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리타드의 집에서 우리는 몇번이나 했다. 리타드는 마치 내 몸에 있는 알렉스의 흔적이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마냥 혐오스러워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흔적들로 하나 둘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여기는? 그놈도 여기는 안했죠?"
"앗, 으흐.,, 뭐, 뭐하는거야.."


가뜩이나 민감한곳을 햝아대는 리타드에 민망함이 몰려왔다. 부끄러웠지만, 리타드의 얼굴을 보면 조금 괜찮아졌다. 리타드는 내 온몸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읏, 흐응, 읏,, 하아.. 좋아, 좋아..."
"좋아요?"
".. 응. 읏, 하앗, 흣."
"귀여워."


예전같은 하루가 계속되었다. 알렉스에게 잡혀가기 전의 나처럼. 기분은 늘 좋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불편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도망치기만 해봐. 진짜 가만안둬.>


알렉스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대로 영원히 알렉스가 찾지 못하는 곳으로 떠난다면, 그러면 그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알렉스가 찾을 수 없는 곳이라니, 그런 곳은 없을 것이다.


"유진, 무슨 생각해요?"
"아, 아무것도.."


리타드가 내게 커피를 한잔 내어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한모금씩 홀짝이며 리타드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리타드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며 물었다.


"이거 염색한거죠?"
"아, 응.."
"길츠만이 이런거죠?"
"...... 응. 어떻게 알았어?"
"그야 동양인들 사이에서 이런 색이 나오는건 흔한 일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저번엔 뿌리쪽이 까맸거든. 다시 염색했네요."


이 염색도 문신과 마찬가지로 알렉스가 새겨버린 낙인같은 거였다. 리타드는 이불을 덮은 채 커피를 홀짝이는 나를 갑자기 안고는 부비적거렸다.


"좋은 냄새나~"


살짝 어린아이 같은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 이제 알렉스는..?"
"... 길츠만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어?"
"그놈은 유진을 죽일듯이 괴롭혔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하고싶은대로 해요."
"아..."


알렉스를? 어떻게? 딱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알렉스는 날 죽일듯이 괴롭혔지만, 나를 내치지 않았고, 죽이지도 않았다. 간간히 따뜻하게 대해줄 때 - 알렉스가 기분이 좋을때만 이지만. 그것도 알렉스가 했기에 그렇지, 다른 사람이라면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거다. - 도 있었다.


"유진."
"응."
"솔직히 말하면 난 그놈을 가만 살려두기 싫어요. 유진을 괴롭혔으니까."
"......"
"유진은요.? 그놈을 살리고 싶어요?"
"...... 모르겠어."


정말이다. 알렉스를 생각하면 그가 무섭고, 두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날 내치지 않는 그가 좋았던 것 같다. 리타드는 다시 나를 안으며 말했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응.."


그러고보니 리타드는 참 나를 많이 위해준다. 난 아직 리타드에게 내 전부를 알려주지 못했는데.


"리타드."
"네?"
"... 넌 궁금하지 않아? 왜 내가 알렉스의 곁을 떠나지 않았는지.."
".. 그거야 그놈이 유진을 놓아주지 않았으니까, 아니에요?"
"아니, 알렉스는 한번도 날 붙잡은적이 없어. 그냥 내가 돌아간거야."
"네? 왜요?"


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이건 나에겐 너무 아픈 기억이었으니까. 몇년이 지나도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그런 끔찍한 기억이었으니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그러니까 알렉스가 날 억지로 염색시키고, 문신시킨지 얼마 안됬을 때 였어. 음.. 알렉스의 침실에서 강제로 당한 다음날 아침이었는데, 침대 옆에서 사진을 봤어."
"......"
"어떤 동양인 여자였는데, 그냥 본 순간 알았어. 이 사람이 내 어머니라는걸."
"... 어머니요?"
"응. 난 알렉스가 잠시 없는 틈을 타 알렉스의 돈을 훔치고,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어머니를 찾으러 갔지."
"어떻게.. 어떻게요?"
"사진이랑 어떤 문서랑 같이 있었는데, 그 근처로 잠시 여행을 왔나봐. 그래서 얼른 달려갔어."


나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말을 하다가 목이 매일 것 같아서.


