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만남

" 공주마마. 폐하의 호출. "

" 조용히 하도록 하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


서서히 미쳐가는 아버지의 호출이 올 때면 아버지로 인해 입은 상처가 미친 듯이 욱신거렸다. 아버지가 호출 할 때면 도망치라는 하늘의 계시인지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왕궁에서 도망치라는 신의 계시가 아닌 듯 싶었다.

아니, 애초부터 신이 정녕으로 있었더라면 그녀의 아버지를 미치게 해 가족들을 죽이게 내버려 두지 않았겠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신도 나마저도 죽었다간 이 왕국이 망할 것이라고 그를 말린 신하들이 있었기에 아버지가 날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몇몇 호사가들은 그들이 왕을 말린 충신이라고 말했지만 애초부터 그들이 충신이었더라면 무력한 공주가 아니라 나중에 왕이 됐을 때를 대비해서 세력을 키워 놓은 오라버니를 살렸겠지.

날 감싸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길고 짧음을 추측하는 비겁한 자들 뿐이었다.


" 지금 출발하도록 하자꾸나. "


* * * *


" 공주마마 납시옵니다. "


구두소리를 내며 도착한 회의장에는 아버지의 최측근이자 미친 아버지가 유일하게 신뢰하는 유일한 1인. 현재 왕을 제외하고는 모든 권력을 장악하다 싶이 한 집사가 나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미치고 나선 줄곧 그에게 모든 명령을 내렸고 그가 내뱉는 말이 곧 왕의 말이 된 이 왕국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였다.


" 아바마마께선 어디 계시지? "


나의 반말에 상당히 불쾌한 듯 양미간을 몰래 찌뿌렸고 나는 그런 집사를 보고 나 역시도 그에게만 보이게끔 미소지었다.

아무리 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해도, 내가 이젠 아버지의 눈 밖에 나간 자식이라 할지언정 나는 왕족이었고, 그는 시종에 불과했다.

즉, 그가 날 싫어할 지언정 절대로 나에게 직접적으로 무어라 할 자격은 없다는 이야기였다.


" 오늘 폐하께선 안 나오십니다. "

" 그게 무슨... 아바마마께서도 안 나오셨는데 날 부르다니 그대에게 언제부터 그럴 권한이 있었지? "

" 단, 폐하께서 공주마마를 호위할 기사를 소개해 주라 명령하셨습니다. "


갑작스러운 무슨 호위 무사? 수 백 번 여러 귀족들이 날 죽이기 위해 보낸 암살자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물리친 나였다.

그런 나에게 호위 기사라니 오히려 어중간한 기사들은 내겐 오히려 방해물이었다. 사람들의 눈 앞서는 함부러 검을 사용할 수 없었고, 내가 검을 쓰는 모습을 본 암살자가 있을지언정 대대적으로 밝힐 수 없었으니까.

호위 무사는 24시간 보호해야 하는 대상을 보호해야 했고, 그것은 어떻게 본다면 날 감시하겠다는 의미를 밝힌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 본다면, 호위 무사를 뽑는다는 이야기도 그의 입에서 시작된 것일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순순히 그의 의지에 따르는 마치 인형과도 같은 공주를 연기해야 할 때였다.


" 알았다. "


가증스러운 미소를 자아내자 그의 입가가 움찔거렸고, 그것은 그가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들 때, 하는 행동이었다.


" 이번에 새로 서임한 기사, ' 엠브란트 ' 입니다. "

' 엠브란트...? 성이 없어? 설마 평민 출신인 건가? '


멍하니 자리에 있던 나는 주위의 시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들은 그들대로 그 의미를 해석하고 있었다.

어떻게 공주에게 명망있는 가문의 기사가 아닌 평민 출신의 기사를 서임할 수 있는 거지부터 시작해서 이번 기사 서임이 날 죽일려는 집사의 수작이 아니냐는 둥, 왕이 드디어 공주를 버리는 것이냐는 둥 여러가지 증명되지 않는 소리들뿐이었다.

