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오후

안녕하세요, 다시 오후에 돌아왔네요.
모두들 한 주를 무사히 시작하셨죠?
즐겁게 한 주를 시작하신 분도, 울상 지으며 한 주를 시작하신 분도, 억지로 한 주를 시작하신 분도 있겠지만...
이제 겨우 화요일이잖아요?

여러분은 미술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꽤나 좋아한답니다.
샤프를 이리 저리 굴러가며 하얗게 빈 여백을 채우는 것도 좋아하고, 여러 가지의 색을 섞어가며 새로운 색을 만드는 것도 좋아해요.
하지만 보통의 색보다 더 다루기 까다로운 색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하얀 색과 검은 색이랍니다.

하얀 색은 힘이 약해서 색에 뚜렷한 변화를 주려면 꽤나 많은 하얀 색 물감을 소비해야 하고,
검은 색은 힘이 강해서 매우 적은 양으로도 다른 색에 큰 변화를 줄 수가 있죠.
이 두 색은 마치 선과 악 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저는 괴담에서 흔히 등장하는 괴이와도 비슷하다고 느껴요.

다루기 까다롭지만, 일단 다루기 시작하거나 그냥 조금 사용만 해도 도화지는 비교적 다채로워지죠.
괴이 역시 다루기 힘들고 자기 멋대로 나타나는 녀석들이지만, 그런 녀석들이 있기에 사람들이 더욱 다양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미술이 더욱 괴이를 연상시키는 이유는 작품을 그리고 '아, 끝났나?'라고 생각한 순간 명암이 잘못되었거나, 색이 조금더 진하거나 옅어야 한다거나 하는 문제점을 종종 발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괴이 역시, 당신이 끝났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다시 불현듯 나타날 수도 있어요.
그래, 마치 어제 말했던 그 남자처럼요.

오늘 들려드릴 괴담도 '끝났다'라고 생각한 괴이의 연장선에 대한 괴담이랍니다.
어디보자.. 아, 이번 건 특이하게도 녹음 형식의 괴담이네요.
한 번 들어볼까요?


(녹음기가 재생되는 소리)

자, 이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아, 그 일은 내가 벌써 끝냈다니까. 당신 같은 사람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그래도, 따님이 당신을 걱정해서 소개시켜준 일이니 만일을 대비해서...)

"아니, 글쎄! 내가 왜 해결된 일 때문에 돈을 써야하는 거야?"

돈은 필요 없어요.

"뭐야? 진짜?"

네, 단지 당신에게 벌어진 일을 듣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 돈이 들지 않는다, 이거지?"

그럼요. 혹시라도 못 미더우시면 여기서 각서라도 쓸까요?

"아니, 뭐. 그럴 것까지야 없어. 날카롭게 굴어 미안허이. 뭔가 뜯어내러 온 사기꾼인 줄 알았어."

아뇨...

"그냥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라면 처음부터 그렇게 이야기하지 그랬어. 끝난 일이고, 이야기하지 못할 것도 아닌데."

네, 다음부턴 그러도록 하죠. 이젠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그러지. 어...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아, 그래. 저 사진 보이나?"

어떤 사진 말씀이시죠?

"저기 저 사진 말일세. 여자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는."

아... 보입니다. 귀여운 아이네요.

"그렇지? 내 손녀딸이라네."

하지만 저 아이가 가지고 놀고 있는 저 인형... 저건 좀... 위험해 보이는 걸요.

"음, 저 인형을 한 눈에 알아보는 걸 보니 뭔가 알긴 아는 사람 같구만. 그렇네, 모든 게 저 인형으로부터 시작되었지.
처음 저 인형을 사 가지고 온 건 사위였네. 손녀의 생일 선물으로 사 왔다는데...
뭔가.. 엔티크 숍이라는 곳에서 샀다는데, 대체 뭔 생각으로 딱 봐도 이상해 보이는 저런 인형을 사 가지고 온 건지...
일단은 한동안은 괜찮았던 모양인데, 곧 문제가 생겼다더군..."