"... 아버지 한테 맞는 순간에도, 학교에서 괴롭힘 당하던 순간에도, 알렉스가 날 괴롭히는 그, 그러니까 내가 힘들었던 순간순간마다 난 어머니를 떠올리며 참았어."
"......"
"내 상상속의 어머니는 늘 다정한 손길로 날 끌어안아주고, 따뜻한 목소리로 날 포근하게 해 주셨으니까. 그래서 언젠가는 꼭 찾으러 갈거라고 다짐했어. 한마디로 어머니는 내게 있어서 삶의 희망? 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빛이었지."
"...... 유진.."
"아무튼 난 며칠을 길바닥에서 해매며 어머니를 찾아해맸어. 그러다 어머니를 찾았지.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어."
"......"
"난 어머니에게 달려갔지. 어머니라고 소리치면서. 그녀에게 안겨보고 싶었어. 아니, 그냥 손만 잡아줘도 괜찮았어. 근데 어머니가 그러더라."


<누구세요?>


"!.. 유진..!"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어머니의 곁에는 그녀의 나이와 비슷해 보이는 남자랑 그 둘을 쏙 빼닮은 여자아이랑 남자아이가 하나씩 있었는데, 아마 어머니는 이미 나같은건 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찾았던거지."
"......"
"근데 그 때의 나는, 너무 힘들어서.. 그냥 주저앉았어. 내 모든게 부서져 버리는 것 같앆으니까. 난 어머니에게 거절당하고 거리를 떠돌아다녔지.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알렉스의 집앞이었어."
"......"
"문이... 문이 안열려서 그냥 앞에 쭈그려 앉아있었는데, 조금 지나니까 알렉스가 오더라. 처음엔 화가 난 것 처럼 보였어. 하긴, 내가 말도 안하고 돈도 훔치고 옷도 훔쳐서 달아났는데 화가 안날리가 없지."
"......"
"알렉스가 나한테 왜 돌아왔냐고 물어봤어. 돈이랑.. 옷이랑 훔쳐서... 어.. 어머니랑 같이 영원히 떠나버리지 그랬냐고 그랬지."


<... 갈 곳이 없어서... 어머니가.. 날..>
<그래서, 여기로 온거야?>
<응..>
<하, 유진. 잘들어.>
<..?>
<여기엔 니 발로 기어들어온거야, 알겠어? 난 분명히 널 찾지도 않았고, 붙잡지도 않았어.>


"... 사실 아직도 생각해. 그 날, 내가 알렉스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쯤 그의 손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 하고.."
"유진..."


어느새 나는 울고있었다. 리타드는 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걱정스레 닦아주었다.


"그 다음엔... 알렉스가 괴롭혀서, 그래서 그게 괴로워서 몇번 도망쳤어. 물론 알렉스는 날 잡지 않았지. 난 번번히 여자들에게서 차이고, 돌아갈 곳이 없어 정처없이 떠돌면... 그러다 보면 어느 새 나는 알렉스의 집 앞에 있었고, 알렉스는 늘 그렇듯이 아무말 없이 날 받아들였지."
"유진..."
"그 다음부터 길면 일주일 정도는 날 감시해. 내가 도망칠까봐. 근데 그건 얼마 안가고 다시 괴롭혀."


리타드는 어느 새 날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내가 상상하던 어머니의 품에서 느끼던 그 따스함은 분명 이런 느낌이었을거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내 속마음을 전부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생길까 하고 생각만 하던게 현실이 되었으니까.

나는 리타드가 준 커피를 전부 마시고 그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내 머리에 자신의 팔을 내어준 리타드를 보았다. 비록 알렉스만큼은 아니었지만, 리타드도 충분히 잘 생긴 얼굴이었다.


"... 넌 학교다닐 때 인기 많았지?"
"뭐.. 그렇죠.."
"흐응.."
"뭐야, 설마 지금 질투해요?!"


리타드가 날 끌어안으면서 물었다. 어쩐지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 질투는 무슨... 나이가 몇인데..."
"거짓말, 질투 하는거죠? 내가 인기가 많았을 것 같아서."
"아니야."


나는 홱 돌아앉으며 말했다. 그러자 리타드는 뒤에서 날 끌어안으며 말했다.


"정말 아니에요? 진짜로?"
"... 몰라..."
"하하, 질투하는구나!"


리타드의 밝은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든 그날은, 어쩌면 처음으로 깊게 잔 날이었던 것 같았다.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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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11-30 14:53 | 조회 : 2,263 목록
작가의 말
류화령

오랜만이네요..ㅎㅎㅎ 쓰다가 느낀건데 얘네 둘은 만나기만 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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