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조우

꿈은 맛있고 달콤한 것이지만 계속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꿈을 계속해서 꾸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성취하던가, 도망치던가.

다만, 어느쪽이든
어딘가에서 인간을 포기할 필요가 있음은 다르지 않다.

-

소녀는 눈을 멀뚱히 뜬 채 커다란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더 뚱한 표정이었다.
슬쩍 침대 위로 올라온 누군가의 손이 베개를 살짝 찔러보고, 그 손의 주인이 침대 밑에서 얼굴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저기, 아가씨. 자?"

죄라도 진 어린애처럼 구는 그를 소녀는 말없이 베개로 밀쳤다.

"저리 가요, 좀. 자게."

"나랑 놀자니까-"

"싫어, 잘거야."

"놀자아-"

"혼자 노세요."

계속해서 꾹꾹 눌러오는 베개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그는 꿋꿋이 침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런 실랑이만 3분 가까이 하고서야 아무래도 귀찮아진 소녀는 베개를 미는 걸 그만두었다.
벌써 새벽 4시. 원래라면 한창 자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남자는 계속 성가시게 굴며 잠을 방해하고 있었다. 덕분에 내일 학교를 가야 하는 소녀로서는 심히 짜증이 치미는 상황이었다. 어째서 집에 수면제가 없을까.
소녀는 평소에 잘만 자던 자신이 괜스레 평소 이상으로 더 싫어졌다.

"우유라도 마시고 자세요."

"그러지 말고 놀러가자니까."

누가 이 인간 좀 치워줬으면.
소녀는 자포자기식으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침묵했다. 남자는 끈질기게 다시 소녀를 깨워 대답을 들으려다가, 문득 떠올렸다.
왜 허락이 필요하단 말인가. 멋대로 들고 나가면 되는 것을.
그리고 남자의 행동력은 쓸데없을 정도로 높았다.

결론적으로, 소녀가 눈을 뜬 곳은 공원에 있는 가로등 밑 벤치였다.
밖에 나와있다는 것을 덜 깬 머리로 인식하며 소녀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옷 위에는 본적 없는-아마 남자의 것이 분명한-사이즈가 커서 소매가 맞지 않는 검은 코트가 입혀져 있었고, 그나마의 배려인지 몰라도 안고 있던 커다란 베개가 안겨져 있었다. 소녀는 커다란 베개를 추슬러 안고, 잠에서 깨려는 머리로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혼자 두고 갈 거면 대체 왜 끌고 나온 건가. 결론적으로 단독행동이지 않은가.
하지만 생각해봤자 의미는 없었다. 남자는 언제나 엉터리에 엉망진창이니까.
소녀는 더 이상 남자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도 잠은 왔고, 마침 밤바람도 조금 쌀쌀한 편이었지만 추울 정도는 아니었다. 잠이나 다시 자자. 소녀는 배게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시계는 없고, 하늘은 언제까지고 밤이었기 때문에 시각을 알 방도는 없었다.
학교에 가야 한다거나,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거나,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라던가, 이제 슬슬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들 뿐이라고 얕게 잠든 소녀는 짜증 반 포기 반으로 생각했다.
자고 있으면 데리러 오겠지-하고 태평히 자는 것도 한도가 있는 법.

"어, 선배! 여기 여자애가 있는데요?!"

"뭐? 이런 시간에 무슨.....있네."

소녀의 희미한 의식을 깨운 것은 낯선 2개의 목소리였다. 어딘지 어리숙한 남자의 목소리와 신경질적인 여자의 목소리.

"깨우는 게 좋겠죠?"

"자는 사이에 체포나 해."

"네?! 왜요?!"

"딱 봐도 '회색 눈'이잖아."

격철의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천천히 잠에 취한 눈을 가늘게 떴다.
소녀의 시야에 셔츠와 제복 차림의 짧은 검은 머리 남자와, 옅은 갈색 단발머리의 여성과-그리고 금속질의 번뜩임이 들어왔다. 총이었다.
가까이 있던 검은 머리의 그-신참은 소녀의 시야에 들어온 총에서 소녀를 감싸듯 급히 다가와서 소녀의 얼굴을 잡고 두 눈의 색을 확인했다.
멍하니 보고 있는 소녀의 두 눈이 적갈색임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급히 단발머리의 여성, 선배에게 큰 목소리로 따졌다.

"선배! 피곤해도 분수가 있지! 일반인을 쏴 죽일 셈이에요?!"

"...렌즈는 아니고?"

"아뇨."

"다시 확인해 봐."

"에이..."

그는 선배에게 뭔가 따지려 들었지만 선배는 눈을 치켜뜨며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후배의 서러움을 담아, 멍하니 배게를 끌어안은 채 있는 소녀에게 그는 어색하게 말했다.

"저기....미안한데, 우리 수상한 사람이 아니고, 그, 경찰이거든?"

그는 목에 걸어둔 경찰수첩을 소녀에게 보이고, 말을 이었다.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눈 좀 자세히 확인해 봐도 될까?"

그는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보통 '회색 눈'과 착각한다거나 의심했다는 발언을 하면 열에 열이 불같이 화를 내거나 질색을 하거나 하며 심히 반발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저 한숨을 쉬며 귀찮다는 듯 대답할 뿐이었다.

"상관없어요."

꽤나 선선한 대답에 얼떨떨해하면서도 그는 소녀의 눈을 확인했다.
의외라면 의외라고나 할까, 소녀의 눈에는 당연히 렌즈 따위 씌워져 있지 않았고. 회색 한 점 없는 투명할 정도의 적갈색이었다.
그는 부루퉁한 얼굴로 선배에게 보고했다.

"클리어. 본인 눈 맞아요."

"염색 흔적은?"

"아 선배 좀 적당히 하세요!"

그의 신경질적인 대꾸에도 불구하고 선배는 여전히 미심쩍은 듯 소녀를 한동안 노려보다 겨우 총을 집어넣었다.

"'회색 눈'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새벽에 이런 어둡기 짝이 없는 공원에서 태평히 자고 있을 수 있지?"

"에이 선배도. 길을 잃었거나 해서 여기 있을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잖아요?"

"....넌 좀 닥쳐 봐. 저게 그런 불쌍한 걸로 보여?"

소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선배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가만히 눈을 감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늦었어요."

선혈이,
튀었다.

"-미~안! 마침 보이는 인형가게에서 커다란 곰인형을 사 봤는데 말야. 컬러는 빨강으로 괜찮아?"

스포트 라이트가 비춰지는 아래의 빨강색 사이로, 소녀가 그에게 대답했다.

"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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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05 22:27 | 조회 : 1,628 목록
작가의 말
양야

밤길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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