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1995년 06월 11일(13) 악의 존재를 깨닫다



세 든 가정집에 도착한 소년은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년은 어머니를 어떤 식으로 놀라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소년이 문고리를 잡는 순간 집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몇 달이나 집세가 밀린 줄 알고 있어? 돈을 내놓지 않을 생각이면 당장 나가라고!”


신경질적으로 몰아세우는 목소리는 주인 아주머니의 것이었다. 다음으로 들리는 것은 다 죽어갈 듯 가녀린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제발…… 그러지 말고 먹을 것 좀 주세요…….”
“먹을 거는 무슨…. 집세나 내고 말해!”


소년은 문고리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목소리가 그것을 막았다.


“저한테 아이가 있어요! 맨날 밖에 싸돌아다니는 쓸모없는 아이긴 해도 생긴 건 예쁘장해요. 보셔서 아시잖아요. 노예시장에 팔면 여태껏 밀린 집세를 다 내고도 남을 거예요. 그러니 우선 먹을 것부터…….”
“아이를 판다고? 그 아이가 당신의 말을 들어줄 거라는 보장이라도 있는 거야?”
“그 아이는 착하고 순수한 아이예요. 그리고 부모의 말을 참 잘 듣는 아이이기도 하죠. 게다가 저는 그 아이에게 큰 부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부탁이라고 해봤자 용변을 보러 다닐 때 몸을 부축해 준 것, 멀리 있는 물건을 가져와 준 것, 남편에게 말을 전해 준 것 등, 하나같이 사소한 것들뿐이에요. 그 아이는 어쩌면 내가 큰 부탁을 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러니 내가 일생일대의 부탁이라고 하면 그 아이는 틀림없이 들어줄 거예요.”
“그래? 좋아, 음식을 내줄테니 내일 당장이라도 밀린 집세를 가져오도록 해. 안 그러면 당신을 노예로 팔아먹을 테니까. 알아들었어?”
“고마워요……. 고마워요…….”


소년의 손에서 금화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무슨 소리가 났나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살가죽이 말라붙어 광대가 도드라진 여자였다.


“……얘… 야……?”


소년의 표정을 본 여자는 순간 얼어붙어 표정이 경직되었다. 굳은 근육과, 피부 사이에 가뭄이 온 듯 갈라진 메마른 주름이 삐걱대며 간신히 만든 것은 언뜻 절규하는 것처럼 보이는 불완전한 미소였다.


“혹시 안에서 이 어미가 하는 얘기 들었니? 들었다면 다 잊으렴. 나이 먹은 사람끼리 나누는 실없는 농담일 뿐이란다. ……그런데 이 돈은 다 뭐니?”


여자의 손이 금화를 쥐어 드는 순간 소년은 잽싸게 그것을 채갔다.


“그 돈은 어디서 났니? 너, 그 옷하고 손…… 설마 사람을 해친 거니? 오, 신이시여…! 네가 끔찍한 죄를 저질렀구나! 매일 같이 밖에 나돌아 다니더니 언젠간 이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 이 어미가 그렇게 가르치든?! 그건 강도질해서 얻은 돈이야. 네가 가져선 안 되는 물건이란다. 그러니 이리 내렴. 그 돈은 어른인 이 어미가 보관할 테니까, 고집 부리지 말고 어서!”


여자는 소년이 갈취한 것보다도 돈을 더 중요시하는 눈치였다. 물론 돈은 갈취한 게 아니고 근로의 대가로 받은 보수였다. 그 돈은 오직 어머니를 위해 고생해서 번 돈이었고 눈앞의 여자는 자신이 소년의 어머니인 것을 강조하며 돈을 건넬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돈을 여자에게 건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소년의 목적과 부합하는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여자와, 손에 쥔 돈의 그 어떤 연관성도 찾지 못했다. 비틀어진 톱니바퀴처럼 자신과 여자의 관계도 더 이상 성립하지 않음을 알았다. 눈앞의 이 사람은 자신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타인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소년은 여자의 얼굴이 점점 괴상망측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인간으로 둔갑한 이형의 생물처럼 흉측한 본모습을 드러내는 그것은 처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얘야, 어디 가니?”


그것의 목소리는 마치 파리지옥이 뿌리는 유인 냄새처럼 속에 내포한 달콤함으로 소년을 끌어당기려 했다. 거기에 홀려 안에 발을 디디기라도 하면 그 즉시 문은 닫혀 버리고 흘러드는 산과 용해액에 꼼짝도 못한 채 그들의 한줌 영양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집안에서 들린 그들의 대화는 소년이 자신에게 이로운 판단을 하게 했다.


