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녀들의 연결점




[루]



"시에에에엘...짐은 심심하고 짜증나 죽겠다! 어째서 너와 계약을 했는데도 나는 이 지긋지긋한 봉인석에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냐!"

"...흠. 봉인석에 엘의 조각이 짙은 농도로 섞여 있는 듯 하군."

"그것이 내가 아직도 여기서 꼼짝 못하는 이유인가?"

"그렇다. 그것도 물의 힘을 잔뜩 머금고 있어. 나도 너와 계약하기 전엔 물의 힘을 쓰는 사람이었으니 물의 봉인에 대한 지식이 있다. 봉인을 파훼시키는 마법식을 잘 연구하면 봉인해제마법을 쓸 수 있겠어."

"하지만 이 곳에서 나가기 위해선 또 다른 이의 힘이 필요하구나. 어쨌든 그 봉인해제마법도 물 속성의 힘이 필요터이니... 으아앙! 봉인 좀 풀어줘~!"

"...귀...귀여워..."

"뭐라 했느냐?"

"큼...음 아무것도 아니야. 여기 주변을 좀 살펴보고 올께."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허둥지둥 나에게서 등을 돌려 멀리 뛰어가버린다. 아...안 돼! 나를 혼자두고 가지마! 외롭단 말이다!






우웅-




무언가가 내 뇌를 울리고 정신을 흔들더니 그 순간 나를 휘감고 있던 답답하고 눅눅했던 짙은 푸른색의 지하가, 내 주위의 풍경이 확 걷어져버렸다. 누군가가 나를 '이 곳'으로 불러냈다.



'이미 인간계도 마계도 아닌 이상한 곳에 갇혀서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여긴 또 어디지...? 왜 난 항상 이상한 데에 혼자 떨어지는 걸까...'



시각도 청각도 무의미한 이곳은... 마치 나와 시엘이 계약할 때 느꼈던 그 느낌과 사뭇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시엘과 계약했을 때와는 한 차원이 높아.



"맞아요. 당신의 계약과정보다는 한 차원 높습니다."

"네 놈이냐?! 나를 이곳으로 불러낸 놈이!"

"네. 맞습니다."

"하! 요새 내가 참으로 이리저리 많이 치이는구나. 이미 마족놈들에게도 얕보였는데 이젠 하다하다 인간까지 나를 막 대하다니! 수치스럽다!"

"이런 곳으로 모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 상황이 많이 안 좋은지라...직접 찾아뵈기는 커녕 텔레파시를 통한 정신적 접촉조차도 불가능하니깐요."

"...너, 신체가 이계에 존재하지 않는거구나?"
(*이계: 인간계, 마계, 인간계와 마계를 연결해주는 중간 세계)
(*루는 현재 인간계와 마계의 사이에 봉인당해서 꼼짝 못하고 있는 상황)



그 새하얗고 아무것도 없었던 무(無)의 공간에서 누군가가 스르륵 나타났다. 그 모습은 마치 신과 같았다.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닫고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조차도 없는 듯한 모습. 저 영혼이 뭉쳐져있는 모습은 그녀의 생전모습 같다. 죽어서도 저렇게 구체적으로 자신을 묘사하여 혼을 재정립할 수 있다니. 생전의 덕과 영적인 능력(마력)이 엄청났나보군.


"이미 죽은 자가 나에겐 무슨 볼일이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조금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호오? 사랑? 그대는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나?"

"저는 윤회의 길을 거부하였습니다. 그 대신 제가 절대로 잊으면 안 되는 속세에 대한 미련과 그 미련에 대응하는 행동을 할 수 있게 해줄 감정들을 돌려받았고요."

"그만큼이나 그들이 자네에겐 가치있는 사람들인가? 좋다. 만약 내가 그들을 돕는다면 내가 얻게 되는 이익은 뭐지?"

"귀인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의 봉인을 복잡한 과정없이 한 번에 풀어버릴 수 있는..."

"그런 자가 내가 있는 그 인간계과 마계의 사이까지 올 수 있겠나?"

"가능합니다."

"좋다. 너의 요구조건을 말해봐라."

"그럼 우선 저의 모든 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브]



흐려지는 의식들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보인 건 수 많은 오류 창들과 나를 향해 달려오는 청. 하지만 미처 눈 앞이 전부 어둠으로 변해버리기 전 나는 어떤 힘에 의해 이상한 공간으로 의식만이 끌려왔다.



'이번에도 null 때문에 일어난 이상현상일까요?'


아까 나에게 슬금슬금 다가와 나를 좀먹어갔던 어둠과는 상반되는 하얀공간. 정말 새하얗고 깨끗해서 이미 많은 것에 찌들고 상처받고 검게 물들어가는 내가 있으면 안 될 듯한 그런 곳에...




'...아이샤!?'


뭐지. 왜 그녀가 이곳에 있는거지?

그녀는 처음보는 어린여자아이와 어떠한 대화를 하고 있고 나는 그 대화를 엿듣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이샤와 저 어린아이는 내 의식이 이곳에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 모양이다.



힐긋-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 그저 의식만이 날아와있는 이 상태에서 눈이 마주친다는 표현에는 그 의미상 오류가 있지만 어찌됐든 그녀는 내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이쪽을 쳐다봤다. 분명 아이샤는 내가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 후 지어낸 저 오묘한 표정은 이렇게 되버린 상황이 마음에 든다는 듯한 표정이었고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대화를 당당히 들었다.



