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괴로워하다

" 공주마마. 진정에 좋은 차를 내왔습니다. "

" 갑사합니다. 스승님... "


나와 마찬가지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어머니의 혈육이자 나의 스승님이시고 우리 카르리안트 왕국의 제정 고문인 릿소 르 비완느였고, 현 비완느 후작가의 가주이기도 하셨다.

유일하게 무서운 거 하나 없는 정신 나간 왕이 멋대로 건들 수 없는 인원 중 하나이며 날 보호해주는 단 하나 뿐인 믿음직스러운 삼촌님이었다.


" 어찌하여 그런 사고를 치고 오신 겁니까. "

" 저 보고 스승님 또래의 귀족들에게 혼인하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울컥했습니다. "


게다가 제 앞에서 여자를 탐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겠습니까? 라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 할 말을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속에 꾸역꾸역 넣었다.


" 비록 지금은 저리 되셨으나 현명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니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


너무 미워하지 말라니!!! 스승님의 말이 오히려 더욱 서러웠다. 진짜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이토록 공감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 했다.

하지만, 내가 무슨 수모를 겪는지 제대로 알지 못 하시니 어쩌면 그것이 더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그 작자의 손에 잔인하게 죽은 이후로 정기적으로 열리는 귀족 회의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왕국에 오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귀족 회의에 참석 안 할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그거 아세요? 스승님? 어머니를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아버지는 이미 죽었어요. 그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의 몸을 차지한 더러운 놈은 아버지가 아끼지 마지 않던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죽였고요.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어머니를 잃고 상처 받은 스승님에게 더더욱 상처를 주기는 싫었으니 말이다.


" 스승님... 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미 제 인내력은 한계가 찾아온 것 같아요. 수많은 암살자들을 쓰러뜨리며 더이상 왕궁에서의 삶을 유지하기 싫어요. "

" 공주마마. 제가 버티라 말씀드리면 싫어하실 것이죠? "


조심스럽게 묻는 스승님의 말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스승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품에 가져온 상자를 하나 꺼냈고, 곧바로 내게 어머니의 유품 중 하나인 목걸이로 연결한 열쇠를 스승님께 드렸다.

어머니의 마지막 유품 중 하나인 무언가에 쓸 수 있는 열쇠를 상자의 자물쇠 안에 넣자 굳건히 닫혀 있던 상자의 문이 열렸고 그 곳엔 먼지가 잔뜩 쌓인 하나의 양피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 저희 비완느 후작가는 카르리안트 건국왕의 가신이었고 그의 명령을 받아 이 거대한 왕궁을 건설했습니다. 그 때 만들어진 궁정의 지도입니다. 이 지도를 사용한다면 아무도 모르게 빠져 나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

" 허나... 이 사실을 아... 폐하께서 아십니까? "


차마 아버지라는 말을 쓰지 못 해 폐하란 호칭을 사용하자 스승님의 얼굴이 아주 조금 일그러졌고 나는 그렇다고 해서 호칭을 바꿀 생각은 없어 스승님께서 가져오신 차를 한 모금 마셔 바싹 마른 목을 축였다.

아마 내가 평생 그 작자를 입 밖으로 아버지라고 부를 날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이미 죽었으니까... 아버지의 몸을 차지한 작자에게 아버지라고 부를 생각 따윈 1도 없었다.


" 아니요. 이미 1000년도 더 지난 일이니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겠지요. 아는 이는 오로지 비완느 후작가의 가주 단 한 명 뿐입니다. 폐하께서 알아차릴 가능성은 낮습니다. "

" 그렇다면 이 지도를 사용해서 왕궁을 나가면... 스승님께서 제일 먼저 의심받으시겠지요? "


현재 어머니가 날 위해 남기신 수많은 사람 중에 왕궁의 출입이 자유롭고 신분이 제일 높은 이는 오로지 스승님 뿐이었다.

물론 그들이 나의 패를 확인하지 않는 이상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스승님처럼 내 사람이 확실하고 그 신분마저 높은 사람은 한 명 뿐이었으니 스승님께서 위험해질 확률은 9할 이상이었다.

게다가 내가 그렇게 왕을 들쑤시고 왔으니 분명히 오늘 밤에는 그가 날 죽이겠다고 찾아올 확률이 다분한 상태에서 스승님을 두고 도망친다니 가당치도 않았다.


" 공주마마. 공주님을 제외한 모든 혈육이 폐하의 손에 죽은 순간부터 죽은 몸이었습니다. 비록 비완느 후작가의 후계를 잇기 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아남았지만 공주마마께서 돌아가셨더라면 전 버틸 수 없었을 겁니다. "

" 싫습니다! 스승님을 희생시키라는 겁니까? "

" 공주마마가 살아남을 길은 이것 하나 뿐입니다!!!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애초에 공주마마가 아니였더라면 전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


무얼 선택하든지 왜 내가 아끼고 존경해 마지 않는 당신의 죽음이 올 수 밖에 없는걸까 미치도록 화가 났다.

