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1995년 06월 11일(14) 타오르는 불길에 자신을 던지다



숲을 빠져나오자 익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소년은 재차 뒤를 돌아봐, 자신이 원한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확인했다. 눈은 그것을 자신의 집이라고 주장했지만 머리가 따라오지 못했다. 그것은 살점이 다 뜯겨지고 남은 포식자의 흔적이었다. 일말의 살덩이도 다 먹어 치우겠다는 듯 그들의 입속에서 발라진 뼈다귀는 그곳에 버려져 간신히 형태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찬바람이 지나가도 이미 식은 지 오래…… 더 이상 추위에 몸을 떨 일도, 따뜻해지기만을 기다리는 일도 없었다. 뜨거운 날숨을 내뱉으며 초라하게 식어가는 그것의 임종을 지켜본 것은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보름달뿐이었다.


소년은 이미 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새카맣게 타버린 판자때기를 밀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의 내부는 새어드는 달빛으로 구조물의 윤곽이 간신히 보이는 정도였다. 기억에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발치에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어 소년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몸을 누인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다. 처음 누더기인가 뭔가로 생각했던 소년은 질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기를 잠깐, 소년은 심호흡을 하고서는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안주머니는 겉옷 깊숙한 곳에 있어 딱히 무언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지만 열쇠를 꺼낼 때까지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리고는 벽을 의지하여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버지의 서재로 향했다.


유독 탄내가 심한 서재는 부서진 나무파편들과 종이가 타면서 남긴 잿더미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책장에 빼곡히 꽂힌 책들은 일면이 온통 검정이어서 뭐가 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소년은 날카로운 파편에 찔리지 않게 조심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쓰러진 책장 밑에서 금고를 꺼내 열쇠를 사용했다. 금고 안에는 표지에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책이 있었다. 그것을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며 확인한다. 이전 아버지가 성인이 되면 주겠다던 그 책이 틀림없었다.


소년은 침을 꼴깍 삼켰다. 책을 쥔 손에는 어느새 축축한 땀이 배어 있었다. 아까는 이 책에 지금 상황을 해결해줄 돌파구가 있을 거라고 했지만, 내심은 낭떠러지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자신을 세뇌하듯이 소년은 손에 든 책 한 권에 집념에 닮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라는 존재가 격동하는 기세에 휩쓸려 아무 것도 못하는 사이에 심연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년은 신께 기도를 올리는 모습으로 책을 들고 표지를 열었다. 그때 작게 접힌 쪽지가 팔랑이며 떨어졌다. 소년은 그것을 펼쳐보았다.



아들아! 성인이 된 걸 축하한다. 이 책은 수만 가지의 주문이 적혀있는 마도서란다. 네가 한참 어릴 적에 나는 네가 검사가 되기를 바라서 단검을 선물해주었지만 네가 학자가 되는 걸 꿈꾸고 있으니 더는 내 희망을 강요하지 않겠다. 이 책으로 훌륭한 마법 학자가 되기를 바란다.
너를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네 아버지, 카이덴 알로크가.



“아, …아아…….”


아버지의 이름에 눈물 두세 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애써 참고 있던 슬픔이 오열과 함께 터져 나왔다. 뼈만 남은 집을 봤을 때만 해도 참을 만 했다. 쓰러진 아버지 품에 손을 넣었을 때도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긴 쪽지를 보는 순간 모든 결심은 산산이 무너졌다. 그러자 더는 참을 필요 없다는 듯이 소년이 보이지 않는 곳에 모아 두었던 갖가지 감정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감정들은 지진과도 같은 정신의 강렬한 흔들림을 가져다주는 탓에 무너지지 않게 잘 쌓아두고 있었다. 하지만 무너지기 시작한 이상 이제 멈출 수 없었다. 어째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검을 준 건지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검을 좋아하고 찾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혐오하고 기피했다. 불우한 아버지의 과거를 익히 들어온 소년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소년에게 검사가 되기를 권했던 것은 단순히 아들이 자신의 길과는 다른 길을 걷게 하고 싶다는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는 자신의 길과 같은 곳에 선 아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소년이 본 아버지는 수많은 관중의 환호의 열기 속에서 당차게 걸어갔다. 하지만 아버지 당신은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위에서 돌아가지도 못한 채 몸을 떨며 끝이 없는 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엇갈리는 광경, 둘 사이의 극명한 온도차는 아버지에게 죄책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죄책감보다는 소년의 꿈을 우선시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쪽지를 남김으로써 미래를 기약했다. 그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향하는 공포와 죄책감을 전부 받아들인 뒤에 내린 결정……. 거기서 뚜렷한 결의를 엿본 소년은 다시금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다. 다른 이들에겐 어떨지 몰라도 소년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훌륭한 위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악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누나도, 마을 주민들도, 눈에 보이는 모두가 악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소년은 밤거리를 달렸을 때처럼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고찰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목한 가정이었다. 더할 것 없는 행복이 그곳에 있었고 이 따스함이 영원할 것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었다. 그런 그들에게 이런 결말이 찾아올 줄 누가 예상이나 했으랴. 소년은 만약의 일을 상상해 보았다. 카이덴의 부모가 사기꾼에게 속지 않고, 그들로부터 카이덴이 부족하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고, 가족이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고, 그래서 카이덴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필요가 없었더라면. 그렇다면 가정의 평화가 영원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말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과정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결국은 불행한 결말을 맺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래부터 악이니까. 아무리 상황이 달라진다 할지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네발짐승이 잠깐 두발로 섰다고 해서 인간이라고는 부를 수 없듯이 말이다.