애초부터 이딴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 비록 평민 출신의 기사이지만 그 실력만큼은 확실하다고 전 공주마마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 하지만... 그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의 호위를 거부할 수 있겠더냐? "

" 그거야 물론 공부마마의 개인의 의지이시지요."

" 그럼 그를 서둘러서 공주마마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 * * *


" 지고하신 왕국의 난타나 릴리 카르리안트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


앞으로 날 호위하게 되었다는 엠브란트가 내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고 나는 그런 엠브란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평민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멋있는 남자였지만 지금 나에겐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나ㅔ게 방해가 될 존재인가 그러하지 않는가 이거 하나 뿐이었다.

그가 집사장이 날 감시하기 위해서 보낸 스파이인가 아님 어머니가 날 살리기 위해 남긴 카드인가 그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 편히 나나라 부르면 된다. 난 복잡한 것이 딱 질색이니 말이다, "

" 허나 공주마마는 이 나라의 지고하신... "

" 난 네가 불편하다. 난 나 혼자면 충분했고 그러니 신경쓰지 말고 넌 네 검술이나 연마하거라. 평민 출신의 기사이면 남들보다 10배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


그래 여인의 몸을 타고 태어난 나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너와 내 운명은 참으로 기구하구나. 나는 [ 성별 ] 이란 한계를 부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너는 [ 신분 ] 이란 한계를 부셔버려야 하니 말이다.


" 공주마마께서 검술을 배우시는 것은 애초부터 알아차렸습니다. "

" 그게... 무슨 뜻이더냐... "

" 아까 전 인사를 할 때 잡은 공주마마의 손은 훈련된 기사의 손이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 하리라 생각하신 겁니까? "

" 너도 보통 인간은 아닌 것이구나. 하긴 평민 출신이 기사가 되었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차려야 되었던 것을. "


어리석은 집사장은 결코 그 안에 숨은 하나의 짐승을 알아차리지 못 할 것이 뻔할 뻔자였다.

그 안에 몰래 언젠가 날 뛸 때를 하염없이 기약하며 숨어 있는 짐승은 그와 같은 짐승이 아닌 이상은 절대로 알아차릴 수 없는 종류의 것.

현재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힘쓰는 한낱 고양이는 절대로 그를 알아볼 수 없을 것이었다.


" 넌 그 무엇도 아니었구나. "


집사장의 카드도 어머니의 카드도 아니었어. 다시 말한다면 그가 나의 편이 아니라는 이야기였지만 나와 동류의 짐승이 한낱 고양이의 카드가 아니라는 사실은 불쾌함을 지우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어리석은 집사장은 평민의 기사를 나에게 붙여 나의 지위를 하락시키려 했으나 그 오만한 판단은 잘못 되었다.


" 난 내 사람이 아닌 이에게 억지로 내 사람이 되라 말하는 자들과는 다르다. "

" 그것이 제게 중요한 사항이었습니까? 기사가 되기로 했으니 기사가 되어 당신의 수족이 될 뿐입니다. "

" 엠브란트라 하였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 "

" 저야 말로. "


* * * *


한참 검을 연습하다가 체력이 한계에 잦아들자 하늘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란트는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 수건을 건내었고 나는 란트가 건낸 수건을 받고선 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왕궁 한 쪽에 멀리 떨어진 나만의 수련장은 오로지 나만의 수련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애초부터 크로커스 궁의 한편에 마련된 정원이었으니 궁녀들이 찾아오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 그나저나 이런 곳에 수련장이라니 공주가 어떻게 검술을 연습하는지에 대한 집사장의 물음도 이해가 되네요. "

" 이 곳은 나만의 정원이니까. 게다가 독사나 다름이 없다는 소문이 도는 내가 주로 머무고 있는 곳에 오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도 잘 모르겠고. "


유일하게 남은 정상적인 왕족.

내가 죽는다면 카르리안트 왕국은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러 왕국의 왕족들은 물론이고 카르리안트의 귀족마저도 날 죽이고 싶어 하는 자들이 널렸고, 그런 나의 옆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니, 다가온 사람들은 모두 하나 둘 씩 죽어나갔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외로움에 익숙해졌다.