"...그래서 완벽하게 죽어버린 저와는 다르지만 그녀 역시 죽음에 매우 가깝습니다. 혼이 억지로 용을 쓰며 신체에 간신히 붙어있지만 정말 괴로울겁니다."

"그래서 자네가 말하는 귀인을 그 소녀에게 보내 소녀를 살린 다음 나에게 보내겠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계약자 분을 통해 그 귀인을 보내겠습니다."

"좋다. 이로써 자네가 알고 있는 두 번째 사실까지 말했군. 마지막 사실은?"

"아까 저의 모든 사정을 말씀드릴 때 언급했던 '앙고르'. 현재 보이드 프린세스는 궁극의 마법을 완성했습니다. 그 마법을 조심해주세요."

"어떤 마법이지?"

"'오지 않는 죽음'이라는 마법인데 그 마법의 대상자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그 악마의 아군에게 쓸 마법인지 아니면 적군인 제 친구들에게 쓸 마법인지...아무튼 엄청난 마법이란 것만 압니다. 그만큼 위험하고요."

"흠 그렇다면?"

"그 마법이 시전되는 걸 부디 막아주셨으면 합니다."

"노력해보지. 그 자들...정말 쓰레기구나! 야망과 욕심이 너무 지나쳤다. 하! 내 지역을 뺏은 '그 잘나신 분'이 인간계에서도 그런 깽판을 치다니. 게다가 그 방식이 정말 저질이구나. 가만히 놔둘 수 없다! 결국 자네들과 나의 최종보스는 같은 자이니 걱정마라! 최선을 다해서 그 녀석들에게 복수해주마."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서로 돕고 사는 것 아니겠느냐?"

"눈을 감으시면 본래 계신 곳에서 깨어나실 겁니다."

"...아이샤, 너도 참으로 가련하구나.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내가 대신해서 그대의 동료들을 아껴주고 그들의 힘이 되어주겠다. 안심하거라."




그리고 어린아이는 아이샤의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아이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아이샤를 잡고 흔들며 그녀를 다그친다.


"이브...사실 나 너무 무서워."

'아이샤?'


그녀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지고 나를 한 번 꼭 안아준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 아니길 죽고 나서 항상 바라고 있어. 이 상황이 전부 꿈이었으면 좋겠어. 대체 왜..."

'...무슨 말입니까?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

"진실은 너무나도 가혹하고 잔인해. 만약 내가 이렇게 이치를 깨달은 죽은 자가 아니었다면 이 진실을 듣고 내 안의 모든 것이 무너졌었겠지. 정말 자살했을지도 몰라."

'알려주세요. 진실이라면 어차피 밝혀지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인간이 아니니...'

"흠. null코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을...?"

'무슨 의미죠? 이 코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이브. 미안해. 이제 이 공간이 무너질 시간이야. 아까 만난 그 마족 봤지? 비록 마족이지만 살아남은 너희에겐 큰 도움이 될꺼야. 훗날 만나게 될테니까..."

'저기...잠깐만요! 안 됩니다! 못 들은 사실들이 너무 많...'

"이브."





눈 앞에 아까 떴었던 오류 창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의식이 현실세계로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아이샤가 내 시야에서 점점 사라진다.






"너와 내가 사랑했던 우리들의 친구들."

'...'


"그들을 너무 믿지마."













"이브!"



정신이 돌아오고 오류 창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청?"

"정신이 들어? 괜찮아?"



[너무 믿지 마라]라...글쎄요...

내 몸 상태를 확인해보니 이미 상체와 하체는 두동강이 난 상태이다. 인간이었으면 얄짤없이 죽었을만한 상처다. 동력장치 속에는 엘의 조각 블루가 여러 개 박혀져 에너지원으로 쓰이고 있었다.


'이렇게 심각한 외부충격에도 코드가 날아가지 않은 건 이 엘의 조각 덕분인가보군요.'


"이브. 다행히 지원군이 왔어!"

"지...원...-지직-군...?"


언어를 담당하는 코드가 약간 손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이 코드는 복구가 쉬우니 나중에 해결하도록 하고...


"응! 다행이야..."

"그...ㅁ...ㅏㅈ..."


그 마족인가?


"놀라지 말고 잘 들어!"

"?"

"아이샤랑 엘리시스야!"







아, 아이샤. 당신이 우려하던건...

청의 등 뒤로 보이는 저 익숙한 두 모습은 틀림없는 아이샤와 엘리시스였다.














[오류]

-메모리카드 과부하. 최근 기억 중 일부 기억이 손상되었습니다.-


-가치 없는 기억 삭제, 메모리카드 정리-


10%...15%...78%...100%


-손상 기억 중 일부 복구 완료, 일부 복구 불가능-







-복구 불가능한 기억 (10초 후 영구삭제됩니다)-



"너와 내가 사랑했던 우리들의 친구들."

'...'

"그들을 너무 믿지마."






치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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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1-24 02:34 | 조회 : 2,082 목록
작가의 말
YluJ

그녀들의 연결점은 엘조블루! 예전에 트마프하겠다고 블루 엄청 모으고 다녔는데...지금은 더 비싼 다크 모으고 있습니다. (또륵) 읽어주시는 분들이 몇 분이나 계시는지는 잘 모르지만... 비루한 제 소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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