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 아니면 사기꾼, 그것도 아니라면 음유시인 part 2




무시하지 마! 쓰레기 인간 혁명기



[02] 마법사, 아니면 사기꾼, 그것도 아니라면 음유시인 part 2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별 거 아냐. 옛날 신들이 메이에게 무언가 선물을 할 거란다."


멕더거는 제레미의 안장 뒤에 놓인 가죽과 옷감들을 뒤적거리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우리의 수장인 메이가 신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징표 말이지."

"징표라고요?"

"보여주마."


멕더거는 빠른 손놀림으로 흰 천으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주머니를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향낭이라도 되는 걸까? 아니면 안에 금은보화라도 들어있는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중 그는 주머니를 묶고 있던 가죽끈을 풀어 내게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안에는 좁쌀 만한 갈색의 무언가가 들어 있었는데, 나는 저택의 주인님덕에 고된 농업을 직접 겪어 본 적이 있는지라 그것이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씨앗이잖아?"

"그래, 씨앗이지. 이게 바로 세계수의 씨앗이란다."

"세계수? 그게 뭔데요?"

"숲의 신 인피니티아의 권능이 담긴 나무. 뿌리는 지하의 끝 헤아디아스의 궁전 까지 닿으며 나뭇가지는 저 하늘 위에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아쉔자리의 눈동자 까지 닿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지. 안타깝게도 리틀러의 광위에 결국 허리가 꺽여 무너지고 말았지만 말이야. 너도 이젠 알지 않니? 숲사람의 땅 렐프헤임. 사실 그곳은 숲사람들이 썩어가는 세계수의 안을 파내서 도시를 만든게 시초였단다."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도시를 만들 수 있는 크기의 나무라니? 멕더거의 이야기에 흥분 된 나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실실 웃고 있는 그를 향해 물었다.


"정말 이 씨앗이 세계수의 씨앗이야?"

"당연히 아니지."

"뭐?!"

"그 씨앗은 그저 태림(太林)에서 주운 너도밤나무의 씨앗이야. 하지만 나는 이 씨앗을 숲의 신 인피니티아가 메이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믿게 만들 거란다. 후후, 일을 벌이기 딱 좋은 날씨군. 곧 물 위로 안개가 끼겠구나."


나는 충격에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보다 안개가 끼는 것을 멕더거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악마가 말해주기라도 하는 걸까?


"이크, 내 정신 좀 봐. 네가 무슨 일을 할 지 네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구나."


덤불을 헤치며 성큼성큼 앞서 가면서 마르딘이 말을 이어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 일려나? 이 덩치도 작고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 내가 무엇을 할지 나는 짐작 할 수 없었다. 그저 막연히 불안했다. 아니 사실, 내가 불안한 이유는 멕더거의 낯빛에 떠오른 긴장감과 두려움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것들은 전염병과 같았다. 한 사람이 불안해하면 천천히 옆사람도 불안함에 전염되간다. 내가 불안해하면 옆에 있던 밀라키도 불안해졌듯이, 나도 멕더거의 병에 전염된 걸지도 몰랐다. 내심 아닌 척 싱글벙글 웃고 있긴 했지만 그는 분명 긴장한 듯 보였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두려움을 몰아내는 그만의 방식인 듯 보였다.


"너는 인피니티아의 종인 강의 정령이 될 거다. 운디네. 이름은 들어봤겠지? 아마 너의 예쁘장한 얼굴과 푸른빛의 긴 머리는 안개와 덧 붙여 너를 강의 정령으로 만들어 줄거다. 너의 특별한 힘도 사용하면 금상첨화겠지. 아마 의심할 여지 없이 멍청한 제국의 기사들은 너를 강의 정령으로 착각해 두려워 하겠지. 그때 네가 말하는거야.「신들의 보살핌을 받는 메이 블라섬이여. 신들의 왕인 유토니움의 명에 따라 이 곳에 터를 잡고 나라를 세워 동쪽과 서쪽의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을 위해 새로운 질서가 되라.」라고 말이야! 흐흐, 말하는 사이에 도착했군."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보다도 성공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제국의 놈들이 그렇게 멍청할까? 생각해보았지만 내가 멕더거의 말을 듣지 않고 그 광경을 봤더라면 분명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운디네의 눈 밖에 나지 않게 절을 했을 것이었다. 아마 몇번씩이나 말이다.


