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1995년 06월 11일(18) 첫만남



1980년 05월 15일


그날 처음으로 소년은 마을 규모의 마법진을 그리기로 했다. 그 대상으로 6년간 터를 잡고 생활했던 템시크에서 인접한 마을을 선정했다. 거리가 가깝고 먼 것은 지금의 소년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년의 한마디로 어디든 이동할 수 있었고 또 한마디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도 소년이 가장 가까운 마을을 선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소년은 6년 동안 템시크에서 마법 수행을 하면서 막힐 때가 있으면 주변 마을로 잠깐 기분 전환하러 나갔다. 그러는 동안 주변 마을의 지리나 규모, 구성 요소를 파악하게 되었고 그곳 풍경이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조건에 적합한 마을을 찾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실 소년은 조건에 적합한 마을을 탐색하는 작업에 한 달의 기간을 상정하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장소가 주변에 여럿 있었고, 이미 마법 실력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봐도 됐으니, 긴 시간을 소모하면서까지 굳이 새로운 장소를 찾을 필요는 없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최종적으로 선정된 곳은 이니티라는 마을이었다. 규모가 작고 템시크 주변 마을 중에서도 주요도시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작업을 하더라도 사람들의 눈에 금세 띄지 않는 장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년이 만들 수 있는 최대한의 마법진의 크기와 가장 적합한 규모의 마을이었다.


“체인지.”


나무 뒤에 숨어서 소년은 자신의 모습을 바꾸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수면에 비친 소년의 얼굴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소년이 고개를 든 그때였다. 무언가에 밀쳐지는 힘에 소년은 힘없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소년을 밀친 것은 칼을 든 괴한이었다. 괴한은 칼끝을 목에 들이밀고 윽박을 질러댔다.


“가진 물건 다 내놔!”


외견상 부랑자 차림에 힘없는 노인인지라 얕잡아 본 모양이었다. 위협하는 괴한을 가볍게 물리치려는데 그때 나타난 건 갈색머리 소년과 흑발의 소녀였다. 그들은 가볍게 괴한을 물리친 뒤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노인, 괜찮으십니까?”
“어, 어. 괜찮단다.”


소년은 갈색머리 소년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이게! 한방도 안되는 게 힘없는 할아버지한테 칼을 내밀어?”


흑발의 소녀는 이미 기절한 괴한을 마음껏 걷어차고 있었다.


“이제 됐어. 그만 해.”
“하지만! 이 녀석은 할아버지를 위협해서 갈취를 하려했던 자식이라고! 이런 자식은 맞아도 싸!”
“리아.”
“……알았어.”


갈색머리 소년과 흑발의 소녀가 나란히 서서는 자기들을 에크낫시서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제국을 돌아다니며 평민을 위해 귀족을 무찌르고 있어요! 어때요, 할아버지? 저희 굉장하죠?”
“물론 곤란한 사람을 돕는 것도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 어린 나이에 훌륭한 일을 하는구나.”


소년은 미소 지었다. 하지만 소년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신분은 관계없다. 인간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족속들이다.


가령 100명의 인간이 있다고 치자. 그곳에서 한 사람이 곧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 그 병은 전염성이 강해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닿기만 하는 것으로 옮아버린다. 그렇게 단 하루 만에 병에 걸린 사람은 50명으로 불어났다.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고 죽음의 그림자가 뚜렷해졌다. 그것을 남은 50명이 확인했을 때 그들이 취할 행동은 간단하다. 감염된 사람들을 모두 가두는 것이다. 여기서 격리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건강한 50명에게는 생존을, 감염된 50명에게는 죽음을. 건강한 인간은 살기위해 병든 인간을 격리할 수밖에 없고 격리된 인간들은 속절없이 죽음이 맞이할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중요한 문제는 여기서 태어난다. 건강한 50명이 감염된 50명을 격리할 때 무언가 기준을 둘까? 그렇지 않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신분이 높든 낮든, 키가 작든 크든, 남녀노소구분 없이 모두 철창에 가둬버린다. 살아생전 죄라고는 단 한 번도 지어본 적이 없는 청렴결백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건강한 50명에게 있어서 그런 요소는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들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 단 하나뿐이다. 이 이야기에서 건강한 인간은 소년이었고 병든 인간은 인류였다. 인류는 하나의 집합체이며 개개인으로 무언가를 따지지 않는다. 인류는 그저 인류일 뿐이고 그 자체가 소년이 배척할 대상이었다. 그런데 귀족을 무찌르고 평민을 구한다라?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아버지, 또 저런 자식 만나면 주먹으로 한대 때려줘요. 부담 말구요. 그래야 정신 차리는 녀석들이니까. 알았죠?”
“그래, 충고 고맙구나.”
“노인, 몸조리 잘 하십시오.”
“그럼 안녕! 잘 있어요!”
“너희들도 잘 가거라.”


