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진수아미 (1)

진수 아미
2. 진수아미 (1)

“매출이 벌써 세배는 뛰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정말 안 가르쳐 줄 테냐?”
“무··········. 무슨 이유가 있단 말이오. 이게 다 내 손재주가 좋은 탓이지!”

나 아니었으면 이딴 촌티 나는 방물점 따위 진즉에 접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초이가 펑펑 큰 소리를 쳤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골방에 이상한 물건들을 어질러 놓는다며 자신을 구박했던 주인장인데, 일단 장사가 되고 나니 이렇게 자신에게 친절하게 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속내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초이를 구슬려 비법을 알아낸 뒤, 다시 초이를 빈손으로 덩그러니 장내 한복판에 버려 둘 것이 분명했다.

“내 황토가루로 분가루를 만들고, 숯으로 미묵을 빻고, 홍화 잎으로 연지를 내는 기술들은 가르쳐 줄 수가 있습니다. 비록 미묘한 차이로 색이 달라진다 하나, 기술 같은 건 연습하면 되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여인네 얼굴에 재료들을 수놓는 일은 조선 땅을 모두 통틀어 제가 유일한 능력자다, 이 말입니다. 이건 배워서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마치··········. 그러니까··········. 저는 치장계의 삼한 제일 검같은 존재라고나 할까요. 초이가 부러 흠흠 크게 헛기침을 했다. 이거, 하다 보니 허풍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긴 하다만 주인 영감을 최대한 유하게 속이고 넘어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것이냐?”
“제가 생명의 은인께 뭣하러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지나가는 기생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십시오! 이 고을에 저에게 치장 받지 않은 기생이 있는가 말입니다. 초이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긴장하면 목소리를 더듬는 버릇은 여전했다.

“아무튼··········. 그러면 세나 꼬박꼬박 내어라. 밀리지 말구, 응.”

주인장은 살짝 머쓱한지 코를 훌쩍거리며 방물점 앞 간판대를 보러 나갔다. 생각보다 포기가 빠른 방물점 주인을 보며 초이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맞다. 그런데 너는 사내아이 주제에 어찌 그리 여인들의 치장을 잘 아는 게냐?”
“제··········. 제 아픈 누이 말입니다.”
“그래.”
“어렸을 때부터··········. 병기를 가린다고 이것저것 얼굴에 주워 바른 것이 많습니다. 저도 옆에서 누이 병간호를 하다가 이것저것 곁눈질로 배웠구요.”

허이구, 글도 아니고 곁눈질로 배우긴 무슨. 주인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의심의 눈초리를 풀고 낮잠을 자기 위해 고개를 젖힌 것이 어느 정도 초이의 말을 믿는 눈치다.

“너도 참 딱하다야··········. 사내애가 여인들이 만지는 분이나 평생 만지며 살아야 하는 팔자라니.”
“그래도 시장 바닥에서 배 곪아 죽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요즘 그런 사람이 한둘이랍니까.”

사내에게 이런 말 실례일지 모르지만, 너도 여인네로 태어났으면 남자 여럿 울렸을 건데. 이 말을 마지막으로 주인장의 입술이 닫히고, 코 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초이는 멍하니 작은 세발의자에 행주를 들고 앉았다.

“팔자라··········.”

그 반대입니다. 나도 여인인데. 평생 남의 얼굴에만 고운 분칠을 해줘야 할 팔자지요. 물끄러미 제 앞에 놓인 치장 도구들을 내려다보며, 초이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초이는 시경을 보았다. 하월각에 가기로 한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슬슬 가방을 꾸려 방물점을 나가야 제시간에 하월각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초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저 분이 그 분이지?”
“그래.”
“이 고을 반반한 여인들 화장을 도맡으신다기에 꽤나 화려한 분인 줄 알았는데.”

다 들린다, 이놈들아. 초이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낡은 옷에 대충 상투를 매고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자신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사람 사이를 지나치는 것은 은근한 고역이었다.

한마디 해주자니 또 귀찮은 일에 엮일 것만 같아 초이가 그대로 못 들은 척 앞을 지나쳤다. 짧은 인생 살아오면서 초이가 느낀 건, 이 나라 조선에서는 자신의 중요한 사활이 걸린 일이 아니거든 뭐든지 모르는 척, 못 본 척 지나가는 게 화를 피하는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초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그 일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 초이도 단 한 가지 모른 척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네 아버지가 널 이미 팔아넘겼는데 무슨 소리더냐?”
“그럴 리 없습니다!”