눈 앞엔 폭포와 강이 보였다. 늦은 오후의 태양이 건너편 강변의 떡갈나무 꼭대기를 비추었지만 그늘진 강물 위에는 옅은 은빛 안개가 덮여 있었다. 멕더거가 말한 그대로였다. 마법을 부릴 줄 몰랐다고 했는데. 미래의 일을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멕더거의 눈동자를 살펴보았다. 별빛을 머금은 듯한 푸른빛의 눈동자. 회색 눈은 아니었다.


저 멀리 강 하류에서 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멕더거는 서둘러 나를 강가로 이끌었다. 덤불을 헤치며 나아갔다. 뾰족송곳나무의 날카로운 이파리들이 얼굴을 할켜댔다. 좁다랗고 평평한 바위가 폭포로 이어졌다. 주변에는 이름 모를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폭포의 물보라가 식물의 잎사귀 위로 요란하게 떨어져 내렸다. 도톰하고 끝이 뾰족한 잎사귀들은 마치 녹색 혓바닥 같아서 거대한 무언가가 급하게 물을 마시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잎들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는 희미한 길 하나를 발견했다. 그 길은 새하얀 커튼 같은 폭포수 뒤쪽으로 구불구불 이어졌다.


멕더거는 돌아서더니 씨앗이 담긴 주머니를 내 손 위로 올려다주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내 어깨를 꼭 잡고 몸을 수그려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밤하늘 처럼 파란 눈동자가 촛불이 춤추듯 빠르게 흔들렸다. 무언가를 읽어내 듯, 무언가를 기대하 듯.


"조연들이 오는구나. 자 이제부터 주연인 클라이드의 대본을 읊어줄테니 잘 들어야 한다."


* * *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나무 그늘이 건너편 강변으로 움직였다. 나는 폭포 뒤에 있는 축축하고 좁다란 바위 위에 홀로 웅크리고 앉았다. 콸콸콸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가 머릿속을 꽉 채울 지경이었지만 물보라는 내 몸까지 침범하지 못했다. 이곳에 있으면 꼭 자신이 아쉔자리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든 존재들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 회색 눈들, 이 섬기는 예언의 신, 왜냐하면 몇 발자국만 떨여져도 밖에서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안쪽에서는 물의 장막 너머로 전경이 훤히 내다보였다. 햇볕이 있는 동쪽 강변을 오락가락하는 멕더거의 모습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이 돌연 내게로 향했다. 표정을 읽기에는 너무 먼거리였지만 아마 조심하라는 뜻이었을 것 같다. 나는 멕더거 뒤 쪽에 있는 나무들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후 아침에 멕더거를 찾아왔던 메이라는 여자가 찾아왔다. 그 뒤엔 금속의 광채가 번쩍이는, 말을 탄 사내들의 윤곽도 보였다. 동시의 제국의 적홍기도 보였다. 나는 이빨을 따닥거리며 두려워했다.


멕더거는 메이에게 뭐라뭐라 말하였지만 나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때 제국 기사들 중 누군가 손을 들어 메이를 가리켰다. 또 한 무리의 말 탄 사내들이 가파른 언덕에 자란 나무들을 헤치고 강 쪽으로 나왔는데 창과 활을들고 있었다. 검은 수염을 기른 장대한 사내가 맨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이윽고 사내가 달리기를 멈췄고 그를 따라 멈췄다. 그들은 강 건너편에 위치한 멕더거와 메이를 향해 무기를 흔들며 고함을 쳤다. 폭포의 낙수소리때매 당연히 뭐라했는지 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그들을 모욕하는 말임이 분명했을 것이다. 전사들은(기사들은 모르겠지만) 때로는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선 자리에서 몇 시간동안이나 서로를 조롱하거나 대치하기도 한다고 들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일촉즉발의 현 상황에서도 묘하게 안심이 되었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멕더거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은 신빙성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묘하게 들으면 안심이 됐었다. 그렇게 멕더거를 지켜보던 도중 그가 팔을 치켜들며 강 건너편, 정확히는 폭포의 뒤에 있는 나를 향해 뭐라고 외쳤다. 손을 저어 강 전체를 가리키면서 제국에게 이곳이 마법의 장소임을 일깨웠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것을, 그리고 이곳에 메이가 온 이유는 신탁을 받기 위함이라는 것도.


