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 아니면 사기꾼, 그것도 아니라면 음유시인. part 1






무시하지 마! 쓰레기 인간 혁명기



[02] 마법사, 아니면 사기꾼, 그것도 아니라면 음유시인 part 1.


나는 꿈을 꾸었다. 꿈의 내용은 여태까지 꿨던 악몽들과는 달랐다.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의 꿈이었다. 꿈의 내용은 주로 멕더거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들이었다. 생각보다 나는 멕더거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던 듯 싶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생생한 꿈을 꿨을리 없을테니까. 나는 광활한 물들을 보았다. 아마 이게 멕더거가 말한 바다라고 생각했다. 그들 사이에 조각난 노의 파편들 같이 섬이 둥둥 떠 있었다. 꿈 속에서 나는 새였다. 아주 커다랗고 기품 있게 날아다니는 새.


멕더거가 말한 대로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커다란 땅덩어리들이 존재했다. 동쪽의 오리엔트와 서쪽의 옥시던트. 오리엔트, 해가 뜨는 땅이고 옥시던트가 해가 지는 땅이라는 뜻이라고 멕더거는 말했었다. 바다에는 배들이 보였다. 멋스러운 돛을 펴고 위풍당당하게 항해를 계속 하는 바다의 전사들…


그리고 남쪽 바다의 끝은 마치 심연처럼 어두운 구름들이 겹겹이 피어올라 있었다. 흉흉한 기운을 내뿜으며 검은 구름들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현실의 나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꿈 속의 나는 호기심이 왕성했던지 저 검은 구름 너머 뭐가 있을까 향했다. 남쪽으로 갈 수록 파도는 거세지고 구름은 빛을 바다로 쏘아대며 천둥소리를 내었다. 이 곳에 절대로 들어오면 안된다고 하는 마지막 경고 메세지라도 보내는 양.


"그만두라고요!!"

"으아아아아아!!"


고함 소리에 잠이 깬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거의 온종일 잔 모양이었다. 내 몸을 덮고 있던 담요와 바깥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멕더거의 애마는 머리를 늘어뜨린 채 졸고 있었다. 멕더거의 고함 소리에도 깨지 않고 잘도 잔다. 모닥불 밖에선 멕더거와 다른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새로이 나의 친구인지 동료가 된 남자와 누군지 모르는 또 다른 여자, 목소리로 봐선 페다스는 아닌 것 같았다. 페다스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말 옆으로 슬그머니 기어가서 몰래 멕더거 쪽을 내다봤다. 숲 속에서 자라난 나무들이 드리운 그늘 안에 멕더거와 상대방이 서 있었다. 가슴에는 나뭇 잎을 엮어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는 나무의 줄기들을 꼬은 뒤 나뭇잎을 엮어 만든 치마를 걸친 여자였는데 꽤 질겨보이는 가죽 허리띠엔 용도를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액체가 담긴 유리병들과 인형 하나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인형은 나뭇잎과 짚을 엮어서 만들었는데 어찌보면 서툰 실력으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섬뜩하게 보이기도, 귀엽게 보이기도 하였다. 난 저런 차림의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 지 알고 있었다.


"…주술사?(Enchanter)?"


까놓고 말해서 나 또한 주술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밀라키가 말해 준 걸 어찌어찌 단편적으로 기억만 하는 수준이었다. 밀라키의 말로는 주술사는「인간이 아닌 자들과 교류하는 자」라고만 했다. 물론 나는 밀라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그녀를 본 순간 주술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여자의 주위에는 뭔가 원형의 빛, 그니까 굳이 예를 들자면 반딧불과 같은 빛의 형상이 둥실거렸다. 직감적으로 나는 그것이 단순한 빛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 즉 인간이 아닌자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들과 대화할 수 있고 감정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들은 날 보지 못할 터였다. 어른들의 눈에 나 같은 덩치 작고 생쥐 같은 조그만 사내아이 따위가 보일 리 없었다. 주변을 어슬렁 거리는 집 없는 개나 고양이와도 같은 존재니까. 그러던 중, 여자가 입을 열었다.


"숲의 정령들이 말하고 있어. 게슈타스의 군인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끌어 모을 수 있는 인원은 죄다 모아서 말이야. 이대로 마주치면 우리 하이시커는 게슈타스와 전쟁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저를 믿지 못하는 것 입니까?"