“얘야, 돌아오렴! 얘야!”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밤거리를 달리며 소년은 생각한다. 누가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악인가. 최초를 따지자면 아버지가 고대 도서를 도용하여 부와 재산을 쌓고 유명해진 것이 발단이었다. 아니, 시초는 카이덴의 아버지를 속인 사기꾼이었다. 거기서부터 일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아버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비밀을 들은 지인이 배신함으로서 아버지는 몰락했다. 실질적으로 집에 불을 지른 누군가에 의해 가족은 파멸했다. 소년을 버린 어머니도 악이었고, 어머니를 악으로 만든 집주인 아주머니도 악이었다. 누나를 죽인 괴물들은 물론, 멋대로 소년의 곁을 떠난 누나조차도 악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아버지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한 전 세계 사람들도 죄다 악이었다.


소년이 모르고 있었을 뿐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사람들이 아니,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섬뜩한 이빨을 가진 무언가로 느껴졌다. 그들은 전 세계에 골고루 분포되어 서식하고 있다. 어디선가 몸을 숨긴 그들이 언제 소년을 잡아먹을까 하고 눈을 빛내며 군침을 흘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소년은 그들의 존재에 공포했으며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그들의 난폭한 이빨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지금의 소년은 자신을 지킬만한 힘이 없는 벌거숭이나 다름없었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어둠에 별빛 하나 없이 떠 있는 보름달이 마치 신경질적인 외눈박이의 눈동자처럼 매섭게 희번덕거리며 소년의 뒤를 쫓았다. 고요한 거리 위에 몸을 숨긴 까마귀들이 음산한 목소리로 울어 댔다. 소년은 언제 어디서 죽음의 위협이 자신을 덮칠지 모른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숨을 헐떡이면서도 죽을 기세로 뛰었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뎌 땅을 구른 소년은 뺨과 손바닥에 생채기가 나고 무릎이 까져 피가 흘렀다. 자신은 어째서 이리도 약한 것일까. 넘어져 무릎을 움켜쥔 채로 소년은 절망했다. 자신의 존재의의는 그저 괴물의 먹잇감일 뿐이었나. 괴물에게 잡아먹혀 배를 불리는…… 다만 그것을 위해 태어났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소년에게는 꿈이 있었고,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게다가 소년은 아직 성인이 되지도 않았다. 가능성의 폭과 활동의 영역이 확장되는 성인이 되면 지금과는 보이는 광경이 180도 달라질 것이다. 성인이 되는 것, 그것도 소년이 품은 꿈 중의 하나였다. 수많은 배움과 경험을 거치면서 해를 거듭해, 법적으로 성인으로 인정받는 나이가 되어 육체와 정신이 성장한 모습으로 아버지와 나란히 서보고 싶었다. 그래, 맞다. 아버지는 소년이 성인이 되면 건네줄 게 있다고 했었다. 정확히 얼마 전이었을까.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렇게 오래지 않은 과거일 것이다. 아버지는 밖에서 누나와 놀고 있던 소년을 안으로 부르더니 서재 금고에서 두꺼운 책 한권을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성인이 되면 네게 이것을 주겠다.”


소년은 누나와 한창 술래잡기를 한 터라 달아오른 얼굴이었다. 어린 아이라면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은 것에 대해 싫증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소년은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가 소년에게 책을 선물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대번에 흥미가 그쪽으로 쏠렸다.


“무슨 책인가요?”
“이 책은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마도서란다. 이 책에는 들고 있기만 해도 마력의 양과 마법의 강도가 동시에 증가하는 신기한 힘이 깃들어 있지.”


이것을 성인이 된 너에게 주겠다며, 아버지는 그것을 다시 원래 있던 곳에 넣었다. 금고의 열쇠를 품에 넣은 아버지가 이제는 가서 놀아도 된다고 한 이후에도 소년은 의아해하고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소년이 검을 배우기를 바라고 있었다. 작년 소년의 생일에 소년이 그토록 바란 책이 아닌 검을 줄 정도로 아버지는 소년이 학자를 꿈꾸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소년이 서재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시킬 만큼 극단에 치우치진 않았지만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아가는 소년을 보는 아버지는 마치 작은 바람에도 날아가 버리는 민들레의 씨앗처럼 언젠가는 자신의 곁을 떠날 아련한 것을 보는 듯 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갑자기 마도서를 주겠다니……. 그것도 황제 폐하께 받은 귀중한 마도서를 말이다. 소년은 아버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말을 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의 저편으로 묻힌 채 지금에 이르렀다. 과거를 돌이키면서도 여전히 소년은 아버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알아낸 것이 있었다. 아버지가 성인이 되면 주겠다고 약속했던 책……. 그 책에 이 절망스러운 상황을 돌파할 단서가 있을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었지만 분명 그럴 것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땅을 짚고 일어선 소년은 다친 발을 절뚝이며 어둠 속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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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13 11:10 | 조회 : 1,386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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