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백모래는 죽지 않아요

"영정님..! 정말로... 정말, 하실 생각이십니까?"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



입을 꾹 다물어버린 듄 앞에, 고고한 자태로 선 영정은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큰 일을 앞둘 때만 벗는 줄무늬와 검은색이 적절히 어우러진 드레스. 듄은 직감적으로 상황의 심각성을 판단했다.



"정신적으로 뜯어고쳐줘야 할 부분이 있으니까."



영정이 태연하게 말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모르의 말대로, 원작대로. 그녀는 죽음을 예감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지만 듄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 조금 후 나가군이 온다면, 바이고 사막에서 만나자고 전해주세요. 가장 높은 건물이 보이면 내 별장이니까."



영정이 입술을 꽉 깨물고 돌아섰다. 휘청거리는 걸음걸이가 불안해보였다. 듄은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결국 관자놀이를 누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듄이 그토록 존경하는 그녀는, 이번 일에 대해 절대소, 한발조차도 양보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밀려오는 두통에 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일은 역시 절대 평화롭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 * *





"...어서와요."



대배우 생활은 확실히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영정이 미소지으며 환영했다. 붉게 칠한 입술과는 대조되는 흰 피부. 머리카락을 단정히 틀어올려 고정해 검은 깃털로 장식했다. 하늘색 드레스에 검은색에 부드러운 깃들이 달린 스카프. 고고하고 우아하게, 그것이 영정이 지금 취하고 있는 자세였다.



"아.. 안녕하세요."



나가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인사했다. 그는 영정의 얼굴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굉장한 미인. 날카로운 눈매에 뚜렷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전형적인 미녀의 상이었다.



"이호형?"

"여태 내가 데리고 있었어요."

"아.. 그런데.."



발에 그건 뭐에요?
여태 스푼에 없었던 이호가, 발에 족쇄를 맨채 서 있는 것을 본 나가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영정이 침을 삼켰다. 오래전에 본 지라 기억도 나지 않는 대사였지만, 어떻게 해서든 나가를 자극해야했다.



"내가 들고 있으라 시켰어요. 이곳에선 도망칠수 없으니 무거운 추를 달 필요는 없잖아요. 하지만 죄인이니 족쇄는 풀지 않아요."



나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가 지금까지 본 영정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생명을 소중히 했다. 잔인한 사람은 아니었다.



"여..영정님..."

"왜요?"



놀랐어요?

싱긋 웃으며 덧붙인 그녀는 소름끼치도록 섬뜩해보였다. 피도 눈물도 메말라서, 남의 감정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이게 원래의 나에요. 당신같이 나약하지 않고, 필요하다면 생명을 해치는, 그런 히어로."



언제나 그래왔다. 자신이 영정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것들은 모조리 짓밟았다. 그것은 그녀가 사랑하던 그 사람이 그녀에게 남긴 말이기도 했다. 여지껏 죄책감 없이 잘 해왔던 그녀는, 단순히 남을 배려할 뿐이었다. 방해되는 것은 제거하되, 그 대상이 아니라면 친절히 대해주었다. 살생을 할 때에도 남의 눈을 가려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슬슬 지겨워져 갔다. 완전히 본래의 영정과 같아지는 걸까.

그제서야 나가는 무언가 잘못돼었음을 깨달았다. 제 앞에 서 있는 이 여자가, 정말로. 자신이 아는 영정이었던 걸까. 여태 자신이 잘못알고 있었던 걸까.



"그건 그렇다 치고요, 일단 이호 형을 돌려보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싫은데요?"



경악에 찬 신음이 들려왔다. 영정이 입을 꾹 다물고 친절하게 웃어보였다. 너무나도 해맑고 환한 미소에, 잠시 홀린 듯 하던 나가의 얼굴이 다시 굳어져갔다.



"네...?"

"싫다고요."



날 두번 말하게 하지마.
되묻는 나가에게 싫증이 난 듯, 영정이 덧붙였다. 검은 눈이 나가를 심연 밑바닥까지 끌고 가는 듯했다. 나가가 본능적으로 위험을 누끼고,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확실히 이 상황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이었다.



"이호 형네 종족이.. 그들의 벌이 얼마나 잔인한지 아세요?! 그건-! 그건!"

"알아."



어느새 존대말을 그만두고 편한 어조로 말하는 영정.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는 그녀에, 나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상이 아니었다. 이상황을 만든 영정이나, 그런 영정에게 휘둘려서 붙잡혀 있는 이호나.



"야만적이지. 미개한 형벌이야. 정말, 인간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수 없다니까."



잠시 말을 멈추며 숨을 고르는 그녀의 얼굴은 굉장한 비밀을 말해주기라도 하는 듯이 자랑스러워 보였다.



"벌은 단순히 잔인하기만 해서는 안돼요. 써먹을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사회에 기여하도록 쥐어짜야 하죠."