"그, 그치만… 게슈타스의 움직임도 요즘 심상치도 않고.. 이대로 모두가 다친다면 나는…."


주술사의 눈엔 눈물이 주렁거렸다. 멕더거는 묵묵히 그녀를 응시하다가 품안에서 조그마한 흰색 손수건을 꺼내 주술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후우…. 난 어쩌다가 이런 울보 겁쟁이와 만나게 된걸까. 정말이지, 섬길 마음이 싹 가신다고. 어떻게 그만둔다고 말씀 하실 수 있습니까 메이 양! 그런 말이 어찌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겁니까? 우리가 어떤 희생을 치렀는데? 그게 한 집단의 수장이 할 말인가요?"



메이?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저 여자가 위대한 모험가이자 하이시커의 수장 메이 블라섬이란 말인가?


"그치만… 그치만… 무섭고 슬퍼. 그들이, 한 때 내 동료였던 사람들이, 친구들이…!! 색을 잃고 내 곁에 떠나지 못하고 머무르는게 싫어. 나는 그들을 헤아디아스의 궁전으로 인도해주고 싶어. 그녀의 자장가를 듣고 편히 잠들게 하고 싶어. 내 곁에… 머물게 하는 건 더 이상 싫어…!!"

"당신을 이런 패도에 걷게 하는 나를 용서해주십시요. 하지만 이건 우리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전 세계의 정커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천 년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십 년의 고난 쯤은 감수해야 해요. 약해지시면 안됩니다. 당신은…"

"…닥쳐!!"


메이의 외침에 멕더거는 입을 다물었다. 숲에서 들리는 건 주술사의 흐느끼는 소리 뿐이었다.


"그들의 시선을 버티기 힘들어. 멕더거, 넌, 너는… 내가 대체 뭐가 되길 원하는거야?"


멕더거는 메이의 물음에 잠시 가만히 있다가 나즈막히 대답했다.


"전설."

"뭐?"

"서로 잡아 먹을 듯이 으르렁거리는 오리엔트와 옥시던트를 하나로 뭉치게 할, 또 전 세계에 핍박받고 괄시당하고 있는 정커들의 희망이 되기 원합니다."


그러자 메이는 싱긋 웃었다. 왜 웃는걸까? 딱히 위로가 되는 말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는 그녀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 걸어가려다가 무엇 때문인지 내 쪽을 힐긋 쳐다보았다. 나무들과 잎사귀로 이루어진 신록의 그늘 밑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얼핏 본 듯했지만, 곧 그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옆 모습이 아닌 정면의 주술사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꼭 멕더거가 말해준 대지와 식물들을 보살피는 여신과 같은 자태였다.


"그럼 서클리버에서 보는 거지요 멕더거?"

"예, 그렇습니다. 폭포가 있는 곳 말입니다."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 메이에게 멕더거가 손을 흔들면서 응답했다. 메이의 뒷 모습이 점처럼 조그맣게 보일 때 즈음 멕더거는 모닥불 쪽으로 몸을 돌리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밀라키를 제외한 누군가가 내게 미소를 지어 준 적이 없던 터라 나는 그 멕더거가 다가올 때까지 그 미소를 한껏 음미하면서 멍하니 서 있었다. 멕더거는 내 팔을 잡고 모닥불로 걸어갔다.


"네가 해 줄 일이 있어 클라이드."


멕더거가 나에게 부탁 할 일이란게 무얼까. 나는 멕더거의 애마인 제레미의 똥무더기로 눈길을 돌렸다.


「설마 저걸 치우라는 걸까.」


"그런 게 아니야 자식아."


멕더거는 내 눈을 보더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챈 듯 쿡 웃고는 머리를 쥐어박았다.


"내 말을 듣고 있었지? 난 메이를 전설로 만들고 싶어. 어제 네게 해준 리틀러의 이야기를 기억하냐? 그것도 나름대로의 전설이지. 하지만 난 메이를 그런 악덕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재앙으로 기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기 위해선 징표가 필요해. 하늘을 받치던 기둥을 무기 삼아 악마로 부터 지상을 수호하던 올딘의 이야기처럼. 그러기 위해선 네 도움이 필요하지."