쓰개치마를 머리에 두르고 비단 옷을 입은 여인 옆에 서있는 무당이 혀를 찼다. 우리가 널 죽이러 가기라도 한다 더냐? 무당이 여자 아이의 옷깃을 잡아 붙들었다.

“그냥 몇 밤 곤히 자면 되는 일이다. 장정들을 불러 끌어내기 전에 가자.”
“하지만 제 동생이··········.”
“사정이야 딱하다지만 조선에 그 정도 사정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무당이 거센 힘으로 아이를 끌어당겼다. 초이는 자신도 모르게 무당과 아이가 서있는 쪽으로 달려가 아이의 반대쪽 팔을 잡았다.

“뉘신지요?”

마치 큰 의식을 치르듯 검은 숯을 진하고 넓게 비벼 바른 눈자위를 보고 초이가 움찔했다. 빨간 입술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보였다. 초이는 괜히 끼어들었다, 자신을 자책하면서 슬쩍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낮은 목소리를 냈다.

“괜한 참견일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아이가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
“혹여 이 아이를 멀리 팔아버리거나 할 생각이시면··········.”
“괜한 참견이 맞으십니다.”

지금껏 무당 뒤에 서서 모든 동태를 지켜보고 있던 여인이 쓰개치마를 내렸다. 초이는 여인의 얼굴을 본 순간 아이를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풀 뻔하였다. 진수 아미가 딱 들어맞는 얼굴, 어느 화장을 하여도 야용*처럼 보이지 않고 멋스럽게 어울릴 이목구비.

“그 아이를 팔거나 할 일이 아닙니다. 저희는 중요한 의식을 치러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가 필요할 뿐. 저희도 어린아이를 위험에 몰아넣을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의식이 잘 끝나면 아이가 궁녀 일을 할 수 있게 주선도 놓아 줄 생각입니다. 여인의 붉고 오밀조밀한 입술이 요염하게 움직였다. 필시 남자들을 홀릴 상이다. 초이가 생각했다.

“약속이 안 된 건 저 아이의 동생 일 뿐··········. 사정이 딱하다 하나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아비도 도망간 마당에 어린아이 둘이 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차라리 의식을 빨리 마치고 궁에 들어가 동생과 함께 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선비님. 여인이 싱긋 웃었다. 무당은 여인과 초이가 이야기하는 내내 인상을 연신 찌푸렸다. 무당의 시선은 줄곧 초이의 손등과 손목을 향해 있었다.

‘이건 필시 강한 음기다. 하긴, 사내가 저리 희고 고운 손등을 가지고 있을 리도 만무하지.’

목소리도 여인네 음색을 억지로 가린 듯 하고. 자세한 건 얼굴을 보아야 알겠지만. 무당은 초이의 얼굴을 가린 모자가 야속했다.

“아기씨, 저와 말씀 좀··········.”
“다른 이야기는 이따 장소를 옮겨서 이야기하지. 저 아이는 자네가 잘 처리해 주게. 나는 선비님께 여쭤볼 것이 있네.”

무당이 쩝 입맛을 다셨다. 양반가 여인들 중 저렇게 기가 센 여인은 또 본 적이 없었다. 마음대로 하라지, 어차피 평생 모실 분도 아니니. 무당은 아이를 데리고 허름한 집 앞으로 들어갔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 듯 합니다.”
“확실히 평범한 만남은 아니지요.”
“이 고을은 처음인데, 이렇게 정의감이 넘치시는 선비님이 계셨다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니요, 지금껏 제가 보아온 누구도 이런 귀찮은 일에 나서지 않으셨습니다.”

사대부의 명예··········. 재물, 품위··········. 양반들과 선비들에겐 그런 게 제일 중요하니까요. 여인이 화답을 원하는 듯 살짝 미소 지었다.

“제 이름은 장 옥정입니다.”

장옥정이 살짝 치마를 손으로 들어 올려 잡으며 인사했다. 초이도 다소 뻘쭘한 자세로 옥정의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런 선비님께서 어째서··········.”

여인들이나 칠할 법한 분 따위를 가방에 잔뜩 넣고 계신 건지요? 장옥정의 눈빛이 묘하게 달라졌다. 자신을 추궁하는 듯 한 말투였다. 몇 번이나 마주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초이는 순간 당황하며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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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용: 본래의 아름다움 보다 억지로 꾸민 색채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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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1-16 22:08 | 조회 : 1,024 목록
작가의 말
김조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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