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보글보글 무언가 끓는 소리가 흐릿한 의식을 사로잡았다. 아, 여긴 대체 어딜까? 춥지 않고, 따뜻해.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현재 자신의 몸상태는 손가락 하나 겨우 까딱일 정도로 최악이라는 것을 깨달은 소년이 대신 열리지 않으려는 무거운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이내 소년의 바람대로 어두웠던 시야가 조금씩 밝아졌고 눈부신 천장의 불빛에 눈이 따가워 잠시 몇번 눈을 깜빡이자 서서히 초점이 잡혔다.


여긴 어디일까? 고개를 돌리기 어려워 벽안의 눈동자만을 데구르 굴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소년이 누워있는 푹신한 소파와 탁자, 장식장, 텔레비전 들이 보였다. 흔히 볼 수 있는 거실의 모습이였다. 그렇다면 이곳은 누군가의 집이란 말이 되는데, 대체 누가 자신을 데려온 것인지 의문에 휩싸인 소년이 시선을 돌리다 순간 자신의 몸을 덮고있는 크고 보드라운 담요를 발견했다.


자신이 예상하던 '누군가'의 집에 붙들려 온 것이라고 생각했던 소년의 눈동자에서 푸른 바다가 크게 요동쳤다. 소년의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였다.


'그럼 대체 누가……?'


불안한 것인지 색이 빠져 창백한 입술을 질끈 깨문채 무거운 몸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던 소년이 행동을 일순 멈춘 것은 욱신거리는 몸을 상체까지 일으켰을 때였다.


저벅 저벅.


누군가가 소년이 있는 거실로 걸어오는 소리가 소리에 예민한 소년의 큰 삼각형 귀에 들려왔다. 흠칫 놀란 소년이 얼음처럼 굳어버린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이내 다음 순간, 거실을 가로막는 벽에서부터 검은 누군가의 현상이 드러났다.


"……어라? 없네."


조그만 쟁반을 두 손에 들고 거실로 들어온 이는 다름아닌 쓰러져있던 소년을 발견해 데려왔던 남자였다. 잠깐 부엌에 다녀온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진 소년의 흔적을 보고 곤란하다는듯 검은 머리를 긁적인 그가 쟁반을 탁자 위에 살짝 내려놓았다.


"흐음-. 어디로 갔으려나."


잠시 거실을 한번 주욱 흩어본 그가 마치 어린애와 놀아줄 시간따윈 없다는듯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소년이 있을 장소로 추측되는 곳으로 걸어나갔다. 저벅저벅하고 그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질때마다 숨죽인 소년의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렸다.


"아, 여기 있네."
"히익……!"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다름아닌 벽과 소파 사이에 생긴 작은 공간이였다. 그리고 그 곳에, 소년이 숨어있었다. 움직이지 않으려는 몸을 이끌어 그나마 잘 숨었다고 생각한 소년의 노력을 처참히 깨버리듯 너무나도 쉽게 소년을 찾아낸 무심한 그의 모습에 소년이 경계태세를 취하였다.


삼각형의 귀를 바짝 붙이고 온 몸의 털을 모두 곧두세운채로 심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리듯 새하얀 꼬리로 바닥을 탁! 탁! 쳐댔다.


인상을 찌푸린, 그러나 겁에 질린 눈으로 자꾸만 더 깊은 곳으로 숨으려는 소년의 모습을 아무 반응없이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더 깊은 곳으로 숨다가는 영락없이 먼지투성이가 되버릴 것이란 생각에 소년을 꺼내기 위해 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에 화들짝 놀란 소년이 송곳니를 들어낸 채로 "하-악!"소리를 낸다. 아직 미성숙하다곤 하나, 의외로 아파보이는 뾰족한 송곳니였다.



그런 소년의 경계 어린 모습에 잠시 한숨을 내쉰 그가 고개를 들어 소년과 시선을 맞추었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블랙홀같은 무심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떽."




딸꾹.




