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이해, 문제

서로 마찬가지.


-
"내가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그는 진지한 척 하는 어린아이같은 표정을 지은 채 팔짱을 끼고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소녀의 집도, 거리의 어딘가도 아니었다.
그와는 연결고리가 전혀 없어 보이는 장소.

학교의 교무실이었다.

그의 앞에는 청테이프로 아무렇게나 묶여 있는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그 누군가는 입까지 테이프로 막혀 있어 눈만을 바쁘게 굴릴 뿐이었다.
불안에 가득한 검은색 눈동자가 어둠 속을 헤맸다.
그 누군가는 떠올렸다. 어째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일까.
교직에서 일한지 10년 째. 안정적인 수입과 안정적인 가정. 학생들을 적당히 가르치면서 적당히 잘 살아온 인생.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에게 일어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었다. 지금까지 무사태평하게 잘만 살아왔고, 세상의 흉흉한 이야기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신문 너머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언제나 빛 안에서만 걸어가면 아무 문제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흉흉한 일은 바보같이 경고를 무시하니까 그런 거라고 비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왔어도 아무 소용도 없었고, 자신도 언제나 그런 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지금 당하고 나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

사람은 당해보기 전까지는 언제나 안일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남자는 두려움으로 수많은 상념에 빠진 그 누군가-선생을 내려다보며 의자 위에서 무심히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선생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보는 듯이 멀었다.

"흔히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고들 하잖아?"

호응하라는 듯이 그가 발로 툭툭 건드리자 반사적으로 선생은 고개를 급히 끄덕였다.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그나마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든 말든, 조금도 신경쓰지 않은 채 남자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치 삐진 어린아이처럼.

"아가씨가 나하고 게임을 같이 못 해주는 건 숙제가 있기 때문이래. 그럼 이 경우 숙제가 원인이고 결과는 '게임을 못 한다'잖아?"

그는 양 손을 펴 보이며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한쪽 손에 걸린 접이식 나이프의 칼날이 약간 들어오는 달빛에 시퍼렇게 번뜩였다.

"그럼 숙제가 나온 원인은 아가씨의 선생님이 숙제를 내줬기 때문이고, 그럼 숙제의 원인은 선생이 되지. 최종적으로 정리해서, 아가씨가 나랑 게임을 못 하는 이유는 선생 때문이라는 소리야."

그는 솜씨 좋게 손을 움직여 접이식 나이프를 단번에 펼쳤다. 잘 갈린 날카로운 칼날이 앞으로 있을 일을 예고하는 듯 했다.

"그럼 선생을 없애면 원인이 없어지니까 아가씨는 게임을 할 수 있어. 어때, 논리적이지?"

논리는 무슨, 선생은 뭐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고작해서 학생 중 누군가에게 숙제를 내 줬기 때문에 지금 이런 꼴을 당해야 했다는 소리지 않은가. 선생으로서 당연히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 준 것이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가 되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엉망진창이었다.
대체, 그 '아가씨'라고 부르는 학생은 누구일까. 선생은 당황과 공포 속에서 머리를 굴렸다. 아가씨라고 불릴 만큼 좋은 집안의 자제 같은 학생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다. 공포 속에서 작은 분노가 일었다.
만일 이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아가씨'라고 불리는 게 누구던지간에, 이런 꼴을 당하게 한 것에 대해서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는,
상념에 빠진 선생을 잠시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다.
회색 눈이 가늘게 웃음지었다.

아마 알고 있었겠지.
'놀다 와라'고 얘기했을 때부터 이렇게 되는 것 정도야 이해하고 있었겠지.
그러니까,
이번에도 소녀는 절대적으로 무심히 방관할 것이다. 언제나처럼.
알고 있는 일을 당한다고 해도 전혀 놀라울 것 없는 것처럼.
아무래도 상관없는 명백한 타인이 죽었다고 해도 슬플 것 없는 것처럼.

"그럼, 아가씨와의 게임을 위해 안녕-"

해맑은 미소와 함께 칼날이 인체의 급소를 정확히 노려왔다. 선생은 이번에야말로 단념했다. 눈을 감고 그저 죽을 순간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남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응?"

