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이탈하는 운명



신전이 이렇게나 넓었었나...걸어도 걸어도 똑같은 양식의 기둥과 천장, 바닥. 가도 가도 바뀌지 않는 검푸른 빛과 물향기가 나는 공기. 아아, 하긴 이런 곳에 루의 봉인을 풀어줄 만한 '무언가'가 있겠어? '무언가'는 무슨 생명체는 아무것도 없겠지.

다시 돌아가야겠다. 루 심심해서 죽기 전에.




"야."

"?"


누가 있다?



"너. 거기 키 큰 남자."

"누구세요."

"여기로 와."



순간 통로 저 끝에서 검은 그림자같은 손이 나타나 내 멱살을 잡고 검푸른 통로 쪽으로 끌고 가더니 또 갑자기 바닥을 뚫고 나를 밑으로 끌어당긴다. 왜 자꾸 지하로 지하로 떨어지는거지.

이미 여기까지 떨어졌는데 또 떨어질데가 있나.



쿵!



"아이고! 좀 사람을 불렀으면 잘 좀 다뤄주지."


여긴 또 어디야? 아까와는 정반대의 풍경이다. 내가 내려온 뚫린 천장에서는 여전히 검푸른 빛이 내려오고 올려다보니 위는 시련의 신전이 맞다. 하지만 내가 서있는 이 곳을 뒤덮는 건 검은 그림자와 연주홍빛.


"그래서 누구신데 절 불렀고 왜 이런 곳에 계시나요."



여우불 같은 빛이 구석에서 비춰졌고 그 빛을 통해 내 눈에 보인 것은 제단과 한 소녀, 그리고 여우.



"너 이름이 뭐냐?"


?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시엘입니다."

"이 소녀를 살리는 걸 도와줘."

"다짜고짜...무슨 상황설명이라든지 그 소녀가 누구인지,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시는게 우선 아닌가요?"

"...무엄하네 난 신이거늘!"

"전 마족입니다만? 그리고 제가 모시는 존재는 제 주인 루와 루가 모시는 존재 뿐. 그리고 신이라고 해봤자 이렇게 실체화하여 눈에 보일 수 있고 정황상 보자면...수호신 아니신가요?"



요술을 부려 여자로 변신하고는 나에게 다가온다.



"호오~ 괜찮네~"

"저기 사람으로 변신했으면 옷 좀 입으시죠."

"난 '한 가문'의 수호신 은. 그리고 저 소녀는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 아라."

"옷 좀..."

"저 아이는 원래 죽었어야 하지만 내가 여기 강림하고 그녀를 강제로 연명시켰어."



내 말은 하나도 안 들으시는 막무가내 수호신이시구나.



"저 아이를 살려줘. 밑밥은 내가 다 깔았어."

"어떻게요?"

"권한이 발동되도록 도와줘. 넌 할 수 있잖아."


할 수야 있다만...


"그래서 제가 얻는 무언가가 있나요?"

"소원을 들어줄게."

"것 참 혹하는 제의네요."


마침 바라는 것도 있으니. 내 표정을 보고는 여우가 나에게서 떨어져 뒤를 돌아 소녀에게 돌아간다. 여우의 부드러운 꼬리가 나를 잠시 스친다.



"제가 할 수 있단 것을 알고 있다면, 당신이 어떻게 될지도 알겠네요."

"...? 당연한 말을 아련하게 말하네. 저 소녀의 몸속에서 아이와 공생하며, 유한한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

"유한한 삶이라고는 하나 어차피 되게 오래 사실걸요?"

"저 아이만 살릴 수 있다면 영생을 살든, 짧은 삶을 살든 상관없어."

"당신은 신이고 저 애는 가문의 수 많은 사람들 중 고작 한 사람, 그것도 죽은 사람인데 당신 스스로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살릴 이유가 있나요?"

"응."




단호한 걸 보아하니 뭐 이미 마음은 굳혀졌나보군.



"좋아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듣죠 뭐."

"들려줄거라 생각해?"

"썰은 풀 때 제일 재밌는 거에요."