순간적이지만 생애 처음 느껴보는 무거운 카리스마가 소년을 압도적으로 짓눌렀다. 그 딴에는 말 안듣는 어린애를 가볍게 호통치는 수준이라 생각했겠지만 의외로 소년은 많이 놀랐던 건지 찌푸렸던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만 숨고 나와서 죽이라도 먹어."




소파 사이에서 소년을 두 손으로 꺼내며 그가 한 말이였다. 죽? 죽이라니? 나한테? 왜? 온갖 의문이 들어 두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있는 소년을 그가 다시 소파 위에 앉혔다. 바닥에 널부러진 담요를 주워들은 그가 소년에게 다시 담요를 덮어주려다가 담요가 축축해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만 두었다.




"잠시만 기다려봐. 새 걸로 가져올테니."




마치 방금전처럼 또다시 도망가지 말라는듯. 다시금 소년을 두고 거실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뽀송뽀송한 새 담요를 들고 그가 돌아왔다. 그가 소년에게 새 담요를 둘러주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죽 그릇을 앞에 내미는 순간까지도 소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죽, 식는다."




갓 세탁한듯 뽀송뽀송한 담요에서 기분 좋은 햇살 냄새가 났다.




"안 먹어?"




어느새 그가 탁자 옆 또다른 소파에 앉아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한 흑안에 소년의 모습이 그대로 투과되어 비춰졌다. 대답이나 반응을 기다린다는 듯 그가 턱을 괴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조심스레 소년이 말문을 열었다. 어느새 핏기가 돌아와 앵두같은 작은 입술을 달싹이며 흘러나온 목소리는 아직 어린 남자아이라곤 해도 얼굴만큼이나 무척 고운 소리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의 박수를 보낸 뻔했다.




"……저를, 구해주신 거죠……?"




정말로 알수 없다는 투의 질문이였다. 마치 네 녀석이 나쁜 목적으로 나를 데려온 것이라면 지금 당장 네 놈의 복부를 후려갈기고 도망갈 것이다, 라는 뜻이 담긴 듯한 경계 어린 눈빛도 함께였다.




"아아, 그건 그냥. 여동생이랑 닮아서 두고 지나치기에는 양심이 너무 찔렸거든."

"여동생은 지금 어디 있는데요?"

"……이미 죽었어. 오래 전에."

"아……."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의 모습에 입을 앙 다문 소년이 시선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괜히 질문했다는 듯, 미안한 마음이 드는건지 그와 시선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고양이 족의 뾰족한 삼각형 귀가 힘없이 추욱 늘어졌다.




이젠 별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 대신 도리어 남의 일에 슬퍼하는 소년의 모습에 그가 피식 미소지었다.




"너, 이름은?"




소년이 힐긋 그를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색 눈동자가 고양이 답지 않게 선하고 순하게 빛났다. 그러나 아직 채 경계가 풀리지 않은 모습이였다.




"……유…."

"안 들리는데."

"…유. 천 유."




이번에는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에 비에 젖어 아직까지도 축축한 몸을 감싸듯 담요를 목까지 끌어당긴 소년, 유가 반짝이는 벚꽃빛 백발을 만지작거리다 그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응?"

"아저씨, 이름은?"




'아저씨'라는 익숙하지 않은 묘한 부름에 약간 충격을 받은 듯한 그가 그 부름에 악의는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내 충격에서 헤어나왔다.




그래도 짚고 넘어가야 할건 짚어야 했다.




"아저씨 아니야. 아직 젋다고."

"그럼?"

"하리안스."

"하리?…안……응?"

"하리안스. J. 그로시안."

"……뭔가 외국 이름 같아요."

"아쉽게도 외국인은 아니야. 혼혈이지."

"흐음~."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의 모습에 그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다른 어린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였다.




"편하게 '하르'라고 불러."




그의 짙은 검은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살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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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15 22:14 | 조회 : 1,755 목록
작가의 말
AR(에알)

드디어 오늘 오랜만에 필잡아서 하루종일 써내려갔습니다! 평소보다 꽤 분량이 많네요ㅎㅎㅎ(뿌듯)자, 그럼 과연 다음화는...(먼산을 바라본다)(역시 소설 2개 동시연재는 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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