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슬픔이 파도가 되어 밀려 올라오다. 01

로크세르가 남쪽 세무즈레이커와 맞대고 있는 국경지대는 드넓게 펼쳐진 초원과 같다. 하나의 산만이 국경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산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지만 그 주변은 모두 평지기 때문에 산은 꽤나 전략적인 요소가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로크세르 제국은 세무즈레이커 왕국과의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은 지 150년이 넘어 그 곳을 칠 수가 없었다. 또한 이 산이 전략적인 요충지로 활약할 수 있다지만, 그건 5지나 쯤 뒤에서 산의 옆구리를 둘러싸고 있는 ‘머루’ 성의 소유자인 세무즈레이커 왕국 쪽에서나 좋은 편이었다.

산에 나는 작물은 너무나도 조악했고, 그 산 하나를 잡겠다고 로크세르 제국 쪽에서는 굳이 많은 병력을 투입할 이유조차 없었다. 세무즈레이커 왕국은 사실상 그 곳을 국경지대라 여기며 불가침 조약에 상관없이 수비를 강화했고, 로크세르 제국 쪽에서는 계륵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렇다고 세무즈레이커 왕국 쪽에서라도 살기 좋은 곳도 아니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연이 너무나도 구구절절해서 종이 열세 장을 채우고도 눈물로만 한 장을 더 쓸 거라고들 자조하듯 이야기한다. 영주의 폭거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 나온 사람들이라거나, 귀족들의 높은 고리대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 온 화전민 들이 바로 주 서식 층이었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자신의 터전을 악착같이 가꾸며 살아갔다. 겨우 대용 식품들이나 생산할 수 있을 정도여도 그들은 꿋꿋하게 살아가며, 자신들이 사는 터전과도 같은 산에 ‘컬틴’ 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컬틴 산에는 대략 이백 오십 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처음 이주 해왔던 사람들이 거의 사람처럼 살지 못했던 시기에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일구어낸 밭 덕분이었다. 하층민 사이에서 조금씩 탄 입소문으로 사람이 조금씩 모였지만, 일일이 손이 가는 것들이 너무 많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지는 못했다.

이주해온 농민들은 그래도 젊은 나이의 평민 부부가 많았는데, 그나마도 소작농의 자리조차 아직 농사일에 잔뼈가 굵은 중년층에게 빼앗기던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논밭이라는 마음으로 올라왔던 사람들도 꽤나 많았다.

농사도, 개간도 서툴게 시작한 지라 평지의 논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곡식의 질과 양이 떨어졌지만, 그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 만한 양은 되었다. 죽기 살기로 개간한 땅에서, 자식만큼 소중한 곡식으로 삶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컬틴 산의 보릿고개는 산 그 자체다.”

보릿고개를 견디고 넘어가기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모작은 절대로 불가능하며, 기껏해야 봄, 여름을 넘어가기 힘든 식량으론 가을 추수를 견디기가 지옥과도 같았다. 그 때가 되면 늘 컬틴 산은 사냥터가 되었다. 많지 않은 야생 동물들을 잡으며, 풀뿌리를 캐가며, 나무껍질을 벗겨가며 연명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전 해보다 조금 더 일을 열심히, 또 능숙히 해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날이었다.

“세상에,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러게 말예요. 무슨 일이 있어서 저 꼴로 여기까지. 쯧쯧.”

보릿고개를 넘으며 억척스러운 아줌마가 다 된 여자들이 수군수군 떠들었다. 웬만한 일이 있어도, 컬틴 산의 주민들은 놀라지 않았다. 설령 그 사람이 컬틴 산 밖에서 살 때는 어떤 나쁜 짓을 저질렀어도 결국 열심히 일하며 융화되어갔기 때문이다.

누가 와도 컬틴 산에서는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금방 도태되고, 죽고 만다. 긴 사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이 산에서, 누구 하나의 사연을 들어주며 같이 울어주기엔, 당장의 배고픔이 너무나도 가까이 있었다. 아마도, 가장 오래 사는 종족이자 초월자인 ‘타야’들이 여기에 와서 산다고 해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놀랄 정도의 일이었다. 보통 평범한 집안의 이사라곤 할 것도 없는 게, 검과 배낭 하나 빼곤 든 것도 없는 스물 중반이나 되었을까 싶은 젊은 남자와 그보다 약간 어린 여자, 두 사람이 온 몸에 피를 묻히며 걸어오고 있었다. 컬틴 산의 주민들은 ‘싸우던 자’를 산에 받는 일이 처음이었다.

“지혈은, 어느 정도 마쳤습니다. 저 둘을 쉬게 해주시오.”

소란을 뒤로 하고, 남자가 무거워 보이는 입을 먼저 열었다. 꽤나 어색한 말투였지만, 그는 담담히 자신의 두 식솔을 부탁했다. 그 때서야 사람들은 여자에게 안겨있는 아이의 존재를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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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28 08:20 | 조회 : 861 목록
작가의 말
헤르닌

슬픔이라는 건, 가끔 파도가 되어 밀려오기도 합니다. 주인공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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