문제라면 어떤...?

"어느 날 손녀딸이 인형과 함께 자고 싶지 않다고 칭얼거렸다더구만. 딸아이가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손녀딸이 이렇게 말했다는군. '인형이 자꾸 내 발목을 잡는다'라고."

발목을... 말입니까.

"그래, 발목 말이야. 그리고 사진을 봤으니 알겠지만..."

저 인형, 발목이 없네요...

"그렇지. 샀을 때부터 저랬다던데... 어쨌든 손녀딸의 말을 들은 딸아이가 뭔가 이상해서 손녀딸의 발목을 보니 양 발목에 멍이 시퍼렇게 들어있었다더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딸아이는 손녀딸이 한 이야기를 사위에게 한 뒤 그날 밤 인형을 딸 내외가 데리고 잤다더라고.
그날 밤, 딸아이가 뭔가 이상한 낌새에 눈을 떠 봤더니 분명히 침대 앞 의자에 두었던 인형이 딸아이와 사위의 발치에 앉아서 두 사람의 발목을 한 쪽 씩 잡고 있었다는군.
당연히 딸아이는 비명을 질렀고, 사위도 잠에 깨었다는 군.
그리고 두 사람 다 눈을 뜨자마자, 인형이 어떻게 했는 지 아나?"

어떻게 했죠?

"웃었다더구만."

웃었다구요?

"그래. 어떻게 웃었는지는 딸아이도 표현하지 못하더니만... 정말 기분 나쁜 웃음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고...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오자마자, 인형을 멀리 가져다 버렸다고 하더라구.
그런데 그 인형이 말이야... 다시 돌아왔다고 하더군."

다시 돌아왔다구요?

"그래. 그날 밤 딸아이가 집에 돌아오니 손녀딸이 가지고 있더래.
어디서 가져왔냐고 다그치니까 그냥 자기 방에 있었다고 대답했다네?
자기 혼자 돌아온거지..."

따님이 많이 놀라셨겠네요...

"그렇게 생각하지?
공포에 떨던 딸아이는 결국 인형을 태우기로 했어. 그래서 기름을 붓고 인형에 불을 붙였는데 불이 한참 타다가 꺼지더래.
그런데 말이야, 인형은 털끝 하나 타지 않은 채로 멀쩡했다고 하더군. 기름만 타고 인형을 타지 않은 거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당연히 말이 안 되지, 뭘 생각하나.
그래서 딸아이는 인형을 들고 곧장 내게로 가지고 온 거야. 어떻게든 처리해 달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걱정말고 여기에 두고 가라고."

뭔가 계획이 있으셨나요?

"물론. 불로 태워도 안 되는 건 딸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인형일 것 아냐?
그럼 아주 조각조각내서 잘라버린다면, 지까짓게 뭐 어쩌겠어?
마침 내가 하는 일이 목수라서 전기 톱도 있겠다, 저 빌어먹을 놈의 인형을 아주 조각조각 내 버렸지.
그리고 나서 불을 붙였더니 잘 타더구먼.
그렇게 해서 잘 해결해 버렸다, 이거야."

...하아...

"음? 뭔가?"

혹시, 자를 때 어떤 식으로 잘랐는지 기억 나세요?

"어? 음... 보자... 머리를 잘라낸 다음 팔과 다리를 잘라내고, 마지막으로 몸통을 반으로 잘랐던가...? 그런데 그게 왜...?"

그게 왜, 라뇨. 그 인형, 자신이 발목이 없다는 이유로 주위 사람의 발목에 그렇게 집착을 했는데, 그렇게 갈기갈기 찢어놓는다면...!!

"뭔 소리야, 그게? 타 버린 인형이 뭘 어떻게 하겠어? 새까맣게 타버렸다니까?"

