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만남


소녀와 남자.
이 두명은 남매도, 친척도,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이웃도 아니다.


-
소녀는 생각했다.
어쩔 수도 없는 난제를.
문제지에 쓰여 있는 '어째서 하늘에서 해가 사라졌는가'에 대한 질문의 정답으로, 소녀는 아무 생각없이 '누군가가 죽고 싶지만 살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했다.
당연히 훌륭하게 빨간색 빗금이 문제 번호 위에 그어졌다.
정답은 어딘가의 유명한 과학자의 과학적 가설로 정해져 있었으니까.

세상에는 다양한 대답이 있지만 정해진 것 이외에는 인정받지 못한다.

만약 누군가가 1+1이 3이라는 획기적인 생각을 내어놓더라도 이미 1+1은 2라는 것이 진리이자 사실이고 불변의 정답이다. 온갖 변수나 문학적 재해석 따위를 억지로 이어붙이지 않는 이상은1+1=3은 영원토록 성립되지 못한다.

하지만,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물음에 대한 답마저 정해져 있을 수 있나?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질문에는 그 어떤 대답이라도 정답이 될 수 있는 권리가 있을 것이다. 설령 허무맹랑하거나 엉터리일지라도.
하지만 물론, 지당하신 과학적 가설을 제쳐놓고 어차피 가설이니까 이런 것도 있잖아요-하며 주장했다간 이상한 녀석이나 바보 취급을 받으며 어째서 이 가설이 정답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으로 교정당하는 문제아 신세가 될 것이다.

의외로 인간에게는 창의성의 자유는 그다지 주어지지 않았다.
1+1을 3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자유는 없다.

소녀는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이제 다시는 해가 뜨지 않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문제지의 해답지에 대한 화풀이 같은 생각으로 떠올렸다.
-그렇기에 아마 이 세계는 직접 인간의 그러한 생각을 비틀어주기 위해 나선 것이라고.

소녀의 귀에,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어둠에서 걸어나온 것은 달에 미친 것이다.

세계에 달만이 남게 되었을 때, 세계는 인류가 가장 두려워하던 가능성을 안겨 주며 친절히도 직접 비틀어 주었다. 사고를.
영원히 계속되는 이 밤 뿐인 반절짜리 세계에는 '달빛에 미쳤다'-고 표현되는 인간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이 '사이코패스'이거나, 정신이상자로서 '원래의 사회'에는 도무지 소속될 수 없었다. 그들은 온갖 범죄와 살인을 저질렀고, 모든 범죄율의 수치는 걷잡을 수 없이 수직상승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그들을 두려워한 이유는,
그들의 '회색 눈'이 인간은 볼 수 없는 완벽한 어둠 속을 훤히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세계에 만연한 어둠이 그들의 편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늘어 갔다. 증가해 갔다. 달에 홀렸다.

인간은 자신들이 보지 못한 것에 도달한 그들을 두려워했고.
그들은 자신들을 두려워하는 인간에 대해 혐오했다.

누군가가 주장했다.
드디어 세계가 자정작용을 인간에게도 적용하기 시작했다고.
모두가 이의 없이 그 의견에 하나 둘 씩 동의하기 시작했다.

소녀 혼자만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의 토론장에서 혼자 손을 들었다. 혼자 손을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이의를 제기했다.
주장을 부정했다.

세계가 자정작용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이 드디어 세계에 질리기 시작한 것 뿐이라고.

"네 생각대로야. 너무 심심하고 심심해서 실컷 놀기 시작한 것 뿐이지."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그 남자는 대담히 웃으며 소녀의 생각뿐이었던 부정에 뜬금없이 동의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어떤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던졌다.
머리카락이 소녀의 옆을 스쳐지나가며 피가 호를 그리며 흩뿌려졌다.
말 없이 그저 보고 있는 소녀의 연갈색 눈동자를 보며 그는 가늘게 웃었다.

"인간끼리 죽고 죽이는게 그런 거창한 타이틀을 단다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아?"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약간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세계의 자정작용이 '드디어' 인간에게도 적용되기 시작했다니. 뭐 인간이 대단한 거라도 된다는 것마냥 말하잖아.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아? 입으로는 생태계 보호니 수 보전이니를 떠들더니 전 지구상에 있는 생물에 대하여 민폐 수준으로 수를 늘리는 이 모순적이고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생명체가 말이야."

그는 거치적거린다는 듯이 바닥에 떨어진 여자의 머리를 호쾌할 정도로 옆으로 차 내버렸다.
여자의 머리는 아스팔트로 된 바닥을 몇번 튀어 담장에 부딪쳤다. 부딪친 곳마다 핏자국이 남았다. 남자는 그것을 마치 골인한 공의 모습을 지켜보듯이 히죽거리며 보고 있었다.

"-어-차피,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건 예나 지금이나 즐겁기 위해서일 뿐인 이야기지. 거창한 타이틀을 아무리 붙여봤자 말야-안 그래?"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있을 뿐인 소녀에게 그는 불쑥 피투성이의 하얀 손을 소녀에게 내밀었다. 그는 회색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가만히 있지 말고. 아가씨, 나랑 같이 놀자."

그것은 분명히 흥미로운 사냥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꾀임이었다. 넘어온 사냥감을 갈기갈기 찢어죽이기 위한 말이었다. 쭉 찢어진 듯한 웃음이 그림자 아래에 드리워졌다.
소녀는 그 손 앞에서 도망쳐야 했다. 설령 다시 잡혀 죽게 되더라도 그것이 정답이었다. 도망치는 것으로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소녀는 그 손을 잡고 말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정도는요."

어이없고도 무심한 말이었다.
한순간의 정적 사이에 남자의 회색 눈과 소녀의 연갈색 눈이 마주쳤다.

"...그럼 아가씨를 집까지 에스코트해 드려야겠군."

"친구 없어 보이니까 특별히 친구 해 드릴게요."

"친구는 됐으니까 애인을 해주지 않겠어?"

"그럼 친구도 안 해요."

그리고 남자는 소녀를 죽일 수 없었다.
소녀도 남자를 죽일 수 없었다.
남자는 소녀를 혐오할 수 없었고 소녀는 남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한다.

그들의 관계는 그것 뿐이다.
우연히 만난 이해관계의 일치. 그것 뿐인 정이고 연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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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27 01:37 | 조회 : 1,642 목록
작가의 말
양야

기껏 삽화를 그렸는데 딱히 넣을만한 곳이 없어 프롤로그에 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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