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산책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창 비가 자주 내리는 계절-이라고 하지만 항상 밤인 이상 어째서 더워지거나 비가 내리는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요즘 같은 시대엔 종교적인 이론이 되려 그럴듯하게 들린다.

신께서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벌로서 해를 빼앗고,
하해와 같이 넓으신 인정으로 세계의 이치의 반을 유지하며,
참회하길 바라며 흘리는 눈물이 비라고.

"오염된 비는 필요없습니다."

"내 말이."

소녀의 단호한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가 맞장구쳤다.
그들은 통행금지령이 떨어져 불빛 하나 없는 암흑 속의 길거리에서 검은색 우산을 쓰고 걷고 있었다. 나온 이유는 단순했다.
기분전환으로 산책이나 하자.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지만 비가 내리는 것은 생각보다 기분을 더 엉망으로 만드는데 충분했다.

"아니, 하해와 같이 넓은 인정이 있으면 이치의 반이 아니라 전부 다 제대로 유지해 달라고."

"참회하길 바라는 눈물 치고는 거무죽죽하네요. 이거 분명 원망하고 있어요. 기껏 만들어줬더니 이 따위로 망쳐놨냐고 원망하는 거에요 이거."

"애초에 인정이 있으면 해를 빼앗지 말라고. 범죄의 왕국으로 만들어놓고 참회는 무슨."

"아-신이 보다 못해서 악신으로 승화했나보죠 뭐."

코 앞, 자신의 몸 조차도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소녀는 태연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전혀 보이지 않을 텐데도 소녀는 남자의 손이나 옷자락도 잡고 있지 않은 채 오히려 팔짱을 낀 채였다.
남자는 그런 소녀의 모습을 힐끔 내려다보고는 한쪽 팔을 소녀의 어깨에 걸쳤다.

"아냐, 가끔은 해를 없애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포돌이는 회색 눈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죠. 여보세요, 거기 경찰이죠-"

"뭐어, 최근 경찰들 중에서는 이런 어둠 속에서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회색 눈인 사람을 모집한다고는 하지만."

"뉴스에 나왔어요. 경찰이 피해자를 사살해버리는 사태가 늘어나고 있어서 조만간 폐지될 거라고."

소녀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그렇게 말했다. 호흡기관에는 아무 문제도 없지만 기분상 숨쉬기가 불편한 탓이었다.

"그래, 그리고 하나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요. 비 들어오니까 좀 떨어져요."

"역시 우산 같이 쓰지 않을래?"

소녀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상쾌한 미소를 짓고 있을 남자의 등을 있는 힘껏 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파! 아가씨 손 매워!"

그는 얼얼한 등을 손으로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접어든 골목의 반대편에서 빗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정말-남녀가 같이 다닐 때는 우산이 하나라는 게 정석이잖아? 각자 쓰다니 이게 무슨 이단인가!"

"그런 정석 따위 제 알 바 아닙니다."

"아가씨는 로망이 없어! 소녀의 로망은 어디다가 팔아먹고 온 거야?"

우는 소리를 하는 동시에 그는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상대를 확인했다. 같은 '회색 눈'이 어둠 속에서 묘하게 빛을 발했다. 성인 남자. 본적 없는 얼굴.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확인했을 때 동류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려는 방심.

거기까지 충분했다.

그는 위화감을 알아차릴 수도 없을 정도로 아주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스쳐 지나가는 이의 목을 나이프로 그었다.
예리한 칼날이 정확히 동맥을 자르고 피가 터져나왔다.
비명은 튀어나올 틈도 없었다.

"어린 시절에 진작에 팔아먹었습니다. 대가는 현실."

"그런 걸 받고 로망을 파는 게 아니지! 아아, 소녀에게는 순정만화와도 같은 빛나는 로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소년의 로망이-"

소녀에게 장난스럽게 부루퉁한 얼굴로 말을 건네며, 꺽꺽거리며 다가오는 필사적인 손과 터져나오는 피를 완벽히 무시하고 있었다.

소녀는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보이는 것처럼 웃는 얼굴로 상대의 목에 나이프를 다시 찔러넣어 마지막 명줄을 끊어버리는 그가 있는 쪽을 정확히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상 숨쉬기가 힘든 것이 아니라, 진짜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한숨이었다.

"...피로 점칠된 스플래터 로망 같은 걸 소년의 로망이라고 하지 마세요. 전 세계의 소년들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요."

"그럼 지금부터 내가 다 죽이면 되잖아?"

"......."

소녀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피와 빗물로 범벅이 된 옷을 세탁해야한다는 점이었다. 과연 일반 세제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집에 있는 세탁기를 떠올리며, 피가 번져나온 물웅덩이를 주저없이 밟고 소녀는 먼저 앞서갔다.

마치 앞이 보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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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30 00:48 | 조회 : 1,689 목록
작가의 말
양야

빨래 그거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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