얼마 후 메이는 저벅저벅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멕더거가 말한 대로 그녀의 발이 물에 닿기 전에 그의 발 밑의 물들을 얼려 길을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제국의 기사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나는 조그맣게 기도를 중얼거리며 낡아 빠진 옷을 벗은 다음 바위의 갈라진 틈 안으로 뭉쳐넣었다. 천에 감싸인 씨앗 주머니를 팔목에 꽉 조여 고정 시킨 뒤, 크게 심호홉을 하였다. 멕더거가 시킨 일을 해낼만한 용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생쥐가 아닌 멍청한 나그네 쥐가 되보기로 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강으로 뛰어들어가는 나그네 쥐.


나는 멕더거의 말대로 폭포를 천천히 얼렸다. 이정도 크기의 물건들을 얼려 본적은 없어서 그런지 속도는 느렸다. 하지만 그만큼 시각적 효과는 엄청났다. 이 십여초가 지나자 폭포가 전부 얼어 마치 절벽에 희고 투명한 천 하나를 널어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는 강바닥을 얼려 내가 메이에게 갈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만든 얼음길에 발을 내딛었다.


"그들은 아마 너 만을 볼 거다. 신의 사자를 볼 기회는 매일 볼 수 있는게 아니니까. 뭐, 어차피 안개와 어두컴컴한 날씨덕분에 네가 누군지 잘 못 알아볼거다. 그저 너를 인피니티아의 종인 운디네로 볼 뿐."


안개에 대한 예언이 정확히 들어맞았듯 그 말도 맞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내가 메이의 앞에 다다르자 그녀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오른쪽 눈으로 윙크를 했다. 그녀가 본 내 표정은 어땠을까? 잔뜩 겁먹어서 웃긴 표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윙크도 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판트라에서 여기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테지. 잘 와주었다. 메이 블라섬."

"자연의 종이자 미천한 존재인 메이 블라섬이 인피니티아의 심복인 운디네님을 뵙습니다."


메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 쪽 무릎을 꿇어 예를 갖췄다. 그녀의 얼굴에서 문득 두려움의 기운이 보였다. 이 여자, 멕더거의 동료라 그런지 연기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오래 전 신들의 왕이자 세계의 창조주 유토니움께서 네 탄생을 우리에게 예언해주었다. 네 탄생과 함께 온 세상이 만 하룻동안 해의 군세가 미치고 어둠을 몰아냈었지."

"대백야(大白夜)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그렇사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메세지였다. 곧 새로운 존재와 질서의 탄생을 알리는…. 그러나 너희 인간들은 그 메세지를 잘못 이해하고 있더구나. 유토니움님은 그 모습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었는지 친히 나에게 너를 통해 메세지를 다시 전달하라고 명했다."

"메세지라하면… 어떤 것인지요?"


나는 멕더거의 대본대로 메이블라섬에게 씨앗이 들은 흰 주머니를 그녀의 손 위에 올려주었다. 메이는 그것을 엄청난 성물이라도 된 듯 양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그 모습이 뭔가 우스워 웃음이 나오려던 걸 간심히 참았다. 메이의 다급한 표정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씨앗을 세상의 중심에 심어라. 그 씨앗은 인피니티아의 가호를 받은 세계수의 씨앗이다. 뿌리는 헤아디아스의 궁전에 닿으며 가지들은 아쉔자리의 눈동자를 찌를 듯이 높게 자라지. 그것이 모두 자라면 세상 어디서든 세계수의 기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 나라의 왕이 되어 오만한 동 서의 인간들을 벌하여 유토니움님이 전하는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라."

"새로운 질서라하면은…?"


아뿔사, 나는 나의 기억력을 원망했다. 이 대사가 마지막이었는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든 인간들에게…"

"모든 인간들에게…?"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두 팔을 벌려 최대한 경건하고 근엄하게 말을 내뱉었다.


"이 땅에 너희 같은 사람을 위한 나라를 세우고 오만한 동 서의 귀족들을 벌하여라!"

"……."


망했다.


"신들의 왕, 세계의 창조자. 유토니움님의 명에 따르겠나이다."


나는 난생으로 처음 물안개에게 감사했다. 빨개진 내 얼굴을 아무도 보지 못했을테니까, 내 앞에 선 메이 블라섬을 제외하고, 나는 이 발언이 나중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정말로 여러의미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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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13 19:37 | 조회 : 776 목록
작가의 말
엔니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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