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국화는

"사실 담임선생님은 숙제를 내 주는 선생님이 아닙니다."

"아 진짜?!"

소녀는 꽃병에 꽂아두었던 하얀 국화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남자는 멀뚱히 그런 소녀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
비가 내리는 날씨였다.
구름이 달을 가려버렸기 때문에 통행이 일체 금지된 거리에, 그는 서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암흑 속의 거리를 회색 눈으로 조용히 보고 있었다. 어둠 속의 거리는 이제는 '회색 눈'을 가진 이들만의 거리가 되었다.

그는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그저 서 있었다.
빗물의 오염도가 심각한 수준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만약 지금의 하늘이 밝았거나 조명이 하나라도 켜져 있었더라면 그 비가 검은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리라.
그 비의 성분 따위는 이제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비를 맞으며 그는 그저 조용히 회색 눈으로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얼굴엔 소녀와 어울릴 때와 같은 어린아이 같은 웃음은 일체 없었다.

웃음이라는 건 지을 필요가 있을 때만 지으면 되니까.

"뭐야,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왜 우산도 안 쓰고 있어?"

그가 계속 보고 있던 어둠의 저편에서 빗소리 사이로 신경질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마저 집어삼킬듯한 어둠 속에서 하이힐 굽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붉은 곱슬머리를 빨간 매니큐어로 칠한 날카로운 손톱으로 쓸어넘기며 여자는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고있는 그에게 신경질적으로 말을 걸었다.

"계속 보지 말아줄래? 눈알 뽑아버린다."

"...볼게 뭐 있다고. '베티'는 혹시 자의식 과잉?"

"뭐?!"

히스테릭하게 대꾸하며 날카로운 회색 눈을 치켜 뜬 여자-베티는 금방이라도 나이프를 빼들고 달려들 기세였다. 하지만 그녀는 멈칫하고는 막 주머니로 쑤셔넣었던 손을 천천히 뺐다.
그다지 그의 기분이나 분위기를 읽은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그를 이길 수 없음을 떠올린 것 뿐이었다. 여기서 달려들어봤자 그가 하루에 소비하는 '장난감'신세가 되리라는 것은 너무 뻔했다.

"...그래서 뭐하고 있는 건데?"

그녀는 그의 시선 옆으로 몸을 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이제 흥미가 다 떨어졌다는 듯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음-짝사랑 상대에 대해 고민중."

"농담은 여전하네."

베티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회색 눈'을 가진 이들은 하나같이 정신적-혹은 뇌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중 몇은 사람과의 공감능력이나 감정이 상당히 떨어진다.

즉,
사랑이나 애정 따위는 그들에게 있어서 그저 사전 속 단어일 뿐이었다.
짝사랑이라니, 그런 건 그들의 머릿속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됐어, 네 영양가 없는 농담을 들어줄 생각은 없어. 난 간만에 떨어진 통행 금지령을 틈타 술이나 마시러 왔을 뿐이니까."

"아니, 농담 아니라니까?"

"...내가 볼 때 너는 종종 농담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베티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하이힐의 굽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부딪치며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너같은 놈들은 '사랑'을 하는 게 아니야. 상대한테 '미쳐 있는' 거지."

쿡, 그녀의 새빨간 손톱이 그의 가슴팍을 찔렀다. 마치 크게 한방 먹은 것처럼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베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티는 그런 그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사람의 감정은 고사하고 지 감정도 쥐꼬리만큼도 모르는 주제에. '미쳐 있으니까' 상대의 감정을 이해했다고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지?"

"......."

그의 시선이 베티의 회색 눈에서 떠나 잠시 허공을 맴돌았다.
짤막하게, 그 주최의 머릿속 토론장에서 유일하게 앉아 있는 소녀가 턱을 괸 채 그에게 말했다. 언제나와 같이 시큰둥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어차피 사람의 감정 따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단지 모두 자신이 남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뿐이지.

그는 웃었다.
소녀는 그런 그의 웃음에 대고 말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그걸 이해했다고 착각해도 곤란해요.

소녀는 혼자뿐인 토론장의 책상에 엎드린 채, 토론장의 중심에 서 있는 그에게 말했다.

-애초에, '하얀 국화'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하잖아요.

그럼, 여기서 토론 종료.
소녀의 손이 무자비한 끝을 선고하며 머릿속 토론의 막을 내렸다. 애초에 토론할 것도 없는 아무도 없는 토론장의 막을.

그는 멍하니 물었다.

"...그럼 베티. 너는 '하얀 국화'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

그녀는 그의 질문에 눈살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손으로 그를 밀치고 지나가며 말했다.

"죽은 자에 대한 사랑과, 슬픔."

냉랭한 목소리의 대답을 던지고는 베티는 한번 돌아보지도 않은 채 어둠 속에서 멀어져 갔다. 그는 다시 혼자서 검은 비를 맞으면서 생각했다.


-

"하얀 국화요?"

학교 교무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당분간 휴교령이 내려져 간만의 독서를 하고 있던 소녀는 의자에 늘어져 있는 그에게 되물었다.
듣자하니 어제 내내 비를 맞고 있어서 감기기운이 들었다는 모양이었다. 감기약 정도는 내 줄 마음이 있었지만 간병해줄 마음은 소녀에게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야, 자업자득이지 않은가.
그가 축 늘어진 채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예의에요."

짧은 대답이었다.

"역시 딱히 슬퍼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 그치?"

"...그야 당연히,"

다시 기운을 찾은 듯이 헤실헤실 웃기 시작한 그에게 소녀는 무심히 말했다.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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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29 00:19 | 조회 : 1,607 목록
작가의 말
양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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