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납치가 아니라 초대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여인의 눈이 곤란함으로 일렁였다. 아모르의 말에 단념하여 이렇게 이호를 데리고 본인의 거주지로 온지 10분. 이호는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에 대해 당황하고 있었다.



"...이..일단.."

"..?"

"씻어요. 그동안 못씻었던 것 같은데."



황당함.

그것이 이호가 가진 심정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풀어주질 않나,(납치) 씻으라 하지 않나. 솔직히 말해서, 이 상황이 잘 이해가지 않았다.



"저거 빨아둬."



과묵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에게 이호의 옷을 맡긴 영정은 이호를 욕실로 밀어넣은 후 테라스로 나갔다. 차가운 밤공기가 베일을 뚫고 들어와 뺨을 간질였다.



"...단념하라 그랬었지."



아모르의 말대로라면, 영정 그녀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역사는 그대로 흘러간다. 다만, 그것이 더 나쁜 쪽으로 흘러갈 수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모두가 절망한 채 자멸하게 될 것이다. ...그녀를 포함해.



"그래도 미련은 어쩔수 없지."



씁쓸함이 눈동자 가득 어른거렸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눈앞에서, 내 부탁대로, 스스로 죽어줬던.

내 하나뿐인 사람.



"저... 왜 절 납치하신.."

"납치가 아니라 초대에요, 이런건."

"전혀 아닌.."

"아, 나왔네요. 일단 밥부터 먹죠, 우리."



멋쩍게 목욕 가운을 걸치고 나온 이호가 말이 잘리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것도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많았다. 지금으로써의 최선은 이 대배우 히어로의 심기에 거스르지 않는 것 뿐이었다.

.
.
.


이호를 두고 집무실로 온 영정에게, 마고가 다가왔다.



"듄 군, 쓰러졌다 합니다."

"..쯧, 무리하는 것 같더라니. 쉬라고 하세요."

"네."



마고가 전해준 듄의 부재. 그는 지속되어 누적된 피로로 인해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마고가 영정을 바라보았다. 늘 히어로는 몸관리가 최고라고 강조하던 그녀가 부하의 입원에 대해 어떻게 나올까.

예상밖으로, 그녀는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잔소리를 늘어놓거나 혼내지도 않았다. 마고는 조용한 그녀가 조금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모르에게 다녀온 그 순간 이후부터, 뭔가 이상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특히 얼마 전 "초대한" 이호를 보는 그녀의 눈빛. 혼란스러움이 가득 섞인 그 눈은 생소하기 그지 없었다.



"범죄율, 증가하고 있더군요."

"영정님께서 관여하질 않으시니까요."



그녀의 붉은 입술이 살짝 휘었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답고, 우아한 분위기. 마고가 숨을 삼켰다.



"....그것 참 기쁘네요."



아직 히어로계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영정의 하늘빛 머리카락이 밤공기에 흩날렸다. 진심으로 기뻐보이는, 흐뭇해보이는 얼굴에 마고가 살짝 미소지었다. 영정이 저렇게 만족해할 때면, 언제나 좋은 일들이 일어났다.



"...응?"



공기가 달라진 건 한순간이었다. 스푼의 서장 다나로부터 온 전갈. 오늘 저녁, 그러니까 조금 전. 영정이 그토록 아끼던 후계자 '나가'가, 송하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해받은 후부터.

영정의 방이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건방져... 시키지도 않은 짓을..."



입술을 꼭 앙다문 채, 이를 갈며 섬뜩하게 중얼거린 목소리가 방 안에 가득 울렸다. 분노하고 있었다.



"...지금, 나가를 보러 가겠어요."



마고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집무실 안으로 훅하고 불어닥치자 순간 앞을 볼 수 없었다. 마고가 겨우 정신을 차린 후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다음엔, 그 집무실에 남아있는 사람은 거미 혼혈인 그 본인뿐이었다.


.
.


"제길,제길, 제길...!"



설마 전개가 이렇게 빠를 줄이야.

본인이 이호를 납치한 순간부터 어느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더라도, 이런 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100년을 사는 세월동안 전생의 내용도 모조리 잊었고, 기억나는 것은 일부분이었기에 그녀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런 빠른 전개가 뜻하는 것은 단 하나.



'내 죽음이 가까워진다.'



영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런저런 잡생각들을 하는 동안 어느새 스푼이었다. 스푼의 옥상에 사뿐히 내려앉은 그녀가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 초조함에 약간씩 비틀대던 그녀는 결국 높은 하이힐로 인해 발을 삐끗하고야 말았다.



"윽.."



걷는 것을 포기하고, 염동력으로 자기 자신을 공중으로 띄워 이동하던 그녀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 송하의 등장으로 시끄러워져서 어딘가로 우르르 이동한 것이 분명했다. 안심하던 영정은 이내 사원 휴게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저 원래 두시간은 누워서 뒤척여야 자거든요. 새벽에 몇번씩 깨우니까 자꾸..."



'쾅!!'



나가의 말을 자르고, 순식간에 열린 문이 굉음을 내며 벽에 부딫혔다. 산산조각 파편이 흩어졌다. 문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대배우이자 모든 히어로들의 선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얼굴을 가린 베일 밖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졌어도, 무척이나 우아해보이는 분위기의 영정이었다.



"영정님!!?"



나가를 비롯한 출장조들이 헉 하고 숨을 빠르게 들이켰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소파에 앉아 두통을 호소하는 나가에게 다가섰다.



"미안하네요. 하아, 내가 제대로 신경만 쓰고 있었더라도."

"네..? 이건 영정님 탓이 아닌데요..?"



잠을 못자 머리가 울리는대도 뇌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특히나 이 분 앞에서는. 나가가 바짝 긴장한 채 답하자, 영정은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 이라고.



"... 피곤해 보여요."

"아.. 제가 사람 많은 곳에서 잘 잠을 못자니깐.."

"그럼 안돼죠. 무엇보다 중요한 게 컨디션이니."



잠시 고민하던 영정이 이내 나가의 팔을 붙잡고 사원 휴게실의 창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영정님???!"



랩터와 헤이즈로써는 무척 황당한 시추에이션이다.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사과를 하지 않나, 한숨을 쉬질 않나. 갑자기 안부를 묻다가 제멋대로 나가를 데리고 나갔다.

랩터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들이 나간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 둘에, 랩터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멋있어..."



*


"..저.. 잠깐만요...?"

"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나가군?"

"저 이렇게 화려한 곳은 부담스러워서요.. 영정님 돈이..."



나가는 영정에게 이끌려 호화스러운 오피스텔의 상층 침대에 던져졌다. 나가가 삐질삐질 땀을 흘리자, 영정은 태연하게 말했다.



"이곳, 내 소유니깐 편히 자요."

"A.a...."



오늘은 왠지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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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9-24 23:02 | 조회 : 1,355 목록
작가의 말
씨시 매그놀리아

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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