멕더거는 신에 대한 이야기들을 잘 알고 있었다. 음유시인인 것도 있지만 그는 뭔가 남달랐다. 평범한 음유시인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도로 끝났겠지만 멕더거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내가 정말로 그 이야기를 눈 앞에서 직접 목격하고 있는 듯 보였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헤아디아스를 찾아가 그녀를 감동시켜 결국 남편을 자신의 아들로 환생시킨 이야기, 악마신 마크레브와 어둠신 다스메노스의 악마군단과 싸워 평화를 이뤄낸 용사 에우페미아…


"멕더거는 신에 대해 잘 아네?"

"음, 뭐 그렇지. 음유시인이고 하니까."

"음유시인이 되면 신에 대해 잘 아는거야?"

"보통은 그렇지 않지. 내 경우엔 조금 특별하니까. 이야깃거리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데엔 신화나 전설이 최고지! 이 세상의 유일한 오락거리니까."


그런 거 말고도 재미있는 것들 많은데. 라고 대답하려다 멕더거의 기분이 상할 까봐 그만두었다. 대신 다른 말을 찾았다.


"멕더거는 신을 믿어?"

"응? 신?"


멕더거는 내 질문에 싱긋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그래. 믿지. 지금은 신이 아니더라도 곧 신이 될 사람이 있어. 난 그를 동경하고 경외하며 감탄한다. 내게 있어 그는 신이고 세계야. 난 꼭 그녀를 그 위치에 도달하게 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야."


나는 멕더거의 말을 듣고 하이시커(High seeker)란 말의 뜻을 다시 한번 곱 씹어 보았다. 멕더거는 높은 곳을 추구하거나 바라보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건 늘 언제까지나 지상에 있었고 땅위를 걸으며 어느 사람들처럼 눈물 지을 줄 알며 웃을 줄 알았고 울보며 겁쟁이에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에 사파이어 빛 눈동자를 가졌다. 그에 있어 그녀는 태양이었으며 그는 해바라기였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를 부럽다고 생각도 했었다.


"물론 말을 이렇게 해도 난 신을 믿지 않아. 그렇지만 신을 배척하지도 않지. 사람들에게 있어 신앙심은 필수 불가결의 존재야. 그렇지 않으면 두려움이란 어둠에 굴복하게 되지. 신앙심이 있다면 신의 힘과 권능을 내세워 억지로라도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어. 그리고 곧 깨달을 거야. 어둠이란거, 별 거 아니였구나. 우리 인간의 힘으로도 할 수 있구나! 하고 말이야."


나는 멕더거의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신에 대해서 저토록 불경스러운 말을 하다니! 분명 불운이 닥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신을 믿었다. 죽음을 관장하는 헤아디아스의 존재를 믿었고 그 외에 많은 신들을 믿었고 분명 존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성호를 그어 그들의 노여움을 막기 위해 애썼다. 악신이든 선신이든 화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순진한 자식, 넌 신을 믿는구나."

"나한테 말 걸지 마. 옴 붙어."

"…신이란, 과거 특별한 힘을 가진 자들을 평범한 사람들이 경외하며 불렀던 존칭 같은거야. 난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웃기고 있네. 그러면 모든 정커들이 신이게?"


멕더거는 내 비아냥에 그냥 코 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는 헝클어진 내 머릿결을 어루 만져주면서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어느 신이 우리를 보살피고 있을 지 모르겠구나. 무언가가 널 내게로 보낸 것만은 틀림 없으니까 말이야. 원래는 게슈타스의 기사가 보는 눈 앞에서 페다스가 숲의 신으로 변장할 계획이었는데 네가 있으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전설을 만드려는거지."

"너, 정말 마법사라도 되는거야..?"

"아니, 난 맨손에 불덩이를 쏠 수도 낙뢰를 일으킬 수도, 땅을 들어올리거나 칼바람을 만들 수 없어. 그저 난 이야기를 만들 뿐이야. 내 직업이 뭔지 잊은거냐? 음유시인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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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06 09:04 | 조회 : 809 목록
작가의 말
엔니립사

아마도 사기꾼일 듯. 세계관은 blog.naver.com/boorandang29 연재중입니다. (아직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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