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M의 단상. 01

런던의 거리에서나 볼 만한 짙은 안개가 밖을 덮고 있다. 한 치 앞을 보기 위해 눈을 세 배 더 크게 떠야 하며, 비가 오지 않는데도 옷 전체에 물을 가득 머금게 하고 그 물때로 적셔버려 모두를 때 끼고 지치게 만드는 그 스모그 같은 안개 말이다.

런던 본토도 아닌 주제, 런던만큼 짙은 안개로 세상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 아직 이른 새벽, 나는 그렇게 나오고 싶지 않은 귀찮은 길을 나서야만 할 것이다. ‘그’와의 약속 때문이다. 역시, 오늘 처음부터 한 번 다리를 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젠장. 괜히 욕을 한 번 하고 싶었다.

일어나자마자 잃어버린 무언가를 절절히 느껴야 하는 그 감정이 싫었다. 원래 습기가 찼을 그 나라 양반들은 잘 견디는 날씨겠지만, 난 언제나 이런 날씨에 욕을 지껄이며 무릎을 절어야 한다. 가득 찬 습기로 꿉꿉한 옷과 붙어 축축하게 느껴지는 온 몸이 불쾌하다. 자꾸 옷이 내 몸에 달라붙는 기분이다.

살이 찌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관리하고 살았는데 어쩔 수 없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한 나잇살이 옷에 닿아 더 달라붙는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도 내가 지금 싫고 짜증나고, 모든 것을 다 집어치우고 싶을 만큼 짜증날 정도로 몸이 아프게 된 시작은, 몸이 갑자기 크기 시작했던 중학교 3학년 때,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고 나서 늘 느끼고 있는 통증에서부터였다.

넘어지고 계속 가슴을 부여잡고 콜록콜록, 기침을 했던 기억이 있다. 지구와의 몸통박치기를 무릎으로도, 가슴으로도, 배로도 시전 했으니 정신을 바로 차린다면 그것도 또 나름 초인일 것이다. 아주 문제가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서도, 무릎은 계속 자기가 불편할 때만 욱신거리고 지끈거리며 쉬고 싶다는 요구를 무던히도 드러냈다. 삼십이 넘고 나니 자연스레 지팡이를 옆에 끼고 다녔다. 그리고 이런 날씨는 지팡이조차 잡고 싶지 않은 날씨였다. 원래 걷는 건 질색인데, 오늘은 정말 말로만 걸어간다 해도 내키지 않는 날이었다.

그렇지만 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의 약속은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다. 겨우 남자 애 하나 만나는 일인데도 어쩔 수 없다. 중요한 일이라며 꼭 걷기 싫은 날이라도 나와 달라 하다니. 이런 날씨를 마치 예견이라도 한 것 같다. 잠옷을 벗고 외출복을 찾았다. 뭐, 사실 잠옷이라 할 게 있나 싶지만.

외출복도 그저 그런, 상태가 그 중 제일 괜찮은 걸 꺼내 입었다. 자꾸 혼자 살다보면 외출복을 빨래할 타이밍을 잘 못 잡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괜히, 예전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다. 외출복을 찾던 사이에 껴있는 훈장이 달린 셔츠가 눈에 띈다. 애써 무시했다. 볼 필요가 없는 걸 굳이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나마 덜 때가 탄 옷으로 대충 골라 입고 넥타이를 맸다. 아, 면도를 깜빡했다는 사실을 잊었다. 대충 전기면도기로 정리할까 했지만 그만 뒀다. 여자를 만나러 가는 일도 아니고, 이런 날씨에 부른 그 녀석이 잘못이지 싶었다. 지팡이를 하나 꺼내들까 하다가, 대신 우산을 챙겼다. 긴 우산이어서 지팡이 대용으로 하기 좋았다. 여기서 그 녀석의 집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걷기는 싫었다. 마침 비도 올 것 같이 무릎이 아팠다.

‘그 녀석이 또 뭐라고 하겠군.’

하지만 나는 그의 잔소리보다 내가 아프고 힘든 게 더 싫다. 길거리에 나가 택시를 잡았다.

“미리내 2 가 55-8번지.”

택시에 몸을 맡기고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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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7-15 15:58 | 조회 : 1,484 목록
작가의 말
헤르닌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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