흔들던 손을 내리고 바지의 먼지를 털어내며 소년은 생각했다. 그들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텔레포트로 마을에 도착해서는 건물 뒤에 숨어서 이니티 전역에 마법진을 형성했다. 몇 년 전 자그마한 마법진밖에 형성할 수 없었던 때와는 달리 손바닥을 바닥에 내려치는 것으로 작은 마을 규모의 마법진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소년은 성장해 있었다. 마을 전체에 마법진을 형성했기 때문에 의식이 실행되면 제물은 그 마을 주민이 된다. 마을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의식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 소년의 인간으로서의 연민은 이미 닳아 없어질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다. 소년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성공을 향한 열망뿐이었다. 특히 이번에는 불특정 다수에게 행하는 의식이기에 전번과는 달리 성공을 점쳐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의식은 다시 실패하였다. 체내의 마력의 증가를 느끼지 못한 소년은 의식을 중단하고 마을로 들어가 보았다. 이상하게도 마을에는 주민이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괴한에게 습격을 당한 것도, 그렇다고 집단으로 여행을 떠난 모습도 아니었다. 소년의 눈으로 직접 주민들의 존재 유무를 확인한 것이 불과 1분 전이었다. 그 사이에 마을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라지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의아함을 떠안고 동굴로 돌아왔다. 동굴은 소년이 마법으로 재구축한 공간으로, 앨딤 산 정상부근에 있었다. 2, 3년 전쯤, 인간들과 섞여서 사는 생활에 진저리를 느낀 소년은 자신만의 은둔처를 원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 바로 이 동굴이었다. 긴 터널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선 소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곳에는 이니티 주민들이 기절한 채로 동굴 지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의식 마법의 불발로 주민들이 전부 동굴로 텔레포트를 한 모양이었다. 소년은 그곳에서 다시 한 번 의식을 치르기로 했다. 그 동굴은 깊은 산속,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을 치루는 데는 제격이었다.


마법진이 눈 녹듯 사라지고, 의식을 마무리하고 나자 전에는 없던 마력이 몸속에서 미친 듯이 뛰놀고 있었다. 이렇게 커다란 마력을 소년은 여태껏 느낀 적이 없었다. 지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세상을 손에 넣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 여겨졌다. 소년은 바닥에 누워있는 몇 사람을 골라 그들의 숨이 붙어있는 지 확인하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온기를 잃은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들을 밟고 일어선 소년의 입가가 히죽 비틀어 올라갔다. 드디어 성공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초월자가 되는 데는 실패했지만 소년은 그만큼의 강대한 힘을 얻게 되었다. 그때를 계기로 소년은 더 이상 늙지 않게 되었다.


동굴을 나와서는 어떻게 엑시스를 부술까 생각하였다.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모른 채 그들을 구하려 하는 엑시스는 영원히 재기할 수 없게 천천히 그리고 완벽하게 망가트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무척 신뢰하는 듯 보였다. 눈빛을 교환하는 것만으로 그들은 서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괴한을 쓰러트릴 때 그들의 모습에서는 서로에게 묶인 끊어지지 않는 신뢰의 실마저 보였다. 그렇다면 그렇게 믿고 있는 동료에게 배신당한다면 그들이 느낄 절망감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그것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절망하는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무엇보다 기대되었다. 그들에게 배반감을 느끼게 하려면 그들의 동료를 연기하는 배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이 음계를 꾀하는 소년이 직접 나서는 게 순리이다.


하지만 한때라도 그들의 동료가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신뢰감을 얻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 된다. 안타깝게도 소년에게는 인간들 사이에 둘러싸여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의 동료를 연기할 만큼의 인내심이 없었다. 거기서 생각한 것이 바로 인격이었다. 소년, 그 자신의 뇌에 새로운 인격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소년은 그들의 틈에 파고들 수 있고, 제삼자의 시선에서 그들의 동료놀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소년은 마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었다. 체형과 인상이 바뀌고 나니 그곳에 소년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새로운 인격을 형성한 뒤 그 인격에게 지금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란 것을 인식시켰다. 그것이 어린 키챤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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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14 19:19 | 조회 : 1,355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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