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Code: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감도 잡히지 않는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동굴 벽을 짚어가며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어둠 속을 걸어갈 뿐이다. 가끔 들려오는 박쥐와 벌레 울음소리만 현재 내가 있는 곳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이 암흑의 끝은 대체 언제쯤 나올까.

"아아... 진짜 배고프고 목말라."



잠시 눈을 감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동굴이 엄청 길다고는 하지만 이정도로 앞도 안 보이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고...


'대략적으로는 한 3일은 지난거 같은데. 중간중간에 이렇게 기대 앉아서 잤으니...'



그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잠깐이라고 생각했던 찰나의 순간도 실제로는 몇 시간이 지났을 수도 있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건 현재 내가 있는 이 공간에서는 그 의미가 전혀 먹히지 않는다.

동료들을 잃어버린 그 감정들, 신체적 한계, 탈출과 미래에 대한 부담감 모든 걸 나 자신에게도 숨겨버린 채 지금은 그냥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홀로 앉아 있었다.





내가 걸어왔던 반대방향에서 하얀 빛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와. 드디어 죽을 때가 된건가. 마족들에게 죽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배고프고 목말라서 죽는건가."




하얀 죽음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살며시 눈을 감으면 하얀 죽음은 그 모습을 감춰버린다. 또 다시 눈을 뜨면 그 죽음은 더 가까이 나에게 다가와 있었다.




"응? 뭐야?"

"거기 누구냐...퐁?"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건 분명 말소리! 그리고 이 말투는,

"풍고족?"

"빨간머리? 엘소드 살아있었구나 퐁!"


얼마만의 빛인가 이건. 일단은 살았구나.


"아모스! 알테라는 전멸인걸로 알고 있는데?"


그가 나와 만나서 반가운지 랜턴을 바닥에 두고 내 두 손을 잡는다.


"진짜 지옥이었다 퐁. 지상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풍고족들은 이미 죽거나 마법에 피폭되서 살아나기 힘들꺼다 퐁."

"너 말고 생존자들도 있어?"

"50명 정도는 알테라 광산과 오염지역이었던 운송터널에서 몸을 피하고 있고 나는 엘더에 구조요청을 하러 이 동굴을 지나고 있다 퐁. 생존자들은 습격당시 알테라 지하에서 작업하던 풍고족 광부들 뿐이다 퐁."

"지금 엘더도 정상이 아니라 과연 지원같은 걸 해줄 수 있으려나."

"우리는 지금 하멜 제 2의 어둠의 문이 열렸다는 것만 듣고 아무런 상황을 모른다 퐁. 엘소드...동료들은 어딨나 퐁?"

"..."

아모스가 건네준 물을 마시며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얘기해줬다.






어둠의 문 작전 대 실패

베스마, 알테라, 벨더, 하멜, 샌더, 라녹스 함락

최후의 방어선, 엘더

엘더의 혼란과 비정상적인 분위기

엘수색대 전멸

그리고 현재 나의 상황.




모든 것을 말해준 후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아모스는 크게 충격을 받은 듯 하다. 그렇지만 그의 성격답게 상황을 직시하며 냉정하게 현실을 정리하고 고민했다.


"안타깝게 생각한다 퐁. 특히 그 분들은 우리 마을의 은인들이자 존경하던 위인들이었다 퐁. 우리 마을 사람들 모두 그들을 좋아했다 퐁."

"응. 알아. 우리도 풍고족들 도움 많이 받았고 그래서 풍고족들의 죽음이 너무 슬프다. 내 친구들도 같은 마음일꺼야."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해야 한다 퐁. 네 말대로라면 지금 난 엘더에 가봤자 별 도움을 못 받을게 뻔하다 퐁."

"아모스. 염치 불구하고 부탁하나만 할께. 나를 좀 도와줘."

"응?"



알테라에서 내가 꼭 가야할 곳.

"예전에 엘수색대가 킹 나소드를 해치우고 폐쇄시켜버린 그 곳. 그 곳까지 데려다 줘."