" 공주마마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돌던 간에 제겐 딱히 상관 없습니다. 그저 이상적인 주군이 필요할 뿐이니까요. "

" 그래서 고히 자랐을 듯한 공주의 호위를 맡게 되었을 때의 기분은 어땠어? "

" ...... 딱히 고히 자랐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의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말이에요. "

" 딱히 부정할 수는 없네. "


최대한 미소지으며 란트에게 말하자 란트는 멍하니 내 모습을 바라보았고 곧바로 몰래 입고 온 수련복을 대신해서 거치장스러운 드레스로 갈아입었고 곧바로 고개를 숙인 이후 나는 궁으로 향했다.

이 순간 흉터가 미친 것처럼 욱신거렸기에 딱히감이 좋지 않았다.


* * * *


미쳐버린 나의 유일한 혈육, 나머지 혈육을 모두 죽인 아버지가 아름다운 여인들의 속살을 탐하며 날 마치 오물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그를 바라보았다.

카르리안트의 평안을 가지고 온 남자. 하지만 그는 가족의 평안을 가져오지는 않았고 나는 그런 저 남자를 미친듯이 미워했다.


" 난타나 릴리 카르리안트가 위대한 카르리안트의 태양, 킬리오라 프실라 카르리안트 전하를 뵙습니다. "


나의 인사가 이젠 역겹다는 듯 남자는 이번에는 딸이 아닌 여인을 바라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어쩌면 저 남자는 저토록 증오스럽고 끔찍할 수가 있는 것인가 이제는 그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은 지경이 되었다.


" 아아. 갑작스럽게 부른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

" 네..? "


나는 왕이 나에게 건내는 것을 받아냈고 그 곳에는 카르리안트의 온갖 귀족 남성들에 관한 정보가 가득 적힌 양피지 뭉치였다.

저 미친 왕은 얼마나 날 괴롭혀야지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이젠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어머니와 오라버지에 대한 복수 따윈 모두 잊어 버리고 차라리 스스로 죽는 게 훨씬 덜 모욕적이지 않을까 의문이 들었다.

게다가 양피지에 있는 대부분의 귀족 남성들이 이제 손녀를 볼 듯한 남자들이었고, 어떻게 본다면 내게 첩이 되라는 명령이나 다름이 없었다.


" 이들 중에서 네 처를 구할 것이다. "

" 허나... 카르리안트에 남은 유일한 적통의 왕조ㄱ... "

" 아무리 네가 유일한 적통의 왕족이라 할지라도 넌 여인이지 않느냐. 어떻게 여인에게 이 왕국을 맡길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난 네가 귀족과 결혼해서 그 귀족이 이 왕국을 다스리는 것이다! "

" ............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했다. 어떻게 아버지라는 작자가 딸의 앞에서 어머니가 아닌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이젠 자기 뻘의 남자와 결혼하라고 할 수 있는 거지?

게다가 이들 중 대부분은 이미 한 번 결혼한 남자들로 심지어 몇몇 남자들은 부인이 죽은 것도 아니었다.


"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

" 무어라!!! "

" 폐하께서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하지만... 결혼 문제만큼은 절대로 손 놓고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

" 널 절대로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

" 가만 두지 마세요. 저도 손놓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 말이에요. "


나는 애써 부들거리는 손을 쥐어 잡고선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아냈고 최소한 저 남자에게 눈물을 보이기는 죽도록 싫었기에 곧바로 아버지의 집무실에서 뛰쳐 나왔다.

어떻게 내 인생은 이따구일 수가 있는 것일까 갑작스럽게 울음이 터져나왔다.

이따구로 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신이 내게 선포한 운명은 이런 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고? 그것도 모두 그럴만한 힘이 있는 남자들의 어이 없는 이야기겠지. 나는 애초에 그런 것이 허락되지 않는 [ 여자 ] 인걸...


" 공주마마. 보는 눈이 많습니다... "

" 보라고 그래... 이게 자기들이 그토록 입방아를 찧어대는 이 나라의 공주니까... "


도저히 나의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다.

어머니... 오라버니... 어째서 나만 두고 멀리 멀리 떠나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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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5-24 20:12 | 조회 : 1,328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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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에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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