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시들기를 바라지 않는(2)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던 에르미온이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익숙한 금발의 남자가 눈에 보이자 에르미온은 바로 앉아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무리해서 일어나지 마렴.”

미끄러지듯 에르미온에게로 가까이 다가온 오베론이 에르미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얼굴을 향해 나아가던 손은 잠시 멈칫한 채 그대로 되돌아왔다. 에르미온의 귀에 물든 붉은 자욱이 오베론의 눈에 띄었다.

이미 누군가가 왔다 갔다는 것을 오베론은 곧바로 체감할 수 있었다. 굳이 자국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빈창을 바라보던 에르미온의 눈에 서린 빛은 언제나와는 전혀 달랐다.

잠깐 바라본 것이었지만 오베론은 에르미온의 눈빛이 과거에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과 비슷했다고 생각했다.

루젠에게 축하의 인사라도 전해야 하는 것일까. 몇 천살이 차이가 나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훔치는데 성공하다니. 그 방법이 비록 거짓말에 물들어 있기는 했지만.

하지만 오베론에게는 루젠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할 시간은 없었다.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시간은 오베론에게는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더 시간이 흐르기 전에 루젠과 처리해야 할 일을 끝내야 했다.

몇 번이나 새를 통해 그에게 서신을 보냈지만, 그는 그 편지에 자신의 피로 대충 욕을 휘갈겨서 보낼 뿐이었다. 오베론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애초에 루젠은 에르미온의 말이 아니면 다른 말은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보였으니.

배은망덕한 루젠은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나 있을까.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면 루젠은 아마 스스로 오베론에게 먼저 찾아왔을 것이다.

오베론이 에르미온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평소에도 자주 하던 행동이었기 때문에 에르미온은 거부하지 않고 그저 오베론이 자신에게 할 다음 말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결계를 통해 마물이 기어들어왔단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에르미온이 꼭 아기 고양이 같다고 오베론은 생각했다. 오베론이 처음 만났었을 때 어렸던 에르미온은 그의 눈에는 전혀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타 종족을 만날 때 에르미온이 쓰는 차가운 가면은 오베론의 눈에는 그저 투명한 막일뿐이었다.

“처리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좀 있으니 이틀 후에 내 집무실로 와 주겠니?”

에르미온이 대답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오베론이 에르미온을 향해 빙긋 웃었다. 자꾸만 아래쪽으로 처지려 하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는 것이었기에 오베론의 눈에는 입과 같은 미소는 지어져 있지 않았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누군가에게 하는 거짓말은 오베론에게는 언제나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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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2-11 05:33 | 조회 : 916 목록
작가의 말
부드럽게

2화 뒤가 약수위라고 했죠... 그런데 제가 이 소설 전체에 약수위만 있다고는 한 적이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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