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뻔한 의외성

타인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자신의 타인의 범위는 생각 이상으로 넓을지도 모른다.
가족마저도 타인일 수 있다.

친구와 타인은 동의어.
지인과 타인도 동의어.
사람과 타인은 동의어라고 하면.

자신과 타인이 동의어인 사람은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

-
"오늘 친구랑 책을 사러 가기로 했어요."

"-응? 뭐랑 뭘 하러 가기로 했다고?"

"친구랑. 책을 사러 가기로 했다고요."

"....뭐랑?"

"친구랑."

아주 드물게도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시고 당황스런 표정밖에 남지 않았다. 반면 소녀는 평소처럼 무표정하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가 영 안되는 것인지, 남자는 인상을 썼다가, 폈다가를 반복했다.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그 말을 제대로 인식한 그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아, 아가씨한테 친구라는 게 있었어...!"

"...실례네요. 왕따 같은 건 아니라구요."

"나도 왕따같은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다만 전따가 아닐까 생각했었을 뿐이지!"

"그거나 그거나잖아요."

소녀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지만 그는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소녀에게 친구라고 부를 만한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으앙-하고 우는 소리를 내며 그는 소녀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내가 소중해 친구가 소중해!"

"...둘 다 안 소중해요."

"미, 미묘하게 너무한데."

친구가 아무래도 상관없는 존재라는 건 상관없었지만 같이 한묶음으로 부정당하고 나니 상당히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뭔가 말하고 싶어서 입을 우물거렸지만 딱히 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주섬주섬 지갑과 손수건 등을 챙기던 소녀가 상념에 빠진 그에게 물었다.

"제가 나가서 제 친구한테 살해당했다고 쳤을때,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아니."

그는 즉답했다. 생각할 것도 없다는 투로 단언했다. 소녀는 과연 로션이 필요될지를 고민하면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마찬가지에요."

"아가씨의 쌀쌀맞음은 잘 알고 있어."

그는 소파에 삐딱하게 앉았다. 소녀는 결국 일단 로션을 챙겨보기로 결정했다. 원래 화장같은 건 하지도 않고 피부가 거칠거나 말거나 일말도 신경쓰지 않는데다 거리는 어두우니 잘 보이지도 않을 테지만.
그리고 거기까지 다시 생각한 끝에 쓸데없이 가방을 적당히 부풀려 보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했다.

"그럼 아가씨는 누가 죽으면 눈물이 나?"

그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질문으로 내뱉었다. 소녀는 고개를 기울였다. 가방을 싸는 일 자체가 귀찮아지고 있었다.
나가기가 귀찮아졌다.

"아마도 부모님 정도겠죠."

"그럼 내가 아가씨의 부모님을 죽이면 괜찮지 않겠지?"

혹시 모르니 접이식 우산을 넣기로 결정했다. 가방이 적당히 부풀었다. 소녀는 시계를 흘긋 보고는 양말을 주섬주섬 신었다.

"아마 안 괜찮겠죠."

"아가씨는 내가 부모님을 죽이면 화 낼 거야?"

"화 내겠죠."

선반 위에 두었을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작은 집안의 선반이나 서랍장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소파에 거의 드러누운 채 맹하니 질문을 계속했다.

"그럼 있잖아, 내가 죽으면 어때?"

"글쎄요. 아마 별로 달라지는 건 없겠죠."

소녀는 거실의 첫째 서랍장의 구석에서 예비용 열쇠를 꺼냈다. 본래 있던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소녀의 말에 남자는 누운 채 으-응, 하며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물었다.

"역시 내가 죽을 때 울어주는 사람 따위는 없겠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소녀는 신발을 신고 나서며 말을 이었다.

"정 아무도 없으면 저 혼자라도 울어줄 테니 그만 징징대요."

그가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미 소녀는 나간 뒤였다. 문이 잠기는 금속음이 달칵하고 났다.
나가지 말라고 나름 떼쓰다가 되려 한방 먹은 꼴이 되었다.

"아-눈치빠른 아가씨야. 정말."

그는 혼자 남은 채 쿠션을 끌어안고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

소녀가 친구와 책을 사고 같이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거나 하며 시간을 보낸 그 다음날, 그 친구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등교중에 실종되었다는 듯 했다.
머지않아 소녀의 몇 없는 친구 중 하나의 책상에 국화꽃이 놓여지게 되었다. 그 소식은 뉴스거리도 못 되었다. 아이들의 경각심을 일으키는 작은 소재가 되었었지만 일주일만에 아무래도 상관없는 소재로 전락하게 될 것이 뻔했다.
친구의 죽음에 대한 국화꽃을 꽂아놓은 화병이 놓인 선반 앞의 식탁에서 소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곤란해요."

"뭐가?"

아무 생각없이 앉아있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자, 소녀는 정말 문제를 모르겠냐는 듯이 말했다.

"감자튀김에 머스타드 소스밖에 없다니. 케첩은 어디다 뒀어요?"

"저번에 다 먹었나 봐."

"새로 사 와."

"그냥 먹으면 안 돼?"

"붕어빵에 팥없이 반죽만 먹어볼래요?"

"미안, 사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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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02 01:28 | 조회 : 1,597 목록
작가의 말
양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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