소년은 소매로 마른 눈물 자국을 닦고 책장을 넘겨보았다. 아버지가 남긴 쪽지대로 그 책에는 소년의 상상을 초월하는 갖가지 마법이 고대어로 쓰여 있었다. 이것이 정말 필요할까 의문을 갖게 하는 마법부터 굉장한 위력을 품고 있는 마법까지 두루 갖춰 있는 그 책에는 마력이 소모되는 정도를 순으로 각 항목마다 주문과 발동방법이 세세하게 적혀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은 들고 있는 것만으로 마력 량과 마법 강도를 증폭시켜준다고 했다. 하지만 직접 느낄 수 있는 변화가 없어서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시험 삼아 소년은 책을 덮어 한 손에 쥐고 남은 한 손을 다친 무릎에 댔다. 그리고 숙지하고 있던 치료 마법――힐링의 주문을 외었다. 손에서 시작된 푸른빛은 무릎에 옮겨 붙어 망가진 피부조직을 수복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이 다 끝나기도 전에 소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원래 소년은 힐링을 쓰면 가진 마력의 대부분을 사용하는 탓에 거의 하루 동안은 다른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힐링뿐만 아니라 다른 초중 급 마법의 사용도 소년에게는 큰 제약이었는데 그것은 소년의 마력을 담는 그릇이 그렇게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도 더 강력한 마법을 몇 번이라도 더 쓸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없는 자신의 신체와 기운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이 마도서의 힘은 두말 할 것도 없는 진짜인 것이다.


이 마도서만 있으면 소년은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지키기만 하랴, 자신을 해치려는 악을 능히 쓰러트릴 수도 있었다. 이 책은 말하자면 힘의 구현화였다. 자신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어 이상을 실현하는 무자비의 폭력. 평생 노력으로도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 접했다고 확신한 순간 여태껏 머물던 공포는 순식간에 증발했다. 서늘한 공포를 태운 것은 가슴 속 깊은 심연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꽃이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그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기에 소년은 너무 어렸다. 하지만 자신의 행복을 파괴한 대상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소년의 미숙함은 오히려 그것을 키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다. 어리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흡수한다. 순백의 종이는 그대로 두면 희게도, 검게 칠하면 검게도 된다. 그렇듯 소년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자신을 지배하게 두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상황에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이를 거듭한 뒤에야 태어나는 가능성이었다. 어린 소년은 다만 받아들일 밖에 다른 방도를 몰랐던 것이다. 자신을 땔감으로 던진 소년은 이윽고 활활 타오르는 증오의 불길에 집어삼켜졌다.


물론 소년의 논리대로라면 소년 그 자신도 악이며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소년이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어찌 됐든 소년은 힘을 얻었고 공포를 증오로 바꾸었다. 이것이면 가능하다, 책을 덮으며 소년은 생각했다. 책장을 넘기기 전까지 품고 있었던 불안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소년은 금고에서 금화가 한 움큼 정도 들어있는 주머니를 품에 넣고 책을 한쪽 팔에 단단히 꼈다. 저택을 나서며 소년은 강하게 결심했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행복을 처참히 무너트린 인간들에게로의 복수를.


그것은 소년이 겨우 5살이었던, 1970년 11월 24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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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13 14:14 | 조회 : 1,325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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