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1995년 06월 11일(16) 결론을 내리다



“꼬맹이 자식이 돈은 꽤 많이 가지고 다니던데? 언제쯤 빼앗을까?”
“그것보다 지금은 녀석을 노예상인에게 팔아먹을 생각만 하면 돼. 사내자식이 꽤 예쁘장하게 생겼으니 값이 꽤 나갈 거야.”
“맞아. 요즘 그런 소년노예가 귀부인들에게 인기라던데?”
“하하하! 뚱뚱한 아줌마들한테 귀여움 받겠네?”
“정말 구역질이 날만큼 부럽다! 캬하하하!”
“그 꼬마, 딱 보기에는 거지같아도 옷차림은 번드르르 했어. 어디 귀한 집안의 버려진 자식이겠지. 필시 그 꼬마가 들고 있던 책도 값이 나갈 듯 보여.”
“그럼 오늘 완전 봉 잡은 거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년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소년은 처음부터 그들을 신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인간인 이상 소년과 그들 사이에 긍정적인 관계는 생겨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소년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그때까지 소년이 갈팡질팡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공격 마법을 연습하면서 자신이 이것을 왜 하고 있는지 계속 고찰하고 있었다. 만약 카이덴의 아버지가 사기꾼에게 속지 않는 것을 시작으로 상황이 계속해서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더라도 결국은 지금에 도달할 것이다. 인간은 결국 악이라는, 소년이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다만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낸 불행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부터는 좋은 일만 가득할 수도 있다. 가족의 품에 안겨 있었을 때처럼 다시금 행복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익히려는 공격 마법은 필요 없지 않을까. 어딘가에 숨어서 언제 덮칠지 모를 악의 존재에 불안해할 것 없지 않을까. 그조차도 내 공상인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자꾸 지금의 연습이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져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연습을 다 마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 없어졌다. 마음의 동요는 모두 떠났다. 소년이 지금까지 겪은 일은 결코 우연도 뭣도 아니었다. 그리고 소년의 앞길 또한 재앙의 연속일 것이다. 이 세상에 그들이 존재하는 이상 그것은 정해진 운명이다.


소년은 망설이지 않고 뒤돌아 계단을 내달려 올랐다. 하지만 마음만 앞선 탓에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무슨 소리인지 확인하러 온 사람이 소년을 발견했다.


“꼬마한테 들켰어!”
“어서 붙잡아!”
“히익…!”


소년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방의 문을 열고 책을 한 팔의 끼었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거기서 작은 창을 보았다. 거기에는 푸른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소년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보았다. 2층이라지만 이 근방에 널려있는 나무들 보다는 높았다. 등 뒤로 무수한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저승사자가 타고 있는 말의 말발굽 소리처럼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다간 그들에게 목덜미를 잡히고 말 것이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창틀에 발을 걸친 소년은 그대로 하늘에 몸을 던졌다. 부유감을 느낀 것도 잠시, 곧바로 땅바닥이 눈앞에 닥쳐왔다. 뭐라 말 못할 고통이 소년의 몸을 덮쳤다. 소리 없는 신음을 내지르면서도 소년은 발이 당장 설 수 있는 상태인지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도 뼈는 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년은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 다시 그들이 덮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한걸음씩 옮길 때마다 발의 근육이 촘촘히 가시가 박힌 가죽을 둘러싸고 있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소년의 입을 막았다. 소년은 죽어라 고함을 질렀지만 입을 막은 악력이 소리를 뭉갰다. 두꺼운 팔뚝이 소년의 배를 꽉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이쿠! 발버둥 치지 마. 서로의 힘만 뺄 뿐이야. 완만하게 해결하자고.”


뒤에서 소년을 동료라 부르던 목소리가 속삭였다.


“다들 이리 와. 내가 꼬마 녀석을 잡았다고!”
“오! 잘했어!”


목소리를 듣고 소년의 곁으로 다가온 건 숲에서 소년에게 접근했던 리더 격의 남자였다.


“그러게 얌전히 있지 그랬어. 그랬으면 이런 과격한 대우 받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안 그래, 꼬마야?”


빨개진 얼굴로 눈을 부릅뜬 소년을 남자는 진심으로 불쌍하게 여긴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응?”


그때 검은 그림자가 남자의 목을 슥 훑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남자는 피를 흩뿌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 뒤로 다른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숲에서 소년과 통성명을 한, 막 쓰러진 남자의 동료였다.


“히히, 꼴좋다.”


남자는 피 묻은 단검을 옷자락에 아무렇게나 닦고는 쓰러진 남자에게 침을 뱉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매일 부려먹고 말이야. 리더가 무슨 왕인 줄 알아? 무엇보다 이 녀석 여태까지 내 이름을 한 번도 제대로 부른 적이 없다고! 너무 빨리 끝나서 분이 안 풀리네. 죽어! 죽어! 죽어버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쓰러진 남자를 걷어찬 남자는 아직도 뭔가 부족한 얼굴로 숨을 내뱉으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뭐야, 그 얼굴은? 사람이 죽는 거 처음 보냐?”


아니었다. 죽음 자체로는 소년에게 큰 감흥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 보다 더 충격인 것은 남자가 죽인 것이 그의 동료라는 데 있었다. 소년은 그렇다 쳐도 그들은 동료라는 이름으로 뭉친 조직이 아니었나. 소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동료’의 사전적 의미가 과연 이 바깥 세계에서 통용되는 의미와 일치한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남자가 시체를 걷어찰수록 그 괴리감은 소리를 내며 틈을 벌려갔다.


“어이, 뭘 할 거면 빨리 끝내줘. 꼬마를 붙들고 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알았어, 알았어. 어디 보자……. 뭘 숨기고 있을라나?”


남자는 소년의 품속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차가운 손이 피부에 닿자 소년이 움찔 했다. 소년은 마치 다리가 여러 개 달린 벌레들이 온몸을 기어 다니는 느낌을 받았다. 기분 나쁜 그것들을 다 떨쳐내고 싶었지만 두꺼운 팔 때문에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소년은 자신이 시체의 뱃속에 손을 집어넣어 내장을 뺐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역전된 것 같았다. 아무런 저항도 불가한, 그것이 악의라 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시체. 고동이 멎고 수명이 다한 육체는 물건과 다를 바 없다. 다만 고체가 되는 것이다. 죽는다는 건 그런 것일 터이다.


“오! 뭐지? 이 딱딱한 건?”


순간 소년은 서슬 퍼런 칼날이 심장을 도려내는 느낌을 받았다. 그 감각과 시체에서 심장을 드러냈을 때의 광경이 겹쳐 보였다. 확실히, 시체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소년은 시체가 아니었다. 죽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살기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 익힌 마법이었다. 소년을 지키기 위해 다가서는 무언가를 죽이는 무기로서.


남자가 소년의 품에서 손을 빼내려는 찰나였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공기를 울리는 폭발음이 터지더니 그 일대가 연기로 휩싸였다. 연기를 빠져나온 소년은 밤거리를 유유히 걸어 나갔다. 소년은 자신이 오른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과연 맞는 길인지도 소년은 몰랐다. 하지만 소년의 시선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다. 그것들은 소년의 눈빛을 흐리게 하지는 못했다. 이제 소년에게 의미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소년에게 여러 갈래로 나뉜 길은 그 자체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갖지 않았다. 소년은 망설이지 않았고 더 이상 떨지 않았다. 어느 길로 가든 그거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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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13 21:27 | 조회 : 1,334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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