"알테라 코어. 맞지 퐁?"

"응. 가는 방법이 있을까?"

"물론이다 따라와라 퐁.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을 지나야 한다 퐁."




또 한 명의 내 편이 나를 빛으로 이끌어준다.





"아모스. 이렇게 큰 일을 겪었는데도 너는 무너지지 않는구나."

"예전에도 우리는 괴롭힘과 동족들의 죽음을 몸소 경험하고 눈 앞에서 목격하고 그 폭력들을 견뎌왔다 퐁. 그리고 그런 우리를 구해준 건 바로 너다 퐁. 우리는 너를 믿는다 퐁."



이 대화를 끝으로 우리 둘은 그저 말없이 걸었을 뿐이다. 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걸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어버렸다. 내가 사람들을 배신한 것이다.

한 몇 시간이 지났을까. 아니 어쩌면 며칠이 지났으려나. 지쳐서 다리가 후들거리고 나눠먹던 식량이 다 떨어질 때쯤, 동굴과 광산이 이어진 문이 보였다. 아모스가 그 문을 열자 나는 예전에도 와 본 적 있었던 낯익은 광산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기 말고 운송터널로 다들 자리를 옮긴 모양이다 퐁. 하지만 알테라 코어로 가려면 여기서부터는 지상에 올라가서 평원을 지나야 한다 퐁."

"...마족들 있으려나."

"이 위는 풍고족들도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회귀의 평원이다 퐁. 그리고 시끄럽지 않을 걸 보니 마족들은 없을 것이다 퐁."

"이 위가 회귀의 평원이라면 가는 방법을 알아. 데려다 줘서 고마워 아모스. 이젠 위험하니까 나 혼자 갈께. 힘들겠지만 그래도 지하에서 계속 몸을 피해있길 바래."



폐기된 나소드들로 이루어진 회귀의 평원 끝의 나소드 산을 지나 나소드 폐공장을 따라 들어가면...

"알테라 코어에는 왜 가는거냐 퐁?"

"...이브를 찾으러."

"이브?"

"응. 이브를 처음 만났던 그 곳으로. 이브를 다시 데리러."



이러고 있으니까 마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다. 이브, 그 때는 우연히 너를 찾았지만 지금은 너를 찾기 위해 그 곳에 가고 있어.


"조심해라 퐁. 그리고 부디...다시 돌아와라 퐁."

"응."



지상에 도착해서 눈 앞에 펼쳐진 건 그 때와 다름없는 나소드들의 무덤, 회귀의 평원.

"확실히 접근하기엔 무리가 있는 지역이지."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그 때랑 같아. 아이샤, 레나 누나, 레이븐 형이랑 이 회귀의 평원과 알테라 평원을 지나고 나소드 생산기지를 지나 깊숙한 코어 속으로 들어갔어. 그 때랑 다른 건 지금은 나 혼자 뿐이라는 것.



"이브. 이브...너는 거기에 있어? 내가 다시 깨워주면 다시 돌아올 수 있는거야?"


폐기된 나소드들이 달그락거리며 내 질문에 대답해줬다. 마치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알테라 코어-


"분명 폐쇄시켜버렸는데 어째서 코어가 작동하는 거지?"



코어는 우웅거리며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전력도 끊어버렸고 그 전에 킹 나소드는 분명 사라졌는데...이 코어를 작동시키는 건 누구지?"


경계를 하며 몸을 숨기고 코어의 중심부로 들어갔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이브를 발견했던...



"이브. 느낌이 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코어를 울렸다. 어떤 소년의 목소리였다.

"진짜 취미 한 번 저질이군요."

"나는 네가 맘에 들어. 내 궁극적 목표와는 다르게 그냥 흥미가 있달까."

"당신이 제 전체 코드 중 빼내온 건 의식과 자아, 그리고 기본적인 동력과 관련된 코드군요. 대체 어떻게 쓰실꺼죠?"

"너는 나소드 치고는 너무 인간적이야 이브. 그 인간적인 면은 대체 어떤 코드 때문일까."

