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1995년 06월 11일(21) 적귀



1988년 07월 22일


그날 아침부터 소년은 나갈 채비를 했다. 레드 크리커터를 놓치기 사흘 전, 소년은 다른 지부에 있는 엑시서로부터 시그리모에서 축제가 열렸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시그리모는 3대 거대도시 중 하나인데다가 축제라 하면 필시 많은 사람들이 운집할 터였다. 소년은 이미 거대도시를 한 입에 집어 삼키는 마법진을 만들 실력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지역의 범위가 아닌 인구의 수였다. 지역이 넓으면 넓을수록 그 땅을 밟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따라오긴 한다만 마법진을 펼치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의식을 거행할 지역의 선정은 항상 골머리를 썩이는 문제였다. 그런데 저들이 알아서 한 장소에 모여 준다니 쌍수를 들고 환영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마침 다음 계획을 시행할 장소를 찾던 소년이었지만 그날 곧바로 결정하지는 않았다. 축제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18일, 소년은 시그리모 전체를 두르는 마법진을 펼쳤다. 그리고 그곳에 분석 마법――에널라이즈를 걸어두고는 다시 돌아왔다. 그 다음부터 약 1분 간격으로 시그리모의 내부 상황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총 면적, 지반의 양질, 총 건물의 수 등 들어오는 정보는 여럿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요구하는 건 한 자리 단위의 변동까지 파악하는 세밀한 인구수였다. 다음 날이 축제인 탓이라 인구수는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것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정보를 받아들이며 소년은 기다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할 때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이 시그리모 축제 기간 중 가장 인구가 밀집한 22일이었다.


텔레포트로 시그리모에 들어선 소년은 곧바로 그곳 전역에 마법진을 둘렀다. 의식을 마치자 바로 조금 전까지 시끌벅적했던 시그리모는 싸늘하게 변했고 반면 소년의 몸속은 흘러넘칠 듯한 마력이 난리법석을 떠는 소리에 귀가 먹먹해 질 정도였다. 10만 여명의 생명을 제물로, 소년은 이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얻게 된 것이다.



-



“자, 잠깐!”
“왜?”
“당신의 얘기를 토대로 따져보면 그날 시그리모 주민들을 전부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당신이란 말인데…… 그 말이 정말 맞습니까?”
“맞아.”
“시그리모를 죽음의 도시로 바꾼 사람이 당신이란 말입니까?”
“그래.”
“……시그리모 사건의 범인이…… 바로 당신이라고요?”
“나야.”
“하지만, ……하지만 교도관님한테서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범인이라고…….”
“그건 잘못된 정보야. 사건의 전말은 사실 이래. 내가 시그리모 주민들을 몰살한다. 곧바로 네가 나타나 입구부근에 뒹굴고 있는 시체에 상처를 낸다. 피를 흘리는 시체 곁에서 너는 의식을 잃는다. 모두가 죽어있는 중에 단 한사람만 살아있으면 당연히 의심받을 수밖에 없겠지. 너는 사건을 수사하던 병사들에게 끌려갔어. 전대미문으로 남을 처참한 사건의 용의자로서.”
“그, 그럴 수가…….”
“걱정 마. 너는 그곳에서 단 한사람도 죽이지 않았으니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니 믿어도 돼. 잠시 동안이지만 의식을 마친 뒤에도 그곳에 남아있었거든. 방화범이 자신이 불을 지른 장소에 다시 돌아오는 것과 같은 심리일 거야. 거대도시라고 불리는 곳이었으니까 큰 혼란이 일어날 건 불 보듯 뻔하잖아? 내가 사건을 저지른 범인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하고 싶어지더라니까?”
“내 왼팔이 이렇게 된 것도…… 내가 적귀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도…… 당신이…….”
“모두 나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 나중에는 이런 소문이 돌던데? 시체에는 하나같이 발톱과 같은 상처가 나 있고 피가 함께 있어서 적귀의 소행이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건 순 엉터리야. 대장장이는 시그리모의 입구 일대밖에 보지 않았지. 바로 네가 시체에 상처를 낸 부근만 말이야. 사건 직후 시그리모는 봉쇄되었고 사람들은 유일한 목격자인 대장장이의 진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 그런 제한된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의 진술을 토대로 한 소문이 진실일 리가 없지.”
“…….”
“그런데 대장장이가 설마 내 모습을 봤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야. 난 그때 너무 흥분해서 모습을 바꾸는 것도 잊고 있었거든.”
“설마…… 스미스 씨를 죽인 것도 당신입니까?”
“귀찮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싹을 잘라버려야지 않겠어?”


분노보다 의문이 앞섰다. 며칠 전 스미스의 죽음을 조사하러 간 라이넬과 디르고는 아무런 증거도 잡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디르고가 보인 의문을 떠올렸다.


‘근데 이상하지 않아? 아무리 늦은 시각이었다고는 해도 레님은 마을의 규모가 작고 거리의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있는 곳이야. 그런 곳에서 스미스의 비명이라든가, 어쨌든 무슨 소리가 난다면 주위 사람들이 그 소릴 듣는 건 틀림없을 텐데,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젓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니까 좀 더 수색해보면 무언가….’


그 상황에선 단지 리아를 위로하려는 뜻의 말이었을지 모르지만 의문점인 것은 확실했다.


“네 표정을 보면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겠다. 어째서 그 좁은 마을에서 살인이 벌어졌는데도 주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았는가. 이게 궁금한 거지?”
“그걸 어떻게…….”
“잊었어? 나도 그 자리에 있던 거.”


그랬다. 소년은 키챤의 눈과 귀로 그 자리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난 내가 하는 일에 방해가 들어오는 걸 제일 싫어하거든. 그러니까 사형장에서 구출되자마자 에필란드와 바렌투드, 그리고 레님과 이 엘시아 숲을 한꺼번에 둘러싸는 마법진을 형성했지. 그걸로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을 비켜나게 할 수 있거든. 그렇게 강한 마법이 아니라 약간의 소문이 날 수도 있지만 그것뿐이야. 그걸로 간단하게 방해받지 않고 일을 진행시킬 수 있다 이 말이야. 엑시스가 너희들을 구출한 직후 추격대에 쫓기지 않은 것도, 키챤과 너의 수배지가 걸리지 않은 것도 모두 그 덕분이니까 감사하라고. 그러고 보면 이것도 굉장한 인연이야. 내가 벌인 일들이 우연찮게 모두 너에게로 돌아가다니 말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너무나도 가볍게 내뱉는 소년의 말에, 레테는 지옥같이 느껴졌던 요 7년간의 고생이 허무한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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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15 20:25 | 조회 : 1,407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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