"호오? 계속 우리와 있으려고?"

"피차 저희도 왕따고 그쪽도 왕따잖아요?"

"맞는 말이라 더 기분나쁘네."


장갑을 벗고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주문은 마계에서 오는 주문. 아무리 루가 루의 지역을 빼앗겼다고는 해도 그 공기에 머무르고 있는 루의 마력, 루의 주문 그 권한.




-루의 하수인, 시엘. '킬리아크'의 권한을 감히 빌린다.-


이미 죽어야 할 운명을 신의 '최후의 권한'으로 운명을 박살내고 또 그 신의 수명을 주어 되살리는 대신 그 몸에 종속된다라...

폭발하듯히 마계에서 '루의 마력을 담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고 은은 엄청난 고통에 휩싸인 듯 하다.



"이거 그 아이가 원하는 건 맞습니까?"

"몰라."

"이거 완전 처음보는 사람한테 막대하는거나 강제로 살리는거나...거의 양아치 신 아닌가요?"

"그렇다고 치지 뭐. 말 시키지 마."



꽤나 괴로운 듯 해 보인다. 강한 마력을 담은 거센 바람은 계속해서 우리 세 사람을 감싸며 휘몰아친다.





-신의 최후의 권한: 이탈하는 운명-

발동조건: 이 권한을 제외한 모든 신의 권한을 박탈하고, 신의 위치를 포기할 때.

발동효과: 발동 후 신은 소멸되거나 이 권한을 부여한 자에게 영원 혹은 일시적으로 종속된다. 유한한 삶을 사는 생명일 시, 그 생명이 죽는 날 신은 소멸.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윤회의 길을 아무런 부작용 없이 거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새로운 것을 창조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발동시킬 마력이 없어서 마족의 마력을 빌리다니 수호신이~"

"너새끼 자꾸 깐족거리면 조금 이따가 내 손에 뒤진다."

"네네. 서비스 해드릴게요."




-'킬리아크'의 주문: 기존명령의 삭제-

발동조건: '킬리아크'의 권한을 가진 자의 시전

발동효과: 마법(=주문=권한)의 내용 중 주요내용을 제외한 한 가지 옵션을 삭제할 수 있다.



"뭔진 알 수 없지만 신의 권한 중 최소 1개에서 최대 4개 정도는 사라지지 않았을 거에요."

"우리들이 만난건 운명일까?"

"그 여자애 운명을 박살내신 분이 운명타령하고 계시네요."




강렬한 빛과 함께 서있기 조차 힘든 역풍이 불고 여우는 사라졌다. 이윽고 풍경은 처음 내가 여기로 떨어졌을 때와 똑같이 변했다. 천장구멍에서 은은하게 내려오는 푸른 빛, 그 외엔 그림자와 검주홍빛. 여우불과 제단. 여우신과 소녀만이 이 곳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도 신도 아닌 아이만이 그 자리에 대신 있을 뿐.




"아라. 눈을 떠요. 시간이 없어요."

볼을 가볍게 쳤다.


번쩍-



"엘소...드...!"

"엘소드?"

"누구시죠? 처음 뵙는 분인데...시엘?"

"맞아요. 오 은과 제대로 합쳐졌나본데요? 뿌듯하다."



잠시 혼란스러운 듯 눈동자를 떨고는 침묵을 유지한다.



"아, 은님이 제 안에 계시네요.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제 소원 들어주세요. 양아치 신님."

"...말씀하세요. 도와주신 은혜를 갚겠습니다."



여전히 제단에 앉아있는 아라를 끌어당겨 안고는 푸른 빛이 나오는 구멍으로 향했다.



"...! 무...무슨...!"

"올라갑시다. 내 소원은 저 위에 있어요."



루, 너무 자리를 오래 비웠죠? 곧 갈게요.



"제 주인인 루를 봉인에서 풀어주고 같이 이 꿉꿉한 '시련의 신전'을 나갑시다."















그 밖에 또 다른 시련이 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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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7-08 22:30 | 조회 : 1,861 목록
작가의 말
YluJ

오랜만입니다...(수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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