난 무력하기에, 지금의 나는 내가 원하는 길을 갈 수 없었기에 그가 말하는 선택지 이외의 방법은 없다. 아니 부정하고 싶었지만 한 가지 있었다.

그가 말하는 대로 귀족들과 혼인하는 것. 아마도 여왕의 이름은 얻을 수 없겠지만 왕비의 이름을 얻고 스승님을 지킬 수 있었다.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지킬 힘은 있을 것이다. 날 지지하는 유능한 자들도 등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왜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 하는 거지? 내가 검을 배우는 이유도 아무것도 못 하는 내가 무기력해져서 더이상 그런 무기력한 내가 싫어서잖아. 그런데 왜!!!


" 난 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걸까요? "


죽기는 절대로 싫었다.

비록 죽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한 적이 수 백번 아니 수 천 번... 미쳐 돌아가는 이 왕국을 볼 때마다 생각을 했지만 어머니와 오라버니가 죽어갈 때의 비명이 날 속박하고 있었다. 아프기 싫었다. 온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근육통도 죽음보다 덜 아플 것 같았다.

모두가 거짓을 말하는데 누군가가 홀로 진실을 말한다면 그 진실이 곧 거짓이 된다. 이 미쳐 돌아가는 왕국에 제정신으로 버티는 것도 더이상 지쳤다. 아니 이젠 그들이 정상이고 내가 미친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된다.

나는 도저히 새까맣게 타오르는 심장을 내버려 둘 수 없어 심장을 부여 잡았고 그러자 손가락으로 누르는 부분이 고통으로 욱신거렸다.

하지만 이젠 그렇더라도 아무렇지 않았다. 차라리 육체적인 고통이면 나았을 테니까. 육체적인 고통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없앨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야 말로 천운일 것이다.


" 왜 난 무기력한거야!!! 10배! 아니 100배로 노력하는데 왜!!!!!! "


아아...! 차라리 미쳐버렸으면 덜 고통스러웠을 것을!!!


* * * *


나는 도저히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고, 그러자 아침을 챙겨온 것인지 막 들어오는 란트가 눈에 들어왔고 곧바로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피가 흐른 자국이 선명한 상처와 멍들이 란트의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분명 그 망할 작자가 함부러 손을 놀리고 간 거겠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것이 그 작자는 남자를 처소에 들이는 버릇이 없다는 점이었달까나?

애초에 란트의 얼굴이 기사치고는 너무 잘생겼으니 그를 침소에 들인다고 해도 그리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감상을 늘어뜨릴 때가 아니었지. 나는 곧바로 아버지의 폭력에 대비해서 구비해 놓은 상처약을 그가 상처난 곳에 골고루 발라주었고 그러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날 바라보았다.

보통의 여인이었더라면 분명 란트와 같은 얼굴을 맞대고 있다면 얼굴을 붉히고선 나중에 꺅꺅 됐겠지만 적어도 나는 보통 여인이 아니니까 딱히 큰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오히려 그런 걸로 얼굴을 붉힐 시간에 어떻게 결정을 할지 선택하고 싶었다. 엄연히 란트가 그 작자에게 맞은 것도 나 때문이었으니까...


" 당신 때문이 아닙니다. "

" 그나저나 검 수련은 열심히 하고 있어? "


그는 말을 하려다가 내 얼굴을 보고선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고 간단한 응급처치를 마치고선 나는 피와 고름이 잔뜩 묻은 수건을 내려놓고선 그 수건을 씻으려 했고 그러자 그가 나의 손을 급히 잡았다.

나와 똑같이 굳은 살이 잔뜩 박힌 하지만 조금 더 투박하고 크고 차가운 손...


" 제가 치... "

" 가만히 앉아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터지기 일보 직전이니까. "


지극히 가라앉은 내 목소리가 커다란 방에 울리자 그는 곧바로 내가 방금전까지 누워 있던 침대에 앉았고 방 안에 마련된 화장실에서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선 눈물을 흘렸다.

바보 같이... 못 지켜줬어... 아니 더 위험하게 만들었어...

그를 배려한답시고 한 행동이 더 큰 풍파가 되어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 했어...


[ 내 딸... 모두를 지켜주렴... ]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환청에 나는 곧바로 주져앉았고 수 백 마리의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불쾌함이 찾아들었다.

지켜주라고. 모두를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난 모두를 지켜주지 못 한다. 그렇다면 나 스스로 저울질을 해서 결정해야 되는 건데 그러지도 못 했다. 결국 난 모든 것이 모순 투성이인 것이다.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으려다간 잡은 토끼마저 놓친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도 아닌데 그 말 하나에 묶여 잡은 토끼마저 가장 먼저 지켜줘야 하는 사람을 못 지켜준 것이다.


" 정신차려. 나나야... "


그리고 나서 나아가자. 조금 더 이상적이게 조금 더 완벽하게 있는 힘껏 구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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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5-26 20:21 | 조회 : 1,075 목록
작가의 말
유리아에덴

미친 너와 나의 로맨스는 월,금 연재물인데 제가 월요일에는 야영을 가서 못 올릴 것 같아요! 다음주에는 수, 금에 올리고 다다음주부터는 정상적으로 연재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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