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이해, 방치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관심과 흥미가 없다는 말과 같다.

사실,
소녀와 남자는 서로의 이름이나 나이조차도 모른다.


-
머릿속 재판장에 있는 것은 오직 양. 어째서인지 양이 바글바글.
소녀 혼자 피고인 석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을 뿐. 검사도 판사도 배심원도 모두 다 양이다.
배심원인 양들이 뒷다리로 일어나며 하나같이 X표시가 쓰여진 판을 들었고, 검사인 양이 양 주제에 쓸데없이 박진감 넘치는 표정을 지은 채 판사인 양에게 한번 울어 보였다.
판사인 양이 목을 꿀럭이더니 입을 열었다.

-유죄!

오늘도 역시 유죄인가. 소녀는 시큰둥하게 판결을 들었다.
판사인 양은 감기라도 걸린 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고에게 방관한 죄로 유죄를 선고한다!

배심원인 양들이 환호하듯이 울어댔다. 검사인 양이 흥분한듯이 탁상을 굽으로 쾅쾅 내리쳐댔다. 소란스러웠다.
좀 더 조용한 배심원과 검사는 없었던 것일까. 소녀는 고민했다.
판사인 양이 드디어 굽으로 목제 망치를 드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저 망치를 세번 내리치면 이번 재판은 '유죄'로 끝날 것이다.
소녀는 유죄가 된다.

"이의 있소!"

누군가가 잔뜩 신이 난 것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양들로 넘쳐나던 재판장이 침묵하며 갑자기 도살장으로 뒤바뀌었다.
멀쩡히 판결을 내리던 배심원이었던 양들과 검사였던 양이 재판장 천장에 줄로 묶인 채 혀를 빼물고 피를 뚝뚝 흘리며 매달려 있었다.
판사인 양이 목에서 피를 울컥울컥 뿜어내며 단상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쳐박혔다. 그것은 이제 도살당한 양일 뿐이었다.
소녀는 그 모습을 그저 아무말 없이 보고 있었다.
판사인 양이 있었던 자리에는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양의 피를 한껏 뒤집어쓰고 양이 들고 있던 목제 망치 대신 도살용 칼을 든 남자는 절호조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근엄한 것을 연기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도살용 칼의 칼등 부분으로 세번 내리쳤다.
그것은 재판장의 정숙한 소리가 아닌 폭력적인 소리였다.
소녀는 어째서 무죄인지 이유도 묻지 않았다. 이 양 도살장이 된 재판장의 피고석에 앉아 있는 소녀에게, 남자는 멋대로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보이며 쾌활하게 말했다.

"왜냐하면! 아가씨이기 때문이지!"

아, 오늘도 결국 무죄로 끝났나.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 재판장이 막을 내렸다.

재판장의 막 사이로 그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불쌍한 양에게 사과해.
양한테 사과해 이 양반아!

"그렇게 하나의 숙제가 끝났습니다."

소녀가 문제지를 높이 들어올리며 선언했다. 와아-하고 어째서인지 오늘도 당연하다는 듯이 소녀의 집에 와 있는 그가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게임CD를 양손 한가득 들어보였다.

"그럼 이제 게임 같이 해 줄 거야? 응? <사일런트 힐>,<바이오 하자드>,<데드 스페이스>,<암네시아>같은 거 잔뜩 가져왔는데."

"집에 가."

소녀의 냉담한 말에도 불구하고 그는 끈질겼다. 이 정도의 거절에 풀죽을 거였으면 같이 있지도 않았다.

"에에이, 아껴뒀던 회심작도 가져왔는데. 안 놀아 줄 거야? 놀자, 응?"

"애초에 우리집에는 그 게임들을 플레이 하기 위한 장치가 없습니다."

"그럴 줄 알고 가져 왔어! 안 되면 컴퓨터로 어떻게든 하면 됨!"

"....그런 당신에게 희소식을 하나."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뒤에서 문제지를 하나 더 꺼냈다.

"짜잔-숙제 하나 더."

그 목소리는 전혀 억양이 없었다.
남자가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기껏 게임과 장치까지 준비했건만 소녀는 숙제라는 비장의 카드를 사용해 훌륭히 회피하고 있었다.

"어째서 게임 같이 해 주지 않는 거야!"

남자는 누가 죽은 것같이 비탄에 빠진 모습으로 엎드려 죄없는 바닥을 주먹으로 탕탕 내려쳤다. 소녀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숙제 해야 되니까 안 돼요."

"숙제 안 하면 안 돼?!"

"안 됩니다."

삶의 의욕을 잃었어...하고 중얼거리며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된 그에게, 소녀는 마지막의 사소한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
그 이상 더 안쓰러워지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이유 뿐으로.

"빨리 끝내면 같이 해요."

"진짜?!"

"참고로 <암네시아>나 <사일런트 힐>은 안 할 거니까."

"그래도 좋아!"

"끝내면 전화할 테니까 어디 놀다 오시던가요."

말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그럼!"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창문으로.
문득 오한이 들었지만 소녀는 무시했다.
지금 밖에 나간 그가 누구를 죽이든, 누구를 해치든.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도살장이 된 재판장에서 죽은 양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유죄다.

소녀는 숙제를 펼쳤다.
소녀는 남자와 자신의 사고회로가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당연한 내용을 그가 다르게 해석할 거라는 것도 당연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래서 그가 무엇을 하고,
뭐라고 생각하고,
뭐라고 느낄지는 소녀에게 있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건 서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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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28 01:28 | 조회 : 1,718 목록
작가의 말
양야

남자는 상당한 어리광쟁이입니다. 애정결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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