막 내리치려던 나이프를 멈추고 그는 핸드폰을 들었다. 순간적으로 잠시나마 목숨을 보전하게 된 선생이 급히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슬쩍 본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순수한 '살의'로 액정의 한 버튼을 눌렀다.
즐거움을 곱씹듯이 그가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아가씨?"

아가씨라는 단어에 선생이 깜짝 놀라 반응했다. 그는 그런 선생을 관찰하듯이 내려다보며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일반적으로 통화할 때 쓰는 정도의 음량이 아니라, 주위도 모두 들을 수 있게 하는 '한뼘통화'모드였다. 숨소리 외에 정적뿐인 교무실 내에 소녀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울렸다.

[숙제 끝났어요. 그래서 게임 뭐 하자고요?]

"오, 다 했어?! 지금 당장 돌아갈게! 최신작 게임 다시 사서 돌아갈게!"

[아니 필요없으니까요.]

교무실 내에 커다랗게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선생은 속으로 내심 천천히 안도하고 있었다. 애초에 죽이려는 이유가 게임을 못해서였다면, 지금 저 너머의 아가씨라고 불리는 소녀가 게임을 할 수 있게 된 이상 자신을 죽일 필요는 사라지지 않는가.
죽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공포가 누그러졌다. 사고가 회전했다. -이 목소리,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하고.
공포에서 슬쩍 헤어나온 머릿속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맹렬히 기억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럼 치킨 사갈까?"

[콜라 추가요.]

"알았어-"

달칵, 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 속에서 찾느라 바쁜 선생은 눈치채지 못했다.
전화가 시작했을 때부터 끝까지, 그가 계속 선생을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째서 일부러 '한뼘통화'모드로 통화한 것인지를.

어째서 일부러,
소녀의 목소리를 들려준 것인지를.

"아아-숙제가 끝났다네. 뭐야, 그럼 이제 선생은 굳이 안 죽여도 되겠네?"

아쉽다는 듯이 내뱉는 그 말이 지극히 작위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선생은 한숨을 내쉬었다.
살 수 있다. 그러한 희망이 다시금 명확히 자리잡았다.

그가 웃었다.

"하지만,"

밖으로 그대로 나가려는 듯이 몸을 앞으로 빼다가-휙하고 의자를 돌리며 다시 선생 쪽으로 몸을 돌리고 그는 선생의 얼굴 바로 앞에서 가늘게 웃었다.
안쓰럽다는 듯이 웃었다.

"아가씨의 목소리를 들어버렸으니까 정체를 알아차리는 건 시간문제겠지?"

정말로 안타깝고, 안쓰럽다는 듯이 웃었다.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희망이 순식간에 무자비하게 부러졌다.

"그러니까, 역시 바이바이."

오늘의 최고의 웃음을 지으며, 그는 선생의 목을 나이프로 비틀어 찢었다.
그 순간에서야 주마등 속에서 선생은 기억해냈다.
목소리의 주인인 소녀의 모습을.
그의 '살의'가 성립했다.
원래부터 살려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뿐인 이야기였다.

머릿속 재판장에서 피고석에 앉아 있는 소녀에게, 그는 선고했다.
무죄입니다. 역시 오늘도.

찢어진 듯한 웃음이 있었다.


-
창 밖에 비가 오고 있었다.

"...학교에서 오늘 담임 선생님이 죽었다고 난리던데요."

"헤에-그런 일 있었어?"

감자튀김을 입에 문 채 그가 별 흥미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학교에서 나눠준 하얀 국화를 꽃병에 꽂아 정리하고, 소녀는 감자튀김을 집어들었다.
남자가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슬펐어?"

"안타깝게도 전혀."

소녀는 간단히 대답하며 콜라를 들었다.
오늘 숙제는 없었다.

0
이번 화 신고 2015-08-28 01:34 | 조회 : 1,736 목록
작가의 말
양야

소녀는 의외로 감상적입니다.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