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1995년 06월 11일(19) 소중한 물건을 내려놓다



“그, 그럼 당신이 키챤입니까?”


레테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아니야. 아까 말 했잖아. 키챤은 이미 죽였다고. 키챤은 나와 한 몸을 쓰면서 다른 인격이야. 그 인격을 내 뇌 속에서 소멸시켜 버린 거지. 그러니까 시체가 남지 않은 거고. 하지만 이런 건 가능해.”


소년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을 쓸어내리자 소년의 얼굴은 어느새 다른 사람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그 얼굴은 언제나 장난기 많은 키챤이었다.


“키, 키챤.”
“하하, 그래. 이제야 알아보는군. 꼬맹이.”


키챤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곳에는 다시 소년의 얼굴이 있었다.



-



소년은 키챤의 몸이 주기적으로 커지도록 설정해 두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육체의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소년은 초월자의 의식으로 불로의 몸을 얻었다. 그렇기 때문에 변형한 형태인 키챤의 몸 또한 늙지 않는다. 원래부터가 마법으로 만들어진 몸이니 그것이 성장할 리 만무했다. 영원히 늙지 않는 몸이라는 것은 물론 좋은 이야기이지만 인간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구비문학이나 오랜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상상이 만들어낸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제부터 인간들 틈에 끼여서 생활하는데 한 인간만이 어린 채로 있다면 어떻겠는가. 육체가 성장하는 것이 아닌, 육체가 성장한다고 ‘보이게’ 하는 것은 그런 문제가 제기될 뿌리를 미리 제거하는, 잡초제거와 같은 작업이었다.


이제 키챤의 과거를 설정하는 일만 남았다. 과거, 즉 기억은 한 인간의 인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년에게 있어서 키챤의 과거는 엑시스에 최대한 빠르게 스며들게 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인격이나 성격 따위의, 그 사람 특유의 인물상은 따로 설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별다른 인격체라지만 키챤은 결국 소년이 조종하는 실에 매달린 인형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과거를 약간 각색하여 키챤의 뇌에 새겨 넣었다. 그렇게 학자인 귀족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마법사 키챤이 탄생하게 되었다. 키챤의 과거는 진실이 담겨있었지만 허구라는 연필로 쓰인 공상의 이야기였다. 소량의 진실이 가미된 거짓은 진실보다도 더욱 진실 되게 보인다. 자신의 과거가 누군가의 과거를 각색한,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해도 그에 대해 키챤이 불평을 토로할 일은 없다. 키챤은 자신의 팔 다리에 실이 달린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할 테니까.


모든 작업을 마친 뒤, 소년은 키챤에게 엑시스에 들어가도록 명령했다. 소년의 명령은 암시로서 전달되었고 소년의 창조물인 키챤의 인격은 거기에 거역할 수 없었다. 허물없이 자신을 내보이며 접근한 키챤을 엑시스는 의심하지 않았고, 그렇게 소년은 너무도 쉽게 엑시스에 침투할 수 있었다. 비슷한 과거를 지닌 동류에게는 쉽게 팔을 내벌리는 집단의 약점을 여지없이 파고든 것이었다. 엑시스에 들어간 키챤은 조직이 발전하는데 큰 조력을 하여 비교적 단기간에 동료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얻었다.



1982년 08월 16일


그날은 아침부터 소년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평소에 키챤이 동료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흥미롭게 치켜보던 소년이었지만 그날만큼은 등을 돌린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엑시스의 임무를 모두 끝내고 돌아가던 도중 소년은 무리에서 빠져나와 깊숙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별다른 조건은 두지 않은 채로 어느 건물에 들어갔는데 상황이 좋게도 그곳은 빈 집이었다. 주변은 허름하고 쾨쾨한 냄새가 났지만 그런 것들로 인해 소년이 정신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 흐트러지는 일은 없었다.


소년은 왼쪽 가슴에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심장을 빼내었다. 심장은 여전히 손에서 뛰고 있었고 약간 따끔한 느낌만 있었지 큰 고통은 없었다. 다만 가슴 속에서 느끼는 뜨거운 감정들이 결여된 채 몸속에서 찬바람만 불 뿐이었다. 그렇다고 소년이 어느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됐다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심장을 빼내서 죽는다거나,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잃는다거나 하는 것들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소년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다만 소년이 그렇게 느꼈을 뿐이었다.


소년은 빼낸 심장과 함께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그곳에 두었다. 분명 손에 닿는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끊어진 다리 너머를 보는 눈으로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자신이었다면 지금 누구보다도 곁에 나란히 서고 싶은 사람은 아버지일 것이다. 자랑스러운 아버지 옆에서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서는 것. 소년에게는 그런 꿈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악이었고, 그것을 알고 있는 소년도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한 살, 한 살…… 해를 거듭함에 따라 소년은 악이 어디를 파고들어 자신을 무너뜨리려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공포, 고통, 불안을 느낄 때는 오히려 안심이 된다. 보다 더해지는 경계심과 의심은 악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평화, 안식, 믿음. 소년이 가장 주의하는 것은 이것들을 느낄 때였다. 그것들은 처음부터 모두 악이 건넨 것이며 결국은 다시 뺏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없던 것과, 있다가 없어지는 것은 상대적인 박탈감이 차원이 다르다. 소년이 그렇게 원하던 영원한 평화와 행복 속의 안식을, 악마는 입이 찢어지게 웃어대며 한 순간에 앗아가 버렸다. 마치 원래부터 자기 것이었다는 듯이. 그 뒤로 소년은 불안 속에서 숙면했으며 안식 속에서 불안을 느꼈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조차도 약함의 일부였다. 아버지가 악이고 악이야말로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안는 그리움은 한편으로는 소년이 악에게 기대고 있는 것과 동일했다. 만약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한다면 언젠가 다가온 악마에게 그곳을 찔려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상기할 때마다 소년은 자신의 심장과 소중한 것의 무게가 점점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이 되었을 때 그것들은 한시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되어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심장과 소중한 물건, 아버지가 지어 주신 자신의 이름마저 모두 ‘미련’으로 뭉뚱그려 그곳에 다 내려놓은 것이다.


소년이 이 세상에서 태어난 날과 같은 날, 자신의 안에 남은 모든 미련을 버리고 소년은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자 소년은 입을 열어 크게 웃어 젖혔다. 그것은 소년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을 때 내지른 울음과는 전혀 달랐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자 세상에 선전포고하는 혁명가의 포효였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강한 존재, 초월자가 되는 그날……. 다가오는 어떠한 크기의 악에도 두려워 떨 필요가 없어졌을 때야 비로소 이곳을 다시 찾으리라. 소년이 그곳을 떠나며 굳은 결심을 한 그날은 소년이 정확히 성인이 되는, 17살의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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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14 19:23 | 조회 : 1,229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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