하아... 저기, 나중을 위해 한 가지만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뭘 말인가?"

추후에 다시 그런 괴이와 얽히거든, 그런 말도 안 되는 괴이는 꼭 전문가에게 맡겨서 처리하도록 하세요.

"이봐, 뭐하러 그런 놈팽이들 말을 믿고 큰 돈 써가면서 맡기나 그래? 내가 해결했으니 됐잖아?"

제가 봤을 때는 그 인형, 전혀 해결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진짜 전문가들은 저처럼 돈을 요구하지 않는 경우도 많답니다. 다음부터는 그런 분들을 찾아서 맡기도록 하세요. 그럼...

"아니, 이봐! 잠깐!! 뭔 소리야 그게!! 해결되지 않았다니!!! 그게 잿더미가 되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셨겠죠.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불로 태워도 전혀 타지 않던 인형이, 단지 조각냈다고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할까요?
이상하지도 않으세요?

"뭔가 방염처리라도 겉에 했었겠지!!"

대체 어떤 방염처리가 기름을 붓고 태워도 그을음 하나 묻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불을 막아주나요?

"그... 그건...!!"

어르신. 보통 괴이는 세 가지의 조건을 가지고 있어요. 첫째, 괴이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둘째, 괴이는 정체불명이어야 한다. 그리고 셋째, 괴이는....

괴이는, 불사신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뭐야 그건!! 무슨 소리를!!"

좋은 자세입니다, 어르신. 괴이에 얽히지 않으려면 괴이를 믿지 않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하거든요. 하지만 이미 어르신은 괴이에 얽혀버리셨었고, 정말 최악의 방법으로... 뭐랄까, 괴이라는 불에 기름을 부어 버리셨어요.

"이...이...이!!!"

정말 위험한 건 어르신이 아니라 따님 내외분과 손녀딸이겠군요.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만, 늦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저, 저기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게!!!"

죄송하지만 기다려드릴 시간은 없습니다. 처음에 말씀 드린 대로 돈도 필요 없구요. 다만...

만약, 따님 내외분과 손녀따님이, 머리와 팔 다리가 잘려나가고 몸통이 양분되어 있더라도, 그건 꼭 당신 책임만인 것이 아니란 것. 그 것만 알아주세요.

(녹음기가 꺼졌다 켜지는 소리)

...서초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32살 김모씨와 29살 최모씨 부부가 토막나 살해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집 문이 열려있었던 점, 가해 흉기가 사라진 점, 피해자 김모씨와 최모씨가 특별히 원한 관계가 없었던 점을 미루어 보아 묻지마 살인으로 추정하고 CCTV 등을 확보해 수사에 나섰습니다.
또한 최모씨의 아버지인 59살 최모씨도 딸의 죽음을 전해듣고 '모두 내 잘못이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자살했습니다.
한편 무사한 채로 발견되어 현재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부부의 딸인 6살 김모양은 연고가 없어 일단 연고자를 찾을 때까지 병원에 머무를 수 밖에 없어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이-

(녹음기가 꺼지는 소리)


자, 어떠셨나요?
끝난 줄 알았던 괴이, 하지만 끝나지 않은 괴이.

문득, 여러분은 끝났다고 생각한 것에서 후에 문제점을 찾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 문제점은 후에 어떤 결과를 불러왔나요?

혹은, 여러분은 지금 끝내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문제점을 찾지 못한 채로 그대로 끝내가고 있지는 않나요?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그 문제점을 찾고 멋진 그림을 완성하길 바래요.

물론 저 괴이만큼이나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가능성은 적지만요.

그럼, 이미 끝난 작품의 끝나지 않은 점을 찾으며 오늘도 무사히 막을 내려봅니다.
모두들 화요일 무사히 마무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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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1-17 17:52 | 조회 : 1,350 목록
작가의 말
Beta

검은 색과 흰 색을 쓰지 않은 그림은 어떤 느낌이 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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