째서 흑마법사와 접촉했냐고 추궁당하면 뭐라 변명할 여지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모르는 중에 델리카리온과 접촉할 수 있을까. 며칠을 밤을 세워가며 고민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밤마다 텔레포트로 이동해 만날까 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번거로운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소년이 그 방법을 내키지 않아 했다. 학자의 아들인 만큼 궁금한 것이면 바로 정체를 밝히고 싶어 했으며, 그 동안에는 자신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그것 하나에만 열중할 수 있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상책은 예상치 못한 때에 떠올랐다. 그날 밤, 엑시스가 이번에는 라티아나 가를 습격하기로 했다. 거기서 소년은 생각했다.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델리카리온과 만날 생각을 하지 말고, 그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동료들에게 공공연한 상태에서 그와 만나는 것이다. 물론 흑마법사와의 만남은 드러내지 않은 채로. 중요한 것은 델리카리온이 있는 장소에 키챤이 가는 것을 그들이 아는 것이다.


델리카리온이 수감된 장소는 에니프녹 감옥. 경죄만 저질러도 누구든 그곳의 입장권을 얻을 수 있다. 목적을 드러내지 않고 키챤이 감옥에 갇히면 소년은 누구하나의 방해 없이 델리카리온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엑시스의 리더, 라이넬은 집단행동을 중시했다. 작전 중 대형을 벗어난 사람에게는 동료라고 해도 가차 없었다. 소년은 그걸 이용하기로 했다.



-



“작전은 멋지게 성공했어. 키챤은 내 암시에 따라 대형을 벗어나 활개를 치며 다녔고 결국에는 뒤쫓아 온 병사들에게 잡히고 말았지.”


그래서 키챤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인가……. 그때 키챤이 대형을 이탈한 것은 그가 흥분했거나 분위기에 휩쓸린 것이 아니었다. 모두 저 소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이었다. 키챤도, 그리고 레테 자신도.


“나는 결국 에니프녹으로 끌려갔고 얼마 안 있어 델리카리온과 접촉했지. 거기서 그렇게 염원하던 초월자의 마법을 전수 받은 거야. 여기에 그가 있는 이유는…… 뭐 중요한 것도 아니니 가르쳐 줄게. 마법을 가르쳐 주는 조건으로 그는 나와 같이 행동할 것을 희망했기 때문이야. 그 뒷이야기는 말 안 해도 네가 더 잘 알 거야. 키챤은 단지 엑시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에니프녹에 있는 그 누구보다 먼저 사형 날짜가 정해졌어. 1995년 06월 05일. 적귀, 네 사형 집행일과 같은 날이었지. 나는 거기서 구출될 걸 이미 알고 있었어. 나는 몰라도 키챤은 엑시스에게 있어 소중한 동료이니까. 거기서 뜻하지 않게 같이 구출된 것이 너야.”


소년은 개운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신 뒤 말을 이었다.


“이제 알았지? 내가 너희, 엑시스를 끌어들인 이유를 말이야.”


레테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까지 느꼈을 그의 고충이 얼마나 대단한지 레테는 헤아리려 했다.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무리 원망하는 상대라지만 긴 세월을 같이 보내며 정을 나눈 동료들이다. 그런 그들의 목숨을 그 자신의 손으로 끊어 버리는 행위는 레테로서는 도저히 불가해한 영역에 달해 있었다.


“뭐, 네가 이해 못 한다 해도 상관없어. 이해가 필요한 것도, 그걸 바라는 것도 아니니까.”


소년은 레테의 표정에서 그 생각을 읽어내고, 그걸 털어내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감옥에서 돌아온 뒤 동료들과 같이 있으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온통 이 생각뿐이었어. 엑시스를 어떻게 하면 가장 절망적인 형태로 부술까. 네가 밤마다 아버지를 찾으러 다니는 동안에 말이야.”
“그, 그걸 어떻게…….”
“네가 엑시스의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날이었어.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카린이 말해줬지. 네가 밤마다 어딘가에 나간다, 무언가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 라이넬은 카린을 꾸짖었어. 그에게는 그만의 사정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동료를 의심하면 안 된다. 동료를 의심하게 되면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고. 하지만 나는 신경 쓸 수밖에 없었어. 내 계획에 차질을 빚어선 안 되기 때문에 거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배제하면 안 되거든. 그래서 이 녀석을 보내서 너를 미행하게 했지.”


동굴의 어둠 속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와 소년의 어깨에 앉은 것은 새카만 깃털을 전신에 두르고 있는 까마귀였다. 까마귀의 붉은 눈동자가 레테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비웃는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울음소리를 내지른 까마귀는 이내 다시금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뭘 하나 했더니만 로일로우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더군. 필시 아버지가 그리웠겠지.”


그렇다. 레테는 매일 밤마다 로일로우 가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레테는 9살 때는 이미 제국의 지리를 모두 습득하고 있었지만 레그나드에서의 하루하루는 레테에게 있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잊게 했다. 감옥을 나왔을 때 기억에 남은 것은 주요 도시를 뺀 나머지 부분이 구멍이 숭숭 뚫린 지도였다. 그것을 보안할 수 있는 확실한 지도가 필요했는데 그것부터가 난관이었다. 레테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모두가 잠드는 밤사이 뿐이었기 때문이다. 며칠을 수소문을 하던 와중 막 가게를 닫으려는 상인에게서 지도를 구할 수 있었다. 그날은 운이 좋게도 말까지 구할 수 있었는데 경매에 남은 물건이라며 남기면 짐이라고 늦은 시간까지 팔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헐값에 팔고 있어서 레테가 입던 귀족 옷으로 구매가 가능했다. 그리고 다음날 지도를 확인하며 말을 타고 로일로우 가가 있는 에갈리브까지 무작정 달렸지만 실질적으로 밤사이에 도착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해가 밝아오고 아무런 수확 없이 터덜터덜 돌아오면서 남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동료들과 함께 지낼 때에도 잊혀 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동료들에게는 끝까지 말할 수 없었다. 레테의 아버지는 귀족이다. 레테가 귀족인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찾아다니는 모습을 과연 엑시스의 모두가 달가워할까.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그들에게도 버려질지 모른다. 다시 그 쓰라린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에 레테는 모두에게는 밝히지 않은 채 아버지를 찾아다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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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15 20:28 | 조회 : 1,258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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