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M의 단상. 02

이번에 부른 이유는 뭘까. 지팡이를 양 다리 사이에 끼워놓고 턱을 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귀찮은 녀석이라 생각하며, 그가 날 불렀을 이유를 열심히 생각해보았다. 겨우 40도 못 채우고 ‘직장생활’을 때려치워놓으니 내게 남는 주변인은 없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신 지 3년 째. 집안에 강도가 들었었다. 잠이 덜 깬 어머니가 강도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흉수에 찔리셨고, 소란을 듣고 깨어나신 아버지는 80이 가까운 노쇠한 몸으로 강도를 상대하다 사고를 당했다. 제대로 남은 증거조차 없도록 태워버린 그 강도를 잡을 방법이 없어 모든 경찰들이 손을 내저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불쾌했다. 모든 걸 미뤄놓고 그 강도만 쫓다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말았다. 부모님 외에 내게 남은 친척조차 없었기에 직접 도움을 받을 사람은 없었다. 그 때 그를 만났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곳에서. 아마 그가 없었다면, 나도 곧 부모님을 따라갔을 것이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감아버렸던 눈을 떴다. 여기도 안개가 진하게 껴있었다. 어둡지만 시간대는 낮인데도 불구하고 이 동네는 너무나도 조용했다. 당연히 조용할 수밖에 없는 거리일지도 모른다. 붉은 등이 거리를 밝힐 때 쯤 스멀스멀 사람들이 나타나는 곳이다.

그 때쯤 되면 사람들이 하나 둘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닌자’처럼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주변인에게 들킨다면 곱게 끝날 리 없는 곳으로, 나방이 불에 섶을 지고 들어가는 그 상황에서 자신만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실소가 나왔다. 지팡이를 짚고 서서 55-8번지를 눈에 담았다. 조그만 오피스텔이다.

엘리베이터도 없어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고작 3층을 올라왔지만 숨이 가빴다. 빌어먹을 놈의 무릎. 아니, 계단. 엘리베이터 하나 없다니, 괜히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우산을 벽에 걸쳐 놓고 잠시 숨을 고른 후에, 301호 앞에서 벨을 울렸다.

“네 누……, 에이. 들어오시죠, 아저씨.”

열린 문 앞엔 꽤나 조그맣고 어린 남자아이가 서 있다. 내가 아닌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의 표정은 자신도 나를 불렀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것처럼 보였다. 상반신은 누드인 채, 겨우 바지 하나만 걸치고 나왔는지 옷도 단정하지 않다.

그때도, 지금도 이 소년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똑같았다. 교복을 입혀놓으면 딱 고등학생 1학년쯤으로 보일 게 분명하다. 입에서 지독할 정도로 술 냄새가 날 정도로 마셨을 와인병과, 방금 전까지 격정적이었음을 보여주는 키스마크가 그의 상반신 한 구석에 조용히 남아있지만 않았으면, 충분히 그랬을 것이다.

“술 좀 끊지.”

그를 본 순간 이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먼지가 눈에 보일만큼 청소하지 않은 방 안에서도 술 냄새가 났다. 코를 틀어쥐고 싶을 만큼 지독한 냄새까지 섞여있었다. 문제는 술에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먼지가 켜켜이 쌓여 생긴 그을음 같은 자국들도, 그가 마셔댄 저 알코올 그 자체인 술에서도, 환기가 되지 않아 나는 꿉꿉한 방의 냄새들도 한 몫 하는 건 사실이겠지만, 아마도 그건 부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전 별로 안 나는데요?”

“원래 자기 냄새는 못 맡는 법이지.”

이런 방에서 살면 금방 골병이 들게 뻔했다. 아니, 이미 병균이 왔다 제 집인 줄 알고 이리저리 신나게 들쑤시고 다니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럼 아마 저 녀석은 병균들의 거대한 숙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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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25 21:53 | 조회 : 1,007 목록
작가의 말
헤르닌

카테고리가 BL이었군요. 미스테리로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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