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M의 단상. 03

"아저씨도 남 말 하지 마시고 운동 좀 하시죠. 걸어서 30분인데 걸어오시면 될 걸.”

그는 나를 보지도 않고 또 술병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나는 널브러진 병을 치우고 대충 그의 앞에 앉았다.

“오늘만 타고 온 거야.”

“산 지 1년 된 주제에 닳지 않는 운동화 굽. 오늘은 안개가 꼈는데 옷 습기가 별로 없네요. 오는 동안 하마가 공기라도 먹었나? 오늘 우산도 지팡이 대신 들고 오신 것 같은데, 여기 오는 길에 비포장도로가 하나 있는 걸 생각하면 저렇게 우산 끝이 멀쩡할 수가 없죠.”

속으로 뜨끔했다. 이 녀석 앞에선 감출 수가 없나보다. 2년 전 그때도, 그는 자신 외의 상황을 보던 관찰력이 뛰어났던 사람이었다.

“뭐 이건 부가적인 문제고, 결정적인 건 방향제 냄새가 안 빠졌네요. 장롱에서 꺼낸 옷에서 30분 동안 걸어왔는데 장롱 방향제 냄새가 남았다곤 못하시겠죠.”

“……그 증거 찾는 버릇은 여전하군. 살려고 아등바등했던 그 때의 잔재인가.”

괜히 지는 것 같아 어깃장을 놓고 싶었다.

“와, 아저씨 너무하네. 그거 아저씨 때문이잖아요. 내 평생 수갑은 다신 안 차고 싶습니다만.”

“그래, 미안하군.”

더 말해봐야 손해였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아니 사실, 말로는 이 녀석을 이길 수 없다. 말만 해봐야,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가고 말 것이다. 말 하면 할수록, 그가 파놓은 함정에 깊게 빠진다. 하지만 한 마디도 못하고 지는 건 억울하다. 뭐라도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개미귀신 같은 놈.”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는 마시려고 들었던 병을 멈추고 말끝을 늘이며 장난스러운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저게 칭찬이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아저씨도 한 잔 할래요?”

그가 내민 병을 집었다. 입으로 가져다대었다. 술 향기가 올라왔다. 신 과일향기 사이로 진한 알코올이 고개를 디밀었다. 낮술은 취향이 아니다. 역시 그만두었다.

“그보다, 날 부른 이유가 뭐야? 심지어 일하는 도중인데.”

가끔 뜬금없이 부르긴 하지만, 일하는 도중에 부를 만큼 경우 없는 놈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게 상반신을 노출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만큼 그는 심심하다고 일하는 아마추어는 아니었다. 본인 입으로는 늘 심심하기 때문이라지만.

“요즘 의심 가는 사건이 하나 있어서요. 조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0
이번 화 신고 2015-08-28 08:15 | 조회 : 948 목록
작가의 말
헤르닌

호흡조절이란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만.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