어느새 조용해진 나가를 바라본 영정이 활짝 웃더니, 이내 이호를 향해 발을 돌렸다. 영정을 바라보는 이호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갑갑함과 혼란스러움이 잔뜩 얽힌 그 표정은 영정을 향해 있었다.



"그런 벌은 받기 싫죠? 그럼 계속 여기 있어요."



그리고,
백모래의 주치의로 일하는 거죠.

순간, 가만히 있던 나가의 얼굴이 잔뜩 구겨지고야 말았다. 영정은 나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아직도, 그의 눈동자에는 저를 향한 동경이 담겨 있었다. 조금 더 자극해보기로 한 그녀가 이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실종된 기간이 길어질수록 죽지 않는 당신의 가족들은 점점 당신이 탐탁치 않을 거에요. 지금까지 저지른 일이 있는데 정말 누명을 쓴 걸까,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구요. 거기에 지금은 소중한 아이더라도, 인간인걸요."



어차피 죽어버릴 텐데.
작게 소곤 거린 그녀가 몸을 홱, 돌렸다. 이호는 충격받은 눈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하나의 조각상같이, 움직임이 없었다.



"완전히 고립되어 버리겠지만, 이곳에 있으면 달라지죠. 애초에 당신은 백모래에게 속죄하고 싶은 거고, 그것이 일이 되어버릴 뿐. 거기에 특별한 서비스."



백모래는 죽지 않아요.
댓가를 치룰 뿐이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잠자코 있던 나가가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그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암호를 푸는 해독자의 표정에, 영정은 미소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까지와의 당신 아이와는 달라요. 계속 가족으로 남을 수 있다구요. 자, 결정하세요."



영정은 방긋 웃으며 가느다란 손가락 두개를 폈다. 한쪽의 선택지, 사지가 잘릴 위험을 감수하면서 가족에게 돌아간다. 두번째, 이대로 남아 백모래에게 속죄하며, 그의 곁에 남는다.

영정은 이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대로 해주겠지.
불안했지만, 그녀는 이호가 잘 해내리라 믿었다.



"형-! 무슨 소리에요! 일호형이랑 오수씨를 못봐도 좋아요? 뭘 고민하고 있어요!"

"그래요. 당신이 망가뜨린 아이를 버려두고 도망치는 것도 좋아요."



듣다못한 나가가 확, 화를 터뜨렸다. 그는 영정 앞으로 다가섰다. 갑자기 나서는 나가에, 살짝 놀란 영정이 동요했지만 이내 원래의 페이스를 데찾았다.



"영정님!! 적어도, 제가 아는 영정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어요! 신중하고 여유롭게, 우리의 선택을 가장 최선으로 두는 분이셨다구요! 사람을 이렇게 극한까지 몰아놓고 결정하라니.. 전..."



어느쪽이 진짜 영정님인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슬픈 거에요?



나가의 울먹임에, 영정은 진심으로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만화로 보았을 때는 확실히 영정이 너무했다. 그러나 실제로 본인이 직접 상황을 맞닥뜨리니, 너무나도 달랐다. 남에게 의지만 하려 하는 이 어린 히어로의 칭얼거림을 들어줄 만큼의 인내심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내가 내몬 게 아니야-! 본인이 자초한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설령 내가 그랬다 해도, 난 바쁜 사람이야. 저런 어리광 들어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그녀가 팔짱을 끼고 오만하게 섰다.



"세상이 네게 다정한 건 네가 우수하기 때문이야. 착각하지 마."



영정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살짝 성가시다는 듯, 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나가를 바라보았다.



"ㅇ..아..아닐걸요?"

"맞아."



부정하는 나가에게, 영정은 확신을 주었다.



"다른 질문을 해 보지. 한쪽에는 네 가족들이 있다. 다른 쪽에는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150명이 있어. 위기의 상황,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넌 어느쪽을 선택할 테냐."



충분한 시간을 준 영정이 나가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여태 히어로로 산 세월, 희생한 삶 때문일까, 왜인지 모르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매정한 말들이 연기가 아니라고, 그녀는 판단했다.



"나라면 150명을 구하겠어. 하지만, 만일 네가 네 가족들을 택하더라도 나는 널 미워하진 않을 테다. 너에겐 150명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힘이 있고, 네가 앞으로 많은 목숨을 구하려면 가족들을 살리는 것이 옳기 때문이지."



너는 우수하니까. 나는 널 특별하게 여겨.



"과대평가에요."

"올바른 평가지."

"그것보다..! 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신 거죠? 이해가 안가요. 백모래의 주치의라니.. 영정님도 나이프신 거에요?"



이미 어느정도 예상한 질문이다. 영정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검은 빛의 눈이 꾹 감겼다가, 이내 영롱한 빛을 띄며 다시 떠졌다. 아까와는 달리 독기가 가득한 동공에, 나가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농담이라도 끔찍하구나, 아가야."

"...죄송해요.."



영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짓도 지겨웠다. 끝을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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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9-26 21:40 | 조회 : 1,553 목록
작가의 말
씨시 매그놀리아

댓가를 치룰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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