"제가 다른 기계로 이동하지도 못하게 모든 경로를 차단시켜 나를 가둬놓고는...수다나 떨려고 데려왔습니까!?"



앙칼진 목소리와 말투는 이브가 맞다. 이브...이브는 살아있었어.

"설마. 내가 그 분을 위해 필요로 하는 건 동력코드. Code: Nemesis 의 공격과 관련된 건 그냥 버렸어. 어차피 그런 간단한 공격코드는 내가 다시 짜면 되니깐."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제 2 어둠의 문도 당신들과 관련된 일입니까?!"

"네 의식과 자아를 데려온 건 그냥 내 곁에서 세상이 무너져가는 걸 구경하라고. 크하하! 괴로워하며 비명 질러봐! 재밌을꺼야. 매우 재밌을꺼라고!"



미친 놈. 이브가 잡혀 있는 저 기계에 다가가기엔 너무 장소가 오픈되있어. 어떻게 저 보라색 미친 놈을 해치워야 하나?


"뭐 그것도 그렇지만 그 놈의 모든 걸 뺏고 싶었어. 그 놈의 동료들, 행복, 명성 모두 다. 왜 그 놈만 모든 걸 다 가지고 빛나는거지? 짜증나잖아? 그래서 너를 훔쳐온거다."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무언가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늦어지면 안 된다는 판단이 섰다.


벽을 타고 올라가 공중에서 힘을 실어 칼을 내리 꽂았다.

"야 보라머리 미친 놈아. 넌 뭐하는 놈이고 누구냐?"

"엘소드...!"

"크하하하! 이건 엘소드?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반갑다."


재빨리 내 공격을 회피해버리고는 기계를 타고 공중에 떠버렸다. 심지어 나를 알고 있다.



89%...93%...

나는 검으로 기계를 내리쳐 망가트려 버렸다.

"이런! 아직 덜 보내졌지만 우선적인 목표는 달성했지."

"엘소드! 살아있었군요!"

"이브. 이제 그 기계에서 나갈 수 있어?"

"다른 기계로 빠져나갈 틈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미 제 자아를 제외한 모든 코드가 소실, 삭제되었기 때문에 전투용 나소드로서는 가치가 없어져버렸네요."

"됐어. 일단 네가 살았잖아? 그걸로 충분해."

"당신을 도울 방법은 현재 없습니다. 애드가 마지막으로 하려고 한 건 제 의식코드의 영원한 제어와 감금."

"저거 완전 변태 싸이코네?"


자세를 가다듬고 그 놈을 노려봤다.

"완성이야...완성이라고! 크하하하! 대단해...대단해!"

"미친 놈이 뭐라는 거야?"

"자 봐라. 내 새로운 코드. 새로운 여왕."




저 보글거리는 기포 속에 있는 나소드...


"이브...?"

그 놈은 예전에 내가 했던 것처럼 그 기계를 부숴버렸다.



"이브! 여기서 나가. 나가서 엘더마을에 있는 청을 찾아가. 엘더 병원이니까 음...아무튼 기계는 많잖아."

"엘소드. 당신은 어쩌려고요?"

"몰라. 될대로 되겠지. 청을 두들겨 패서라도 깨워. 그리고 하멜로 와 줘. 거기서 다시 만나자."

"제가 간다고 청이 깰까요."

"그 녀석 좋아가지고 깰 껄?"

"..."

그리고는 이브가 들어있던 기계의 화면이 꺼졌다. 그와 동시에 코어가 울리기 시작했다.


-시스템 시작, 고대 나소드_EVE TYPE_2-

이브다. 진짜 이브랑 똑같아. 저건 그저 겉모습일 뿐이겠지만.


-코드 접속 중...5...4...3...2...1..-








Code: Empress
*empress- 여왕







이브가 눈을 뜬다. 그리고 알테라 코어는 폭발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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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1-04 23:34 | 조회 : 2,008 목록
작가의 말
YluJ

귀여운 풍